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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벼랑 끝에서 웃는 사람들 (단 3: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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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서 웃는 사람들! (단 3:13~30)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람의 도움도 중요하고 나라의 도움도 중요하지만, 잘 믿던 못 믿던 실개천 같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해 보자는 말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진실한 믿음은 틀림없이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이 그 날이요, 이 시간이 그 시간인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삶의 실망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진실로 사모해 보십시오.  우리는 한 생애를 살면서 수많은 실망과 염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실망, 남편에 대한 실망, 아내에 대한 실망, 부모에 대한 실망, 자녀에 대한 실망, 사회에 대한 실망, 사업에 대한 실망, 이웃에 대한 실망, 지도자에 대한 실망, 자신의 운명에 대한 실망, 이런 실망들이 마음속에 가득하게 차 오르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화가 일어납니다.  기억하십시오.  분노는 한탄을 낳고 한탄은 신세타령을 낳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적인 실망이 자신을 삼키지 못하도록 우리가 버텨야 합니다.  믿음이란 환경적인 실망이 자신을 삼키지 못하도록 하늘의 능력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나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 앞에서 쉽게 넘어지면 안됩니다.  모든 사람들 속에는 실망과 분노가 파도처럼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내 눈으로 이해할 수 없고 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는 하나님의 믿음의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더 믿음을 붙들어야 됩니다.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운 때일수록 더욱 내 영혼에 생기를 채워야 됩니다.  내 영혼에 주의 성령을 채워야 됩니다.

♬"주 내 맘에 오신 후에 주 날 인도하시네
주께 내 맘 드린 후에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사랑할수록 주 날 사랑해
매일 내 맘에 기쁨이 넘치네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내 마음을 온전히 드려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해 보십시오.  주님을 더 뜨겁게 섬겨보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섬기면 섬길수록 여러분의 심령에는 말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모든 삶의 미완성을 수용하는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믿음이 있습니까?  내 인생에 밀려오는 실패와 고난과 아픔도 넉넉하게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놀이와 가식을 다 벗어버리십시오.  내 눈으로 이해할 수 없고 내 삶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전개될 때 그 모든 것들을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수용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비판하고 판단하면 그것이 무슨 믿음입니까?
 
우리 모두는 목적지를 향해서 제 각기 다른 길로 걷고 있습니다.  모든 성급한 어리석은 비판과 판단을 뒤로 미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길은 다른 사람의 길보다 더 험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이 실패도, 이 어려움도, 이 곤고함도, 이 눈물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인간의 능력보다 위대합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만 받으면, 은혜만 붙들면, 은혜만 오면 살 길이 있습니다.  오늘 나의 문제가 무엇이든, 내 외부적인 압력이 무엇이든 모두 다 접어 두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 안에서 삶의 모든 긴장을 푸십시오.  삶의 모든 염려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성령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를 얻으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말씀 중에 참으로 은혜가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으리라"(미 3:8)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여호와의 신으로 다시 권능의 채움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신의 권능의 채움을 받으면 사랑이 나타납니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힘이 나타납니다.  남을 도울 수 없고 헌신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도 힘이 나타납니다.  남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며 봉사할 수 있는 힘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기쁨이 나타납니다.  즐겁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을 보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 영혼에 강 같은 평안이 철철 넘쳐흐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든, 우리의 환경이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삶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환경이 어떻든, 무슨 태산 같은 문제가 나를 짓누르고, 이제 나가면 하늘이 꺼져 내리고 땅이 무너져 내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자유 함을 얻으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영혼에 자유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에 자유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집안에 자유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직장과 기업에 주님이 주시는 이 참된 자유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해방자입니다.  눌린 자를 해방시키십니다.  갇힌 자와 묶인 자를 해방시키십니다.  병든 자를 해방케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해방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해방하시는 분이 염려하고 걱정하겠습니까?  무슨 염려가 그렇게 많으십니까?  Don't worry!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꿈을 꾸십시오.  염려에 붙들려 인생의 모험을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 오늘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 붙들려서 인생의 모험을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 오늘 하나님을 붙들고 자유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에서 위대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여유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이 말씀의 원어의 뜻은 모든 날이 모든 문제를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문제가 있다면 내일도 문제가 있습니다.  모레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라고 하는 것은 저주나 내 삶의 어떤 잘못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 삶을 더 깨끗하게 하게 하고, 내 영혼을 더 순화시키고, 내 삶을 더 똘똘하게 만들고, 내 삶의 영역을 넓혀주는 또 다른 인생 길에 주시는 축복일 뿐입니다.
 
문제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문제가 없으면 능력도 없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기도도 없습니다.  문제가 없다면 성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가슴을 쫙 펴십시오.  나는 문제 속에서 이만큼 컸다!  사실 돌이켜 보면 오늘의 이것은 어제까지의 문제였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염려는 생각의 일종입니다.  좋은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염려를 할 수도 있고 근심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나는 오늘부터 염려하지 않는다!"라고 선포하십시오.  이 시간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다짐을 받으십시다.
"오늘부터 우리 염려하지 맙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염려는 생각의 일종 일 뿐입니다.  염려를 자주 하면 마음이 둔해진다고 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한 번 가만히 보십시오.  아들이 염려를 많이 하면 마음이 둔해집니다.  남편이 염려를 많이 하면 마음이 둔해집니다.  염려를 많이 하고 걱정을 많이 하고 근심을 많이 하면 남편이 그때부터 일을 못하기 시작합니다.  아내도 살림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염려를 자주 하면 마음이 둔해지기 때문에 창의력도, 지혜도, 결단력도, 꿈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염려를 하는 사람은 쉽게 피곤합니다.  그래서 염려를 자주 하는 사람은 일에 대한 추진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느니라."

염려 때문에 마음이 둔하여 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염려를 하지 마십시오.  '염려'라는 말은 마음이 갈라진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흩어진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찢어진다는 말입니다.  주인을 잃어버린 마음은 찢어집니다.  목표를 잃어버린 마음은 흩어집니다.  밥을 먹어도 꿈을 꾸어도, 무슨 일을 해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작은 것에 붙잡히지 말고 큰 것에 붙잡히십시오.  그리하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큰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먼저 큰 것에 붙잡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사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대개 삶의 혼란 앞에 염려합니다.  혼돈이 왔을 때,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삶의 혼란 앞에 염려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혼돈이나 혼란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성령의 운행일 뿐입니다.  우리가 생각나는 대로 이 혼란 때문에 이제는 망했구나!  이제는 큰일 났구나!  그렇지만 아닙니다.  혼란과 혼돈 속에서 하나님의 신은 또 다른 질서와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강하게 의지하고 혼돈 앞에서 좀더 태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순간에도 이 혼돈 앞에서도 이 혼란  앞에서도 하나님의 신은 운행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이들이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거운 극렬히 타는 풀무불 앞에 섰을 때에 얼마나 큰 혼란 앞에 섰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한 혼란 앞에 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의 벼랑 끝에 선 이들이 취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지 관심 있게 관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에 어떻게 반응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지를 배우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지금 느부갓네살 왕이 노발대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이 만든 금신상에 절하지 않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크게 분노하고 있는 왕 앞에 끌려왔습니다.  왕이 그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줍니다.  지금이라도 절을 하면 살려주겠지만 만약 여전히 절하지 않으면 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저 풀무불 가운데 던져 죽이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절명의 벼랑 끝에 선 사람이 다름 아닌 나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할 것 같습니까?
 
지금 느부갓네살 왕의 분노는 대단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왕을 신격화했기 때문에 왕은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때문에 지금 그들에게 임한 고난은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힘으로는 그 고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정말 두려운 벼랑 끝에서의 상황에 한 순간 눈 딱 감고 절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왔지만 지금은 그 바벨론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습니다.  한 순간 눈 딱 감고 절하면 좋은 위치를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이 상황에 처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하실 것 같습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이들은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일곱 배나 뜨겁게 태워진 풀무불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왕이 하는 말에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본문 16절과 17절까지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믿음의 반응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인생이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환경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하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던지는 상처 나고 모진 말에 감정으로 반응하지 말고 믿음으로 반응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의 반응을 할 수가 있는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도우심과 역사를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능히 건져내실 것이며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이며 믿음의 선포입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도, 극력하게 타는 풀무불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담대함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들과 같이 담대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은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담대할 수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11장 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바로 알아 가십시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강해집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용맹을 떨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기억하십시오.  그는 벼랑 끝에서도 웃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알아 가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을 때 그들은 다니엘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진미, 다시 말해서 우상에게 바쳐진 재물과 포도주를 먹지 않고 대신 채식을 하고 물만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모든 소년들보다 더 아름답고 살이 윤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따라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믿음에 상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왕 앞에서 왕을 모시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왕은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의 박수와 술객보다 열 배나 나은 줄을 알게 됩니다.
 
이들의 담대함과 용기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들의 용기요, 담대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의 용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을 경험한 후에 그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봉착하면 다시 두려워하고 염려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 인생이 벼랑 끝에 서 있을지라도, 그래서 힘들고 곤고한 환경이 나를 짓누르고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실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의 능력을 알고 기도의 응답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니엘 2장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는 그 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모든 박수와 술객, 점쟁이, 술사를 불러 자신이 꾼 꿈을 알아내고 해석하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 안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황당하지 않습니까?  내가 꾼 꿈도 해석하기가 어려운데, 남이 꾼 꿈의 내용을 알아내야 하고, 또 그 꿈을 해석하라니 말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시간을 주면 왕의 꿈을 알게 하고 그 꿈을 해석해 보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은 세 친구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의 부탁을 받은 세 친구는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합심기도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밤에 은밀한 것을 다니엘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다니엘 2장 19절에 보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다니엘이 왕의 꿈을 알아내고 해석해 주었을 때 왕이 먼저 다니엘의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왕은 다니엘을 높여 바벨론의 온 도를 다스리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도 다니엘의 요청에 따라 바벨론의 도를 다스리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의 맛을 아는 사람은 기도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문제 앞에서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사람은 역사가 암울하고 어두울 때 이상과 꿈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가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할 수 있으면 합심해서 기도하십시오.  합심해서 기도할 때 더욱 강력한 힘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인생이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에라도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기도의 줄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벼랑 끝에 서는 고난에 처했을 때 믿음으로 반응했을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반응했습니다.  어쩌면 두 번째 반응이 더 감동적입니다.  본문 1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반응은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감동시킨 것은 사랑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풀무불에서 구원해 주지 않으셔도,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지 않으셔도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만이 우리를 담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우리를 담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면 담대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참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사랑은 부드러운 단어 같지만 사랑만큼 강한 단어도 없습니다.  사랑처럼 강한 힘도 없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는 두려움을 내 쫓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더욱 사랑하려고 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강렬해지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해지면 두려움과 미움과 절망은 밀려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숙한 사랑은 조건을 내세우고 반응이나 결과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조건을 초월합니다.  성숙한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사랑은 조건을 초월한 사랑이며 성숙하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고귀한 사랑이요, 감동을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조건적인 사랑에 지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만날 때 감격합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을 때 우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벨론에서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역만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사랑은 결과를 빨리 기대하지 않습니다.  반응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반응에만 매여 사랑하지 않습니다.  결과나 반응을 생각하며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은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에 그렇게 잘 반응을 보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때문에 반응을 생각하며 사랑하면 결국 사랑할 수 없는 이유들만 많이 발견하게 되고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한 경험이나 느낌을 언어로 표현해서 그것을 거듭 느끼며 간직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은 특별히 불행해서가 아니라 불행한 경험과 상처들을 자꾸 언어로 표현해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불행한 것은 행복한 경험들은 표현하지 않고 불행한 것만 골라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중에 인생은 더욱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언어의 표현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그들의 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동일하게 오늘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을 피하게 하실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것도 일곱 배나 극렬하게 타오르는 풀무불 속으로 던져 넣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민족, 사랑하는 사람, 더욱 귀하게 쓰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이사야 48장 10절에 보면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그런데 놀라운 말씀이 이어집니다.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고난의 풀무불에서 선택한 그를 부르시며, 그를 인도하시고, 그의 길을 형통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형통은 사명을 완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고난의 풀무불에 집어넣으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고난의 풀무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하나님은 귀한 사명을 맡은 자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불 속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풀무는 찌꺼기를 제거하는 곳입니다.  고난의 용광로 속에 들어가면 우리의 더러운 부분들이 씻겨 나갑니다.  그때 우리는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깨끗한 그릇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어떤 그릇보다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십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불 속에서 우리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미숙함에서 성숙함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미숙할 때에는 쉽게 요동하지만 성숙하면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미숙한 사람은 조급하여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인내할 줄 압니다.  기다릴 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내의 사람들입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다리면서 준비합니다.  기다리면서 기대합니다.  기다리면서 신뢰하며 성숙해 갑니다.  서서히 무르익습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인내는 시련을 통해, 시련에 올바로 반응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인생이 힘들어도 조금 더 참으십시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끝을 모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벼랑 끝에서 날아오른 것이 아니라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반응하고, 사랑으로 반응하고, 거룩으로 반응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회복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회복의 축복을 만끽하게 됩니다.  이전보다 더한 축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어렵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나 어려운 인생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반응하십시오.  시련 중에도 잘 표현하십시오.  믿음으로 표현하고 사랑으로 표현하십시오.  감사로 표현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성숙한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놀라운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극렬한 풀무불을 통과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쉽게 낙심하지 마십시오.  쉽게 포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다 끝난 것 같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솟구쳐 오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조금만 더 인내하십시오.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자신을 맡기십시오.  정녕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벼랑 끝에 서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벼랑 끝은 위험한 곳입니다.  벼랑 끝은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곳입니다.  놀랍고 무서운 곳입니다.  흑암이 깃든 곳이요, 아픔과 슬픔이 가중된 곳입니다.  그래서 벼랑 끝에 서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좌절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절망하고 낙담합니다.  인생을 포기해 버리거나 심지어 인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벼랑 끝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바로 이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벼랑 끝이 인생의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벼랑 끝은 썰물과 밀물이 만나는 곳입니다.  썰물의 때가 지나면 반드시 밀물의 때가 있습니다.  썰물과 밀물이 교차되는 것이 벼랑 끝입니다.  벼랑 끝에 섰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벼랑 끝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장소입니다.  때문에 벼랑 끝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입니다.  벼랑 끝에서 고통은 환희로 바뀝니다.  벼랑 끝에 섰다고 결코 낙담하지 마십시오.  나 혼자만 벼랑 끝에 선 것이 아닙니다.  벼랑 끝을 통과했던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곁에서 당신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조금 더 인내하십시오.  조금 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십시오.

일곱 배나 뜨겁게 타오르는 풀무불 속에 던져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그들은 던져짐과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풀무불 속에서 임재하신 하나님과 웃고 있습니다.  웃으면서 걷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분명히 벼랑 끝에 설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내가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벼랑 끝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배우십시오.  벼랑 끝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렸던 사람들은 벼랑 끝에서 올바로 반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벼랑 끝에서 웃는 사람들!  그들은 벼랑 끝에서도 틀림없이 찬양과 기도로 흩어지는 마음을 주께로 모았을 것입니다.  갈라지는 마음을 모았을 것입니다.  목표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모았을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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