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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수아의 마지막 유언 (수 2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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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고별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호수아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각 지파의 기업의 분배를 마쳤습니다. 이제 그도 이 땅의 나그네 생을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의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 권면을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들을 모았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110세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 세상 나그네 삶을 마감하기 전에 백성들에게 전하는 유언은 자신이 이 땅에서 체험한 하나님을 전하는 것으로 그의 유언의 도입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의 체험에서 얻은 것을 백성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는 광야 교회 40년의 산 증인입니다. 그는 일평생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그의 고별사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교차되는 권면입니다. 

Ⅰ. 긍정적인 면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23장 6절에 『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여기 『 힘써 』라는 말은 꽉 붙들고 매달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강조의 의미를 지닌 『 크게 』라는 부사가 붙은 것을 감안할 때 '힘써'라는 의미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일평생 동안 고락간에 이 말씀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방자히 행하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정탐하러 갔던 열 사람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민수기 13장 30-33절에 『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었습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에 제일 큰 적은 가나안 족속들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적은 바로 백성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갈등과 반목과 불신의 벽을 넘어 마침내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친근히 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23장 8절에 『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고 했습니다. 
여기 『 친근히 』(티드바쿠, )라는 말은 '바싹 밀착하다', '견고히 달라붙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창세기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창 2:24). 
이 말의 의도는 백성들이 좌우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언약의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꽉 달라붙어 있는 것이 세속에 오염되지 않게 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신명기 10장 20절에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고 했습니다. 
여기 『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는 말은 요단강가의 제단 사건을 배경하고 말하는 것입니다(수 22:10-30). 

이 제단 사건은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볼만한 큰 단을 쌓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니 자신들의 자손에게 속한 편에 단을 쌓았습니다(수 22:10-11). 이 일로 그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이 일전을 불사하게 됩니다(수 22:12).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르앗 땅에 도착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호수아 22장 16절에 『 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날 여호와를 좇는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고자 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이때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이스라엘 천만인의 두령에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수아 22장 22-23절에 『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께 패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는 오늘날 우리를 구원치 마시옵소서 우리가 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혹시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혹시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어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두 지파 반의 열심과 아홉 지파 반의 의분이 동시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뜨거운 신앙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23장 11절에 『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고 했습니다. 

여기 『 조심하여 』(샤마르, )라는 말은 '울타리를 치다', '지키다', '유의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절대로 나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기 『 사랑 』(아헤브, )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저주를 받지 않고 축복을 받으려고 하면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르라는 말입니다. 

신명기 7장 9-10절에 『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어떤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온전히 이룬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6장 5절에 『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고 했습니다. 

신명기 11장 13절에 『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4) 하나님만 섬기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14절에 『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당위성을 수많은 체험적 증거를 바탕으로 백성들에게 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백성들을 향하여 조금도 거침없이 후회 없는 바른 선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을 외부로부터 강요당할 때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스스로 택할 것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백성들은 그들 스스로가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24:16). 

여호수아 24장 18절에 『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

여호수아 24장 21-24절에 『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고 했습니다. 


Ⅱ. 부정적인 면입니다. 

1)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문 23장 7절에 『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① 가나안 족속 이방민족에게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전통과 신앙의 순결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는 이방종교로 인한 죄를 범할 수가 없습니다. ② 이방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방신들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잡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③ 신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맹세한다는 말은 이방신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약속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방신 앞에서 맹세하게 되면 이방신의 존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방 잡신의 권위까지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④ 그것을 섬겨서 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 섬긴다는 말은 단순한 봉사보다는 어떤 권위에 대하여 복종하고 모든 명령에 순종하여 따르는 일체의 행위를 말합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데까지 왔을 때는 이방종교의 의식적 참여 정도가 아니라 이쯤 되면 하나님을 버린 상태입니다. 절한다는 것은 자신을 굽힌다는 의미로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우상숭배 단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들에로 간 자들이 시대 시대마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수없이 많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율법으로부터 떠나가지 않도록 이방민족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왜 이런 고별 설교를 했습니까?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아직도 미개척지가 있었습니다. 그 미개척지에는 여전히 우상숭배가 창궐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쉽게 이방에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습니다. 


2) 세상과 타협하여 통혼(通婚)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문 23장 12-13절에 『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 『 퇴보 』(退步)라는 말은 '돌이키다'는 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는 배교 행위를 말합니다. 자녀들을 이방족속들과 혼인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7장 3절에 『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18장 22절에 『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과의 통혼을 엄히 금한 것은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 보존이라는 목적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과의 혼인금지의 진정한 의미는 필연적으로 야기(惹起)되는 이방문화와의 동화 때문입니다. 이방문화와의 동화는 곧 우상숭배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문화적 교류는 전부의 교류입니다. 

신명기 7장 4절에 『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과 끝내 교류하고 혼인까지 하게 되면 결국 가나안 족속으로 말미암아 파멸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33절에 『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로 내게 범죄케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 』고 했습니다. 

민수기 33장 55-56절에 『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은 나팔을 미리 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간을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죽음은 우리에게 최소한 마지막 말을 남길 시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80세의 공자의 마지막 말은 "지는 꽃잎처럼 현자는 그렇게 가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석가(고타마 싯다르타)는 그의 임종시에 "태어나는 모든 사물은 덧없으며 결국 죽는 구나."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빌렸네. 그에게 그것을 제물로 바치게."라고 했습니다. 

마호메트의 마지막 말은 "알라시여 나의 사투에 함께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너무 일찍 죽은 세계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의 마지막 말은 "가장 강한 자"라고 했습니다. 

폭군 네로 황제의 마지막 말은 "한 예술가가 가고, 세계는 혼란스러워지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세계를 호령한 징기스칸의 마지막 말은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잠을 잤구나."라고 했습니다. 

죽음 직전에 회개한 헨리 8세의 마지막 말은 "우선 잠을 좀 자야겠소."라고 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을 만든 엘리자베스 여왕의 마지막 말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주 짧은 한 순간을 위한 것이었어."라고 했습니다. 

망명과 패배로 점철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마지막 말은 "세단에 참전하셨나요?"라고 했습니다. 

군주를 잘못 만난 세네카의 마지막 말은 "그래 네가 거기에 있었구나."라고 했습니다. 

로마제국의 대명사 율리우스 가이사의 마지막 말은 "브루투스 너마저도"라고 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대 재상 카라 부스타파의 마지막 말은 "뱀을 내 목 주위에 가지런히 놓아 주시오."라고 했습니다. 

격동의 시대를 이끈 정치인 윈스턴 처칠의 마지막 말은 "모든 것이 지루하구나."라고 했습니다. 

자유의 승리를 이끈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마지막 말은 "머리가 지독하게 아프구나."라고 했습니다. 

파시즘의 창시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마지막 말은 "내 가슴을 쏴라."였습니다. 

나에겐 꿈이 있다고 한 미국의 흑인 해방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마지막 말은 "주여 내 손을 잡아 주소서 를 연주하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리고 특히 아름답게 연주해야만 하오."라고 했습니다. 

현대를 만든 발명왕 토마스 알바 에디슨의 마지막 말은 "저곳은 참으로 멋진 것 같소."라고 했습니다. 

신이 선택한 천재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말은 "이 세상에서 내 할일은 다 한 것 같구나."라고 했습니다. 

국민 문학의 아버지 레프 톨스토이의 마지막 말은 "농부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나요?"라고 했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마지막 말은 "엘리자베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칠언 중 마지막 말은 "다 이루었다."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 13:1). 

엘리사가 죽을병에 들었습니다(왕하 13:14). 엘리사는 자기 나라와 자기 백성을 끝까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요아스 왕에게 화살을 취하여 땅을 치라고 했을 때 세 번치고 그쳤습니다(왕하 13:18). 엘리사가 요아스에게 오 육번 치지 않고 세 번만 쳤다고 노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람을 완전히 진멸하도록 했는데도 그가 우유부단하여 끝까지 아람을 치지 않은 것을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에게 땅을 친 횟수만큼의 승리만 허용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로부터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고백을 받고 돌을 세워 증거를 삼았습니다. 

여호수아 24장 27절에 『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돌로 만든 기념비가 말을 듣는 귀를 가진 것처럼 의인화시켰습니다. 돌까지도 이 말씀을 들었는데 하물며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 못했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누가복음 19장 40절에 『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앞에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간 주의 종들처럼 평소에 하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평소에 하는 말을 죽음 앞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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