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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의 빛과 소금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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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과 소금 (마 5:13~16)


우리는 지난 8주 동안 산상수훈 가운데 팔복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보았습니다. 팔복은 이 세상이 아닌 천국의 가치관을 말해 줍니다. 이는 산상수훈의 다른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실인즉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천국의 시민입니다. 살아가는 모양새가 비슷해 보여도 삶의 목적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살아가는 모습도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에서 어딘지 모르게 그리스도인의 냄새가 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아리송하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오늘 산상수훈에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은 짠맛으로, 빛은 밝음으로 자기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먹어서 짠맛이 나지 않으면 아무리 소금처럼 보여도 그것은 소금이 아닙니다.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높이 얹어놓지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말 들이 됫박으로 등불을 덮어두면 등불을 켜나 마나입니다. 소금과 빛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금이나 다이아몬드나 진주 따위를 귀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물건을 사려면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금이나 다이아몬드나 진주는 언제라도 보석상에 가서 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요즘과 같이 돈 가치가 떨어질 때는 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릅니다. 순금 한 돈에 15만원씩이나 합니다. 거기 비하면, 소금은 너무나 저렴합니다. 

우리나라 신안군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은 질적으로 최고로 치는데, 30kg에 15,000원 정도합니다. 소금값은 금값과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으리만치 저렴합니다. 소금값이 저렴한 것은 쉽게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금은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값이 비쌉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소금이 금보다 몇 백배 더 소중한 물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금은 없어도 상관이 없지만, 소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금은 우리의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합니다. 중요한 몇 가지만 소개하면, 우리의 세포 속의 노폐물을 제거하고, 혈관 경화를 막는 작용을 하며, 삼투압 작용을 통해 신진대사를 촉진시키고, 신체 내에 세균이 침투해도 세포와 혈관까지 침입하지 못하도록 저항력을 높여 준다고 합니다. 또한 발한 작용을 통해 체온조절을 도와주고, 장의 유동력을 높이고, 소화액의 분비를 도와준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소금은 식품을 오래 저장할 때 필수적입니다. 생선을 저릴 때, 햄이나 소시지를 만들 때 소금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인들은 김치나 장이나 젓갈을 담글 때도 소금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소금을 넣지 않는다면 식품이 곧장 썩고 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금은 방부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이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경제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에 와서 경제활동을 하는 외국인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50.5%가 한국 공직사회가 부패했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57.1%로 나왔다고 합니다. 공직사회가 부패했다는 것은 공무원들을 상대하는 민간인들도 똑같이 부패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인들이 기업인들과 유착되어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교회 장로이고, 현역 국회의원 가운데 약 40%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299명 가운데 120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수의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사회가 이처럼 부패한 것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2005년 11월 현재 우리나라 인구는 4727만 9천여 명이고, 이중에 기독교인이 861만 6천명(18.3%)이고, 천주교인이 514만 6천명(10.9%)이고, 불교인이 1072만 6천명(22.8%)로 나타났습니다. 그 동안 기독교에서 말해온 1200만 명은 정확한 통계치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전체 국민의 18.3%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대단히 높은 비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닷물에는 약 3.5%의 소금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이 3.5%의 소금으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바다가 썩지 않고 각종 어류와 해초가 살아가는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 비하면, 전 국민의 18%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엄청난 영향력을 우리 사회에 끼치고도 남을 비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연, 기독교인들이 우리 사회에 신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이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는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이러한 것을 조사해서 통계를 내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소금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저를 비롯해서 성도님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땅의 기독교인은 누구나 연대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심각한 결과가 생깁니다. 그것은 소금을 대신할 물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주님의 말씀과 같이,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습니다. 소금이어야 할 기독교인들이 부패했다면 누구에게 기대를 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사회가 부패의 늪에 빠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맛잃은 소금에 대하여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맛 잃은 기독교인은 이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여 밟히는 처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한다면 우리 사회는 점점 부패가 사라지고 정화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사회가 정화된 것이 기독교인들의 덕분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소금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음식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국은 먹기가 곤란합니다. 소금을 넣지 않고 담근 김치를 무슨 맛으로 먹을 수 있을까요? 소금을 넣지 않은 떡이나 빵도 맛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미건조한 음식은 식욕을 돋구기는커녕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짜증이 나게 만듭니다. 아무리 최고급 요리사라도 소금을 넣지 않고 음식의 맛을 내기란 불가능합니다. 반면에, 적당한 량의 소금을 넣으면 음식의 맛이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더러 맛을 내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살맛이 나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생활이 경건해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것이 활력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생활 속에 활력이 넘쳐야 합니다. 생활의 활력은 주변 환경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상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면 저절로 생활에 활력이 생깁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마음속에 사죄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 속죄함을 받은 후 한없는 기쁨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늘 찬송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해를 이루었으므로 마음을 짓누르던 죄책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강과 구원의 기쁨을 맛보면서 살게 됩니다. 이처럼 내 마음이 평안하고 기뻐야 어딜 가든지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살맛나게 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맛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어느 블로그에서, 피난 시절에 죽음의 공포와 굶주림 속에서도 사람들이 웃음을 잃지 않았던 것을 회상하면서 현실에 대하여 탄식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국민소득 5천불의 선진국 문턱에서 물질과 부를 향락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린 웃음을 잃어버렸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웃음이 사라진 우리들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 것이란 말일세. 개인도 웃음을 잃고, 가정도 웃음을 잃고, 직장도 웃음을 잃고, 그래서 국가도 웃음을 잃고 말았네... 웃음이란 인간 정서의 가장 진실한 표현일세... 우리에게 지금 웃음이 있다면 자조의 웃음이거나 비웃음이거나 아니면 꾸며진 거짓웃음일세. 우리들의 웃음은 어데로 갔단 말인가...?”(김상열 著 -광대와 시인- 중에서) 

공감이 가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평강과 기쁨은 경제적인 번영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실감합니다. 사람의 욕망은 한이 없어서 잘 살게 될수록 더욱 더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욕망의 포로가 된 사람은 지속적인 욕구 불만에 고통당하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행복은 우리의 내면의 상태에 좌우됩니다. 그리고 우리 내면의 상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평강과 기쁨을 물 붓듯이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가 있으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선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에 들어가서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이, 살맛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살맛을 느끼게 해 주는 역할을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소금의 사명을 다하면서 살아갈 때 믿지 않는 이웃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당신들은 어쩌면 그렇게 생활에 활력이 넘칩니까? 그 비결을 나에게도 말해 주세요”라고 부탁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믿는 성도에게 주신 가장 영예로운 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주님과 닮은 자라고 인정하신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빛으로 오셨는데, 그를 믿는 우리에게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살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요즘은 집집마다 전등을 사용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등잔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등잔의 기름은 주로 올리브유를 사용했습니다. 고대에는 성냥이 없었으므로 등잔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다루었습니다. 평소에는 등잔을 나무로 만든 등경위에 올려놓아 방안을 밝혔으나 외출할 때에는 안전을 고려해서 등잔을 내려서 점토로 만든 됫박 위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등잔의 원래의 자리는 등경 위이지 됫박 위가 아닙니다. 더구나 됫박으로 등잔불을 덮어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등불이 등불로서의 역할을 하게 하려면 할 수 있는한 방안을 두루 비출 수 있는 높은 위치에 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빛은 그 성격상 자신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를 남들 앞에서 자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드러내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인 사실을 밝히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기독교인이면서 그 사실을 감추고 지내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도 드리고 교우들과 친교도 나누지만, 일단 교회 밖으로 나가면 기독교인의 표시를 전혀 내지 않습니다. 마치 비 기독교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기에 편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빛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은 자신을 감출 수 없는데, 그리스도인인 자신의 정체를 감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과연 구원받은 사람인가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밝히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빛이 비추면 어둠은 사라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죄악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밝고 정결한 분위기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을 발하는 것은 곧 그의 착한 행실을 말합니다. 우리가 착한 행실을 나타낼 때 이를 본 사람들이 어두움에 속한 행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착한 행실을 본받게 됩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뇌물을 주거나 받지 않을 때, 우리의 바른 행실을 본 사람들이 감화를 받고 그들도 바른 생활을 하려고 힘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길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밤에 가로등이 없는 외딴 길을 가려면 자칫 실수를 해서 구덩이에 빠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또는 강도나 도둑을 만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가로등이 환히 켜져 있는 거리는 대낮처럼 걱정 없이 다닐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인생의 바른 길을 비추어줄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실생활을 통해서 그들에게 바르게 사는 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릇된 길로 가는 사람을 보고서 침묵할 것이 아니라 “당신은 지금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이 몸소 행동으로서 바른 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불신 가족이 우리의 바른 행실의 빛을 보고 감화를 받아 주님 앞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한편, 온 가족이 다 빛을 발한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은 어둠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고 빛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소리가 들려오는 스위트 홈이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도님들의 가정에서 발하는 환한 빛을 본 이웃 사람들이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비결을 물어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터에서도 빛을 발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또는 사업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행실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착한 행실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더라도 빛과 같이 저절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나 자신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로써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보다 행동으로서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슨 선행을 하게 되면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도로 하는 선행은 진정한 선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빛이 어둠을 밝히는 것은 빛의 성격상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착한 행실을 하는 것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로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얼굴을 내고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행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기대하고 무슨 선을 행한다면 그러한 선행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행동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할 때 비로소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본 불신 이웃들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다”고 할 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잘못된 행실을 하면 불신 이웃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우리와 별반 다른 것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만 창피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도 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게 됩니다. 

작금에 우리 사회에서 종교 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안티 기독교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들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국민들이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큰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갖고 있는데, 정작 그들의 기대에 미달하는 것을 보았을 때 실망하여 기대한 만큼 반감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이 땅의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 나간다면 기독교로부터 멀어졌던 이 국민의 관심과 신뢰를 회복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려면 물에 녹아 버려야 합니다. 소금 알갱이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소금으로서 아무런 역할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를 정화하고,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는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은 스스로를 태움으로써 주위를 밝힙니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겸손한 자세로서 묵묵히 선한 행실을 할 때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이 세상에서 짠맛을 간직한 소금과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서 사명을 감당하심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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