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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평화의 메시야 (눅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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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메시야 (눅 2:8~20) 


복음서 집필자들은 특별히 예수님의 사역과 기능적 측면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특별히 누가복음서의 저자는 누가복음 2:11-12절에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적극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에 촛점을 맞추다 보니 초라한 모습이지만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인 예수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바로 다음 절에서는 이러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평화의 메시야(Messish)로서 천군 천사의 칭송을 받고 있음을 소개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 탄생 당시 목자들에게 전하여 준 천군과 천사들의 노래를 통하여 평화(Peace)의 메시야(Messish)로 오신 주님을 통해 큰 희망과 용기를 얻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이 애환에 깊이 동참하시기 위하여 오신 사건이 성탄절입니다.

"메시야(Messish)"란 이름은 히브리어로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이며(요 1:41절). 번역하면 '그리스도'란 뜻입니다. 기름 부은 자는 대제사장에 의하여 사용되었고(레4:3, 5, 16,6:15), 왕(삼상24:6)과 족장(시5:9-12), 그리고 예언자, 혹은 선지자(시105:8-15)에게 사용되어 졌습니다. 그리고 속죄자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소개합니다(단9:25, 시:2:2,눅23:2,39).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누가는 메시야의 탄생 선포를 <하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땅위에는 새로운 평화의 때가 도래한 것>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리스도(메시야, Peace)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평화와 구원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구원을 위한 말씀 언약을 성취하신 사랑의 행위라면, 평화 역시 인간의 전 인격적인 종말적 구원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전 인격적인 평화를 성취하시기 위하여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를 이루기 위한 피스메이커(The Peacemaker)의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추구하라고 분부 하셨습니다.

롬12: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갈5:22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딤후2:22절에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히12:14절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약3:18절에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예수님께서는 화평을 만드는 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녀라고 말씀했습니다 (마 5:9).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정의와 화평과 일치라고 말씀했습니다 (롬14:17). 베드로 사도는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벧전 3:11).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과 사명을 알려 주셨는데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왜 오셨습니까? 
본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평화의 화해자로 오셨습니다. 

본문 11절에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관계를 회복하여 평화를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부터 해방을 받는 구속의 문제 출발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에서 시작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된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심판받아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죄로 인하여 영원히 단절되었습니다. 이것이 죄로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죽은 상태, 영혼이 죽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자기 상실, 더 나가서 마침내는 무력감, 열등감, 고독과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 관계가 파괴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기 상실을 성경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5-7)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왕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의 제일 초점으로 바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화목제물, 즉, 평화를 이루고, 관계 회복을 통한 영적 평화를 주시기 위한, 화해자 역할을 감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죄악 된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자녀 됨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삼도 다툼이 없어야 정의와 평화가 새워집니다. 야고보서 1:20절에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잠10:12절에도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15:18절에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빌2: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였습니다.

딤전6:5절에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약3:16절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약4:1절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대 부분의 다툼은 내가 옳다고 주장해서 싸우게 됩니다. 상대방이 나쁘다고 생각해서 싸웁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이 땅위에 정의와 평화를 세우지 못합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오늘까지 모든 전쟁이 정의의 이름으로 시작이 되고 종전이 되었지마는 이 땅위에 정의는 수립된 예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정의는 싸움으로, 폭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정의는 화평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18에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싸움의 원천이 사람의 악한 마음과 사단의 역사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계 6:4절에 "땅에서 평화를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칼을 받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막바지에 최초로 만든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에 대하여 미국 국회에서 비밀 증언이 있었습니다. 한 의원이 오펜하이머 박사에게 "그 무서운 무기를 방지할 무기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답변은 이렇습니다."그것은 평화라는 무기" 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원죄와 과거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화목의 방법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은 사랑을 확증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또 자연 속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기 모습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들을 더욱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 되었고, 우리는 여전히 죄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용서를 위해 사랑의 인내 속에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불순종으로 인하여 공의의 하나님으로 부터 심판 받아야 마땅한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더럽고, 추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이 화목 제목이 되어 평화를 주시려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즉, 화해의 시작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일4: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평화의 메시야되신 예수님게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를 회복 시켜 주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창조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하와 뿐만 아니라 죄를 지어 모두가 공의의 하나님 심판 아래 있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평화의 메시야가 오셨기에 요일1:9절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과거의 모든 죄를 담당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구세주로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선물로 얻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믿으시면(아멘)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과 나와의 원수가 된 관계,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죄를 해결하기 위해 편화의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참된 영혼의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 회복이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지며, 참된 심령의 평화가 되는데 이 복된 대림절에 죄를 회개하는 거룩한 결단이 있으므로 이러한 하나님과의 회복된 평화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먼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2. 인간 사회 속에 갈등을 해결하는 화해자로 오셨습니다.

본문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이라든가 우 리가 잘 아는 '톰소여의 모험', 이런 소설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유머가 남다르고 또 독설도 구사하는데 아주 재주가 많고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쓴 작은 기도의 시 한편이 있습니다. 이것은 'War Prayer'라 고 하는 것인데, 전쟁의 기도입니다. 

'전쟁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우리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악한 심성을 그대로 노출 시켜서 고발하는 그런 내용의 시입니다. 이 시를 읽을 때 무슨 생각이 나는 고 하니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 그것과 정반대의 기도라고 하 는 그런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 가운데 보면 여러분 아시는 대로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총 주제입니다. 그래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또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고 그런 사람으로 살고 나를 평화의 도구로 그 누군가의 평화를 위해서 내가 희 생되는 평화의 도구로 사용되게 해 주세요.'하는 그런 내용의 기도요 유명한 평화를 위한 기도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전쟁의 기도는 어떠하냐. 꼭 반대로 이루어지는데 한번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우리의 포탄이 저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피 반죽을 만들어 버리게 해주십시오.' 이게 전쟁에 나가는 모습이요. '웃음꽃이 피었던 이 들판에 애국자들 의 싸늘한 시체로 꽉꽉 메우게 하여 주십시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던 과부들의 심장을 슬픔으로 가득 차게 하여 주십시오. 주여 그들의 희망을 고갈시켜 주시 고 그들의 모습을 시들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어떻습니까? 때때로 우리가 사단에 사로잡히거나 사단이 역사하여 믿음이 흔들리고 은혜가 떨어질 때 나도 모르게 못된 이런 심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아주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 사람을 죽 이면 살인죄가 되겠으니 못하지. 아주 자취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주변의 귀찮은 사람들 싹 쓸었으면 좋겠다.' 또 어떤 사람들 보니까 우 리 북한을 향해서도 '저 북한의 못 된 놈들 그냥 쾅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 또 북한에서는 '남쪽 사람들 도 빨리, 아주 깨끗하게 말살했으면 좋겠다.' 서로가 망하기만 바라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제가 묻겠습니다. 여러분께서 혹시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역작용을 해서 나 외의 다른 사람이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과게에 그런 생각을 가진 적이 있급니가?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전쟁철학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남이 망해야 내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눈에 거슬리는 이 사람들이 다 빨리 없어져야 그래야 세상이 바로 될 것이라고, 그리고 평화가 올 것이라고 혹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로 그것이 오늘 이 시에 나타난 마음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둘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하나가 '팍스 로마나(Pax Romana)', 팍스라고 하는 의미의 평화가 있습니다. 영어의 ‘피스(Peace)’라는 말이 라틴어의 ‘팍스’에서 온 것입니다.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이 중요합니다. 

로마식 평화와 히브리식 평화는 그 근본이 다릅니다.  로마식 평화는 힘의 철학입니다. 승리가 평화요. 전쟁과 억압과 수탈과 착취로 다 죽여 버려서 평안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서 상대방을 다 죽여 버려야 그래야 평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니면 최소한 전부 죽여 버린 상태처럼 만들어 버림으로 찾아오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신분을 낮추고 죽은 자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세상을 공동묘지 같이 고요하게 만들고, 그 억압 속에 아무도 말을 못하게 합니다. 아무 저항도 없게 합니다. 이것을 ‘노예적 평화’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조용한 것 같은데 그것은 조용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죽은 듯이 조용하만 그것은 조용한 것이 아닙니다.

가정도 보면 어떤 남편은 아주 이 '팍스'의 평화를 추구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큰소리 치고 삽니다. 마누라는 눈치를 보느라고 숩도 못쉬고 벌벌 깁니다. 물론 반대의 현상인 가정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성도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얼국과 누은 항상 시뻘것 하게 되어 있든지 반대로 시퍼렇게 되어 가지고 아이들까지도 눈치 보느라고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가 없습니다. 아무 소리도 못합니다. 그래서 대화도 없고 조용 합니다. 물론 이혼도 없습니다. 싸움도 없습니다. 우리 집은 평안하다. 여러분 만약 이런 가정의 분위기라면 아니 이렇게 산다면 이것이 진정한 평화입니까? 이런 식의 팍스, 로마나 타입의 평화를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오늘도 많습니다. '팍스' 이런 평화의 개념을 가지고 사는 가정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평화로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까? 이 로마사람들의 팍스 철학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분열시켜 통치하라. 고요하게 하라. 누구도 말을 못하게 하라.' 그래서 옛날에 노예는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말하는 것이 귀찮아요. "시끄러!" 그러니까 결국은 듣기만 하지 말을 못해요. 하루 일 년 내내 하루도 말을 못하니까 말을 배우지 못했어요. 그래서 짐승처럼 "우우우……"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런 모습으로 사는 우리 집은 평안하다고 한나면 이것이 진짜 평화입니까?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팍스 로마나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런데 팍스라고 하는 건 인간적 방법이요, 샬롬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거기에 큰 뿌리가 다른 것입니다. 팍스는 평화인 것 같으나 평화는 아닙니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오늘도 조용한 것 같으나 조용한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평화로운 것 같으나 평화가 아닙니다. 참 평화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다른 개념의 평화의 의미를 주는 용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원래 이 <히브리식의 평화>라는 것으로 '에리레네'라고도 하고 히브리말로는 '샬롬'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샬롬'의 뿌리는 하나님께서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에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 그래서 형제가 되는 것인데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였고 이 때 발생하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이웃을 형제로 그리고 모든 자연과 역사는 하 나님의 품과 같이 넓은 가슴처럼 생각하는 이것이 샬롬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것 도덕적인 것 정치적 인 것 심지어는 물질적인 것까지 통합해서 이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가장 완전한 평화요. '하나님이 축복으로 우리에게 내리시는 평화', 그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슈바이쳐 박사는 '내 영혼을 구하려는 노력이나 내 이웃을 구하려는 것은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을 체험한 사람은 구속의 은혜를 이웃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웃관계를 모든 비교적 규례보다도 더 우선순위로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23-24절에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특별히 화해와 화목과 평화를 위하여 용서하는 일은 하시고 이해하는 일을 우선하시기 바랍니다.

막 11:25절에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평화의 메시야가 오심은 이사야 61장에 말씀하신 것처럼 "포로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옥에 갇힌 자들에게 햇빛의 찬란함을 보게 하고,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며 재대신 왕관을 씌워주며, 상복을 입었던 몸에 기름을 발라주고 침울함 대신으로 찬양을 울려 퍼지게 하는 옷을 입혀 주어라"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최대의 과제는 이런 불공평한 갈등을 해결하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을 위임받은 이 땅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진정한 화해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의 말씀대로 "화평케 하는 자" 즉 화평을 만드는 자, 피스메이커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화해를 만드는 일을 하나님의 백성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통해 가정이 화목하고 교회가 평안하고 성도 사이에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니 직장이나 사업터와 삶의 자리에서 화목과 평화를 만드는 중보자가 되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화해의 역할, 피스메이커가 되지 못하고 있다면 반성해 보고 화해의 주로 오신 주님 앞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소홀하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 사회에 믿지 않는 자들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돌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대학교수님이 언젠가 한번 예수를 믿어서 3년 후에, 예수 믿은 지 3년 된 다음에 그 부인되시는 분이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이런 얘기 한일이 있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목사님은 참 위대하십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뭘 위대한데요?"라고 반문을 해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제가 결혼생활 20년 만에 오늘 남편으로부터 '여보 그만하오, 미안해.'라고 하더랍니다. 평생 살면서 "미안 하다는 말 처음 들었대요. 20년 만에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답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그건 내 잘못이야"라는 말 을 처음 들었대요. 그 동안은 되게 잘 나 가지고 자기가 잘못한 것도 너 때문이라고 심판을 했답니다. 그래서 이 집안이 20년 동안 그야말로 죽지 못 해 살고, 죽이지 못해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번 "미안합니다" 하는 말을 듣고 나니까 본인 말에 사흘 동안 울었답니다. 감격해서 저 남자의 입에서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내가 들을 수 있었으니 이제 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팍스하고 샬롬의 차이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샬롬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소신껏 사는 것처럼 답답한 일 이 없습니다. 이 미련한 사람이 고 집대로 삽니다. 게다가 교만합니다. 남을 심판합니다. 이건 지옥입니다. 자기 죽고 남 죽이기. 거기에는 샬 롬이 없습니다. 평화가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행복이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위와 지식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합시다 “행복은 회개할 수 있는 마음, 겸손한 마음, 온유한 마 음 그리고 희생하는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회개의 문을 열어주어야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큰 은혜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어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내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이건 내 잘못 입니다.' 그 한 마디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런데 회개하는 결단과 믿음과 용기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가보면 예수님께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당시를 거스러 올라가 한 번 살펴봅시다. 

소위 제사장 가야바라는 사람도 팍스 문화에 감염되어서 요한복음 11장 49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평안할 수 있다면 죽어 마땅하지 않느냐!' 이 게 바로 팍스입니다. 그까짓 한 사람 예수라는 사람 누구인지 모릅니다만 죽여서 온 민족이 평안할 수 있다면 죽여 버리자 이겁니다. 정치 적 관점에서 말합니다. 예수가 자꾸 인기가 높아지고 사람들이 따르면 로마사람들이 정치문제로 돌려 가지고 언젠가 또 시끄러워질 테니 까 아예 저거 죽여 버리면 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왔습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교인이라는 사람들도 평화를 약속하는 거 같으나 위선에 빠졌습니다. 회개할 수가 없었습니다. 회개 안 하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인격을 가지고 말입니다. 결국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멸망하게 됩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찾아온 위기와 풍랑과 고통의 사건, 재난, 실책, 어리석음이 어디서 온 겁니까? 왜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게 됐습니까! 숨겨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면서도 평안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만이 평 안입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것인데' 오늘도 그 눈에 숨겨진 그 숨겨지는 현상을 보며 마 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눈 물 흘린 것처럼 우리 또한 뜨거운 눈물 속에서 평화의 길을 다시 찾아 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큰 평안은 없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있고 , 우리 민족의 장래의 앞에 있는 평화가 눈에 환하게 보여 질 수 있는 그런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왔던 말고의 귀를 칼로 벤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6:52절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이것이 화평을 이루는 절대불가결의 원리입니다. 아직은 우리가 서로 군대를 통하여 평화를 만들 것이라 착각한 시대를 살았다면 이제는 평화를 가지고 평화를 만든다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약3:18절에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화평만이 화평을 낳습니다. 시85:10절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 방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평화의 선봉장으로 부름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수학적인 플러스의 표시입니다. 즉 <화해의 표시>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말씀을 역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자녀이면 화평케 하는  사람이 당연히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어디서나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분명란 약속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복!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한 왕이 승전하는 길목에 만조백관(滿朝百官)이 모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엎드리기는커녕 스스럼없이 걸어 왕에게로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까? 곁에 있던 신하가 말에서 내려 그 아이를 제지하였습니다. "무엄한 지고!" 냅다 호령을 쳤습니다. 그러나 왕은 신하에게 "가만 내버려두어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중에 안 사실은 그 아이는 이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권세를 갖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화목케 하려고 먼저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성도와 교회는 세상과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어진 안경을 낀 채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면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Focusing on Christ puts everything in perspective). 우리의 사명은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어야 하고 화목을 이루는 일을 감당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지금 이 사회가 지난 수 십 년간 빛과 진리를 몰아내고 어두움 속에서 자행된 불법과 불의로 인하여 극한 분열과 대립의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교회는 진정한 치유적 화해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뿐 아니라 민족통일을 위한 화해의 기능도 감당해야 하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자각하시는 성탄의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3. 인간과 모든 피조물과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은 인간의 범죄로 얼룩져 가고 있습니다. 창조질서가 파괴되어 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환경파괴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이 순간에도 모든 창조물을 유지하시고 사람 간의 일을 섭리하시며 심판하십니다. 그분에게 우연이란 없고, 그분의 허락 없이 땅에 떨어지는 참새가 없으며, 그분이 세지 않은 머리카락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청지기로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만드신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을 지속적으로 아름답게 환겨이 파괴? 않도록 잘 유지하고 보관하고,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지난 토요일 이만희 환경부 장관미과 간담회를 하였는데 환경, 경제, 사회가 조화롭게 발전하는 선진 한국이 되도록 환경산업을 신 성장 동력으로 육성하는 일과 기후변화 등 지구환경 위기를 환경 이노베이션 기회로 활용하는 정책 목표로 생활환경 개선으로 국민이 체감하는 환경수요를 공급하고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생하는 국토 환경, 고간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제 앞으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바로 환경을 회복하는 일에 국가적으로 아니 전 국민이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요. 이를 위해 새로운 에너지 탄소를 줄이는 저 탄소 경제, 사회를 구축하고 50% 중장기 온실가스 감축을 목표로 삼고, 친환경 건축물은 인증하고, 환경 친화적 자동차를 보급하는 일을 확대하고 수송부분 CO2 이산화 탄소배출을 저감 시키고, CNC 시내버스를 보급하고, 공공기관 하이브리드차 보급을 확대하고, 바이오 연료 보급 확대기반 조성 및 태양광 발전 등 에너지 개발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소망적인 소신과 견해를 들었습니다. 장로님을 위해 그리고 환경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촌의 자연은 환경오염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롬8:19-21절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이라.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타락으로 자연계, 생태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곧 자연 사랑이요. 자연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물질문명의 발달과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자연은 점점 더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성 타락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마음에 들여진 도구는 엄청난 자연의 재난을 주고 있습니다. 어디 마음을 놓고 먹을 채소, 과일, 공기, 물, 음식 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장남감에 유해 물질을 사용하고, 미친 소에 대한 공포감이 확산되고, 멜라닌 파동으로 불안에 떠는 이유가 환경파괴, 죄악 된 욕심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요, 자연을 지키지 못해 지구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고 남극의 오존층은 점점 더 큰 구멍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이나 우리의 환경을 사랑하는 일에 기독교인들은 앞장을 서서 실천해야할 사명입니다. 

빌 젠슨의《인생 재발견》중에서 "우리를 바꾸는 것은 일상 속의 작고 단순한 변화들입니다. 세상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은 없으니까요.  작은 변화가 쌓이고 쌓여서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자연을 잘 보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생활속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단순한 변화라고 얕잡아 봐선 안 됩니다. 폐수와 폐지 등을 많이 배출하지 않도록 가정에서 환경을 지키는 작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과 전기를 절약해야 합니다. 종이 한 장을 위해 엄청난 나무들이 희생해야 합니다. 쓰레기를 줄여 나가야 합니다. 한 번에 삶속에서 에너지를 절약하고, 친환경 제품들을 사용하고 녹색소비문화를 통해 환경을 살려나가는 실천들을 하나씩 바꿔 나가면 "친- 사람들과 친하고, 환-환경을 사랑하고, 경- 경제도 살리는 상품"을 사용하면 어느 새  엄청난  변화 앞에 서게 될 줄 믿습니다.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낙숫물에 섬돌의 구멍이 파이고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침내 천리 길을 갑니다. 땅에 떨어진 작은 씨알 하나가 많은 열매를 거두고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 한 점이 큰 비를 몰고 오기도 합니다. 한탕주의보다는 작은 일이라도 날마다 충실히 하면  반드시 성공자의 대열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 안 되면 열 번이라도 아니 최선을 다하여 마른 당에 물이 나올 대가지 파고, 마른 마무에 불이 붙을 때 까지의 심정으로 노력해 봅시다.

롬 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초록 생활이 곧 평화의 메시야로 오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활 입니다.

평화의 메시야로 오신 주님은! 신음하는 자연 속에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환경 키킴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대림절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 삶 가운데 모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며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시키며, 더 나가서 모든 자연과 더불어 창조 질서에 맞는 환경, 온실 가스 저감 범국민 실천운동으로 자연과도 평화하며, 자연을 잘 보존하는 일에 헌신하시는 복된 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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