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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외치는 자일 뿐 입니다 (요 1:6~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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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치는 자일 뿐 입니다 (요 1:6~8, 19~28)


[정체성 혼돈의 시대]

요즘 세간의 주목을 끄는 뉴스 중 하나는, 전임 대통령의 형님과 주변 인물들의 비리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보도에 의하면, 직전 대통령의 친인척들 중 관리대상자가 무려 93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대통령 친족의 8촌, 妻․外族의 6촌, 사돈과 종친회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청와대에는 민정수석실이라는 부서가 있습니다. 이부서가 하는 일 중 하나가 대통령 친인척, 측근들 중에서 사고 칠 만한 요주의 인물들의 동향을 체크하고, 관리하는 일입니다. 전 민정수석실 비서관과 행정관들에 의하면, 대통령의 형님 건평 씨가 화를 내면 아무도 막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직접 민정비서관실에 찾아와서 “두고 보자”는 등, 행패를 부리는 수준의 언행을···). 

권력형 비리의 핵심은, 정체성 혼돈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형님게이트라고 불리는 이번 사건은, 비리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本末은, 권력자였던 대통령 자신은 물론, 형님과 주변 인물들의 정체성 혼돈의 문제에 있습니다. 

盧 전 대통령이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이 연임 청탁을 하기 위해 형 건평 씨를 찾아간 사실을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가 뭐 하러 촌사람을 찾아가 굽신거리느냐”며 남 사장을 힐난하며, 형님을 “村老에 불과하다”며 감싸기 바빴습니다. 어디, 이것이 정치권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지키면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도 스스로 자신을 다시 한 번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받은 인물]

본문을 보면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요한이라는 인물입니다(세례 요한). 본문은 두 부분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6-8절은 요한에 대한 소개이고, 19-28절은 요한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무어라 하는 지, 그가 무엇을 증언했던 사람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와 유대종교는, 혜성 같이 나타난 인물, 세례 요한의 정체성과 그의 행동, 증언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톱뉴스였습니다(두 가지 측면에서···).

(1)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만에 혜성처럼 나타난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활동 이후, 세례 요한이 등장하기까지 400년을 신구약중간시대라 부릅니다. 이 400년 동안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가가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아니했습니다. 무슨 이야깁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시대라 할 수 있지요(암흑기, 메시야 대망사상이 팽배···).

40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 속에 나타난 세례 요한의 등장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요한복음 1, 6절 말씀 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는 이 일이 400년 만의 일입니다. 

(2) 세례 요한이 톱뉴스거리가 된 이유에는, 그의 역할이 남달랐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7절 말씀 보십시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그저 외치는 자, 말하는 자가 아니라),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使命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났던 그 어떤 선지자들과는 그 궤적을 전혀 달리하는 아주 특별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증언하러 온 자였습니다. 그의 증언은, 빛 곧 참 빛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대일로(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이 분이 바로 그 분이다), 맞증언하는 선지자였습니다. 400년 만에 나타난 선지자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증언의 내용, 활동상은, 더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요한에게 중대한 문제가 제기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찾아왔습니다(청와대에서 나온 사람;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 예루살렘은,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문화,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종교의 본부도시입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헤롯 성전이 있던 수도입니다. 당시 유대종교/ 예루살렘 성전종교/ 바리새인 종교/ 서기관 종교/ 대제사장의 종교/의 본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운동을 하실 때, 예루살렘이 아닌 이스라엘 북부지역, 갈릴리에서 공생애 대부분을 보내셨습니다. 와서 뭐라고 합니까? “네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본부는, 당연히 세례 요한이라는 그 자의 실체,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급했습니다. 24절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그 사람들은 당시 유대종교의 실세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네가 누구냐?”는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19절).

이 질문을 받게 된 이유가 뭘까요? 본문이 아닌 다른 복음서(마, 막, 눅)를 보면 세례 요한이 와서 한 사역이 정말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는 (유대)광야에서 지내면서, 요단강에서 죄 사함 받게 하는 悔改의 洗禮를 전파했습니다. 온 유대지방 사람은 물론이고,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가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옷차림도 독특했습니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뗬습니다.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광야에서 나는 꿀)을 먹었습니다(막 1, 4-6). 

마태복음에 보면,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이런 무서운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毒蛇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 7-10).

누가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나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군인들도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눅 3, 10-14). 

누가복음 3, 15을 보면 이런 세례 요한을 두고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였더라”합니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은 前代未聞의 놀라운 일을 행하고 선포하였기 때문에, 복음서 중에서도 특별히 요한복음은, 그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하여 중대한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도전을 받았던 세례 요한에게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도전을 받을 만큼 확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다르다지 않고서는 정체성에 대한 도전을 받지 않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좇아가는 時流를 따라사는데, 무슨 정체성의 도전을 받겠습니까? 우리 시대의 가치가 스며든 문화와 因襲的인 지혜를 따라 사는데, 정체성 도전, 없습니다. 因襲打破的인 삶을 살 때, 정체성의 도전을 받습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삽니까? 이런 정체성의 도전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아니라의 정체성]

그런데 요한의 대답을 보면, 그 대답이 놀랍습니다. 그의 대답은, 나는 무엇이다는 정체성이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나는 아니라󰡕는 정체성이었습니다. 요한의 대답을 보십시오(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했습니다. 요한의 정체성은 󰡔나는, ~아니라󰡕는 정체성이었습니다. 나는 빛이 아니다, 나는 메시아도 아니다, 엘리야도 아니다. 그 선지자도 아니다 합니다. 자기부정의 정체성입니다. 

우리에게도 󰡔나는 아니라󰡕는 세례 요한이 가졌던 정체성이 혹 있으십니까? 어찌 보면, 󰡔나는 아니라󰡕는 정체성 不在의 문제가 우리들(한국교회)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본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否認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우상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우상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正面으로 대놓고 반대하거나 거역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모양과 형식을 다 갖춥니다. 그러면서 교묘하게 다른 요소들(인간중심적이고, 세속적인)을 섞어 넣는 혼합주의적인 신앙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도 속고 남도 속입니다. 

우리 안에는, 󰡔나는 무엇이다󰡕는 정체성을 은근하게 다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연약합니다. 나는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할 것을 한 것뿐이라는, 입술의 고백이 아닌 삶의 고백이 부족합니다.

죄송한 이야깁니다만,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로마천주교회의 敎皇無誤說을 아주 잘못된 교리라고 비판합니다. 동일한 성정을 가진 인간, 교황을 無誤하다고 주장하는 교리를 우리는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틀린 주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십시다. 로마천주교회는, 오늘의 한국개신교회보다 그 면에서는 훨씬 더 낫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황무오설은 주장할지언정 그렇다고, 모든 성당의 주임신부님들이 다 무오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오늘의 한국개혁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마다 담임목사들이 마치 자신은 무오한 사람인 것처럼 목회합니다. 교권을 행사합니다. 이는 로마천주교회의 교황무오설보다도 더 심각한 교회의 문제로 제기 되고 있습니다. 목사만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목사 못지않게, 오히려 목사보다 더 힘 있는 주류세력들도 있습니다. 주인의식을 가진 교인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자리가 있습니다. 힘 있는 자리가 있고, 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버지 역할을 하는 사람,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종교의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마태복음 23장에서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마 23, 8-12).

“그러나 너희는(제자들에게) 랍비라 불려서는 안 된다.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또 너희는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가부장적인 리더십)라고 부르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이시니라. 또한 너희는 지도자라고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저는 동생이 다섯입니다. 아버지께서 장남(長孫)이라고 일찍부터 어른 대우해주셨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크고 작은 집안일을, 저와 같이 상의하시곤 하셨습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제가 가끔은 동생들에게 아버지 노릇 비슷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큰 소리도 치고, 매를 때리기도 하고, 말로 동생들을 후리기도 했습니다. 나쁜 의도야 있었겠습니까만, 맏이로서, 형으로서, 오빠로서, 동생들에게 약간은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그 때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맏이노릇을, 형노릇을, 오빠노릇을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텐데, 동생들 생각하면 늘 미안하고, 부끄럽기만 합니다. 

교회 안에는, 목사예수가 있습니다. 목사노릇하면서, 목사가 예수님 자리에 앉는 거지요. 장로예수도 있습니다. 장로노릇하면서 예수님 자리 앉는 겁니다. 집사예수도 있습니다. 집사노릇하면서 예수님 자리 슬쩍 앉습니다. 권사예수도 있습니다. 권사노릇하면서, 예수님자리 앉습니다. 부자예수도 있습니다. 명예예수도 있습니다. 창립예수도 있고(주님의 교회의 주인이신데···), 오래됨 예수도 있고, 자랑예수도 있습니다(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나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숨기지 아니하고, 드러내어 말하면서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십니까? 세례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엘리야도 아닙니다. 그 선지자도 아닙니다󰡕고 말하자, 예루살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 거듭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22절) 그러자 세례 요한이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24절). 그러면서 더 밝히 대답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6-27).

이와 같은 정체성을 가졌던 세례 요한이었지만, 사실은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목한 가정을 통하여, 태어난 언약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 사가랴입니다. 어머니는 아론의 자손 엘리사벳입니다. 양부모 모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義人이었습니다.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던 경건한 자들입니다. 

그런 그였지만, 그는 자신을 선지자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숨기지 아니하고 드러내어 놓고 '나는, 아니라'고 하는 정체성을 가진 세례 요한을 증언을 통해서, 참 빛으로 증거 받으셨습니다. 대림절을 지키면서 우리 안에 '나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입니다는 분명한 정체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 합창으로 울려 퍼질 때, 우리와 우리교회 안에 참 빛 되신 예수님이 증거 되실 것입니다. 아멘. 

주님, 주님의 자리에 앉아 있던 교만한 우리들, 오시는 주님 앞에서, "나는 아닙니다. 나는,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입니다"는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게 하옵소서. 주님만 높임 받으시는 우리와 우리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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