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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에 대한 이해 (시 89: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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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이해 (시 89:47~48)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시 89:47-48)

온 교우들의 기도와 성원으로 미주 선교 집회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교우 여러분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죽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죽음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참으로 용한 점쟁이로 여러분들의 미래를 예언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점쟁이 도사보다도 더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신통력이 하나 있습니다. 절대 틀리지 않습니다, 틀리면 10000배로 돈을 물어 줄테니 복채를 내놓고 내기를 해도 좋습니다. 점궤의 내용은 여러분은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은 반드시 죽습니다. 이 점궤를 저처럼 정확하게 맞추는 점쟁이가 흔치 않습니다.

죽음은 필연적 운명이요, 우주적이고 보편적 진리입니다.(Death is universal) 죽지 않고 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사람들은 꺼려합니다. 싫어합니다. 왠지 자신은 죽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바라보고 준비하라고 가르치지만 알면서도 다른 이의 죽음은 준비하라 하면서도 자신의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봉독한 시편의 말씀을 다시 한번 크게 봉독해 봅시다.

“누가 살아서 자기의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 까?”(시89:48)

여기 스올은 무덤을 말합니다. 무덤의 권세에서 자신을 건져 낼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죽음은 받아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하곤 합니다. 흔히 죽음을 준비하지 않던 사람들이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올 때 보통 다섯 가지 반응(REACT)을 보인다고 합니다. 

첫 번째 반응은 거부입니다(Denial). 
“이런 일은 내게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This is not happening to me)며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사실을 받아드리기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너무 큽니다. 어떻게 이렇게 무서운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을까? 시편기자도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시55:4)

이 말씀을 NCV 라는 성경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속에서 심히 두려워하며 죽음의 테러가 나를 공격하였습니다.”(NCV)

죽음은 우리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입니다. 두려움의 극치입니다. 남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다루며 살인행각을 벌리는 살인마들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오줌을 싸며 떨게 마련입니다. 이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을 받아드리기에는 너무 크기에 첫 번째 단계는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단계는 분노의 단계입니다.(Anger).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납니까?”(Why is this happening to me?)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모두가 누군가가 내게 이런 억울한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누구 때문에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가? 질문의 단계이지만 사실은 분노의 폭발입니다. 억울함을 하소연하며 삭히지를 못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피곤하게 합니다. 시편 39:3-4의 말씀을 함께 봉독해 봅시다.

“나는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괴롭습니다. 나는 주 님께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언제 나는 죽을 것입니 까? 나의 생명이 얼마나 빨리 끝날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I was overcome with anger . The more I thought, the more troubled I became;
 I could not keep from asking; 'Lord, How long will I live? When will I die? Tell me how soon my 
life will end?'"(시39:3-4) 

셋째 단계는 구걸의 단계입니다.(Bargaining)
 “당신이 나를 살려만 준다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I promise to........, if you will let me live!) 살려만 준다면 무엇이든지 다 주겠다며 비겁하리 만큼 생명에 대해 구걸행위를 합니다. 이때는 체면도, 지식도, 가문도, 지위도, 학벌도, 이성도 다 버립니다. 살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어떤 짓이라도 다 하겠다는 인간으로써 가장 불쌍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고 맙니다.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합니다. 시편의 말씀은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합니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것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이다. 그 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전도서의 말씀도 우리를 깨닫게 합니다.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 며...”(전8:8)


넷째 단계는 포기하는 단계입니다.(Depression)
 “더 이상 나는 이제 어찌 할 수 가 없구나!”(I just don't care any more) 이제는 인생의 끝자락에 서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한계상황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이때 자칫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시편기자의 부르짖음을 읽어봅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하나이다. 나는 석양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가오며...”(시109:22-23)

이 말씀을 Mes라는 번역성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밧줄의 끝에 있습니다. 나의 생명이 파멸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I am at the end of my rope, my life is in ruins, I am fading away to nothing, passing away.)

다섯째 단계가 받아드리는 단계입니다.(Acceptance)
“내게 무엇이 일어나든지 나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단계로 올라갑니다.(I am ready for whatever happening.)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나니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앞에 두 손을 들고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단계입니다. 시편31:14-15까지의 말씀이 가슴에 절절히 새겨집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 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하나님이 만드셔서 이 세상에 보냈는데도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립니다. 세상을 두루 다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나의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 돌아오고 맙니다. 시38:11의 말씀을 읽다보면 세상은 결국 나를 버리고 만다는 진리를 알고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찬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시38:11)

그렇다면 죽음을 앞에 놓고 있거나 인간의 한계능력 앞에 서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의사들과 상담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사역중의 하나가 바로 죽어가는 사람들이나 절망과 좌절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여기서 단지 육신적인 접근만으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접근과 돌봄이 함께 이뤄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릭 워렌(Rick Warren)은 comfort라는 낱말을 가지고 7가지의 길을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1) Comfort their own fears and afraid. 즉 죽음보다 거기서 오는 두려움을 먼저 위로하고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은 죽음 자체보다 두려움이 더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일상사가 다 그렇습니다. 실체보다는 그것 때문에 오는 두려움이 더 문제입니다. 1930년대 미국이 대공황으로 백성들이 좌절하고 있을 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외치기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경제공황이 아니라 두려움 자체이다”(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라고 했습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두려움을 다스리면 실체는 극복할 수 있으며 평안을 얻습니다.

2) Offer my physical presence. 즉 내가 직접 가서 그의 곁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의 눈앞에 보여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 가운데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 외로움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람들에게서 격리되어 혼자 있게 될 것이라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큽니다. 죽음이 자신을 모든 사람들로부터 분리하여 홀로 가두어 놓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의 곁에 가서 손을 굳게 잡고 “내가 여기 있다”(I am here)고 보여주고 느끼게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는 오지 말라 해도 그의 잠재의식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래야 안심을 한다는 것입니다. 시142:4을 봉독해 봅시다.

“오른 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 는 이도 없나이다.”(시142:4)

진정한 위로는 그의 곁을 지켜줄 때 일어납니다.

3) Minister them. 즉 그들을 사역하는 것입니다. 사역은 몸과 마음과 영을 돌보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살피고 누군가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해야 합니다.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 또 한 가지가 스스로 자기를 조정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좌절감 때문에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TV를 켜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화장실을 가려 할 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더 큰 두려움을 낳습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모든 신용이 막혀 경제활동을 마음대로 하지 못할 때도 똑 같은 절망감을 갖게 마련입니다. 조정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곧 자포자기의 원인이 됩니다. 시38:7-8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 이 주 앞에 있아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4) Fortify them with emotional support. 감정적 도움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찾아가서 그의 손을 잡고 기도할 때에는 큰 소리로 기도해야 합니다. 감정적 지원은 마음의 평안을 주는 지름길입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하여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에게 기도한다면 훨씬 더 안정을 취하며 치료의 상승효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환자의 치유를 위한 기도뿐만 아니라 그의 배우자나, 자녀들,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일까지 간절하게 그리고 크게 기도한다면 놀라운 위로와 치료의 효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갈 6:2과 시 116:15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너희가 짐을 서로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라.”(시116:15)

5) Open them up with questions. 그의 수많은 질문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Why is happening to me?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Why me? Why now? Why this? 이런 질문에 긍정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나 자신이 그 물음에 대답이 준비되어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 긍정적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이다.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내느리라.”(잠20:5)

6) Remember the family has needs too. 가족도 역시 돌봄과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가고 있다는 가족들의 아픔과 슬픔도 위로를 받지 아니하고는 헤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가족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한 사역을 담당해야 합니다. 가족의 안정은 환자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7) Turn them to Jesus. 예수님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사역의 종착역은 그들을 모두 예수님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을 향한 관문입니다. 영원을 다스리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인간이 돌아갈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예수님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다음의 성경말씀을 통해서 위로와 하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45:22의 말씀을 읽어 봅시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 라.”

행4:12의 말씀입니다.
“다른 이로서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라.”

히2:14-15의 말씀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

고후4:18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 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시 18:5-6의 말씀입니다.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란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 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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