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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말씀 (벧전 1:23 ~ 벧전 2:2, 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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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말씀 (벧전 1:23 ~ 벧전 2:2, 계 1:3)

 
우리는 흔히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일컫습니다. 이런 표현은 사실상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 개혁이 일어날 무렵 교회는 신앙의 성장이나 표현을 상당한 부분 성경 말씀보다도 교회의 전통과 그것을 표현하는 종교 의식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전통적 의식들이 의식을 위한 의식이 되어버림으로 신앙의 내용을 상실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때 종교 개혁자들이 일어나서 부르짖은 것이 소위 ‘sola scriptura''(오직 성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봉독하고 성경을 강해하고 성경의 핵심 케리그마(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초대 교회의 관습이 교회의 중심에 다시 자리 잡기 시작했고 교회당의 구조자체도 과거 의식 중심의 제단 형태에서 심플한 강단이 중심에 자리하는 구조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물론 현대에서는 지나치게 말씀만을 강조하다 보니까 말씀을 표현하고 신앙을 오감으로 체험하는 의식의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개신 교회 강단들도 다시 제단 형태로 복귀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운동을 최근에는 이머징 교회 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교회 의식의 무용론을 주창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신앙이 충분하게 내용을 갖추고 있을 때 그 신앙을 표현하는 소위 전통 의식들은 나름대로 우리에게 영적 유익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보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우선순위는 아직도 저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아무도 기독교 신앙을 수용한 사람들이라면 말씀을 경험하지 않고 신앙의 성숙과 신앙인으로서의 소명을 실현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두개의 본문은 모두 이런 말씀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들입니다. 한 본문은 사도 베드로를 통해, 또 하나의 본문은 사도 요한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개의 본문을 통해 말씀의 역할과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축복이 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말씀에 접근해야 할 것인가를 성찰하고자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 함께 말씀의 역할과 말씀의 축복을 경험하는 방편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말씀의 역할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단적으로 오늘 베드로전서의 본문을 요약하면 말씀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말씀의 첫째 역할>은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23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씨’(seed)라는 단어입니다. 

본래 원문에서의 이 단어는 혹은 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비롯된 영어 단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이라는 단어 곧 ‘정충’이라는 단어입니다. 한 남자가 한 여인을 사랑하여 그녀의 밭에 사랑의 씨를 뿌리면 한 새 생명이 태어나듯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받아 드리면 우리는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썩을 씨도 생명을 잉태하거늘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의 씨는 얼마나 놀라운 능력으로 새 생명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며 본문 24-25절의 말씀처럼 세세토록 있는 영원한 말씀이어서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약1:18을 읽어 보십시오. “그가 그 피조물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무엇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구요? 맞습니다. 진리의 말씀, 영원하신 말씀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역할은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의 두 번째 역할>은 거듭난 인간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씨와 같다고 하다가 다시 벧전2:2에서는 젖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방금 태어난 어린 아기에게 엄마의 젖(모유)처럼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말합니다. 

벧전 2:2을 읽어 보십시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구원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완성을 향해 우리는 자라가야 합니다.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것을 가르쳐 성화(sanctification)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가듯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말씀을 먹도 거룩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요17:17에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기시기 전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가장 중요한 이런 기도를 남기십니다. “그들을(제자들)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한 이 말씀이 다시 우리를 영적으로 거룩하게 하고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 가도록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역할은 또한 거기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만이 우리를 진정 복되게 한다고 약속합니다.


II. 말씀의 축복을 경험하는 방편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우리가 말씀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의 서론에서 말씀의 축복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할일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계1:3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우리가 할일 첫째>는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중에 말씀 읽기는 ‘가장 거룩한 일’(the most sacred thing)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읽기를 가르쳐 ''Lectio Divina''(Divine Reading/Sacred Reading), ''거룩한 독서‘라고 불러 왔습니다. 

여러분, 금년 한해 얼마나 거룩한 독서에 힘써 오셨나요? 별로이셨습니까? 그리고도 어떻게 우리가 거룩한 삶을, 능력의 삶을, 진정한 복된 삶을 기대하실 수 있었단 말입니까?

멕시코에 한 할머니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두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맘껏 읽는 일이었고, 또 한 가지는 전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도하려고 해도 성경가지고 해야 하는데 이 할머니는 문맹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주님, 성경도 읽고 싶고 전도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기도 중에 지혜가 생겨났습니다. 이 할머니 바로 앞에 중학교가 있었는데 매일 학교 쉼터에 가서 쉬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가서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은데 읽어 줄수 있느냐고 부탁을 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3장을 접어 두었다가 이 부분을 읽어 달라고 합니다. 천천히 또박 또박 읽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이 학생이 이 성경을 읽는 동안 성령께서 이 학생에게 이 진리를 깨닫게 해달라고 속으로 기도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할머니를 통해서 수백명의 학생들이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 읽기의 능력입니다. 새해를 거룩한 독서-성경 읽기로 시작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할일 둘째>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른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말씀을 듣고, 그리고 읽기를 강조하는 것이 순서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왜 읽기에 이어서 듣기를 강조했을까요?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조심성스럽게 진지하게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진지하게 읽기를 할 수 있습니까? 읽은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 읽기는 음식을 삼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음식을 삼키고도 여전히 우리가 먹은 음식의 혜택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그 삼킨 음식을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 자주 방문하시는 버지니아 리버티 신학교의 김 창엽 박사님은 87세의 노익장이신데 아직도 신학교에서 다른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주간 모든 강의를 담당하시고 주말에는 미주와 세계 각처에 집회를 다니십니다. 그분의 건강의 비밀 중에 하나가 음식을 30번씩 씹어서 삼키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못 잡수실 음식이 없고 모든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는지 모르시겠다고 하십니다. 

예로부터 영성 수련가들은 성경 묵상을 소의 되새김질에 비유하였습니다. 말씀을 씹고 또 씹고 묵상하는 중에 말씀이 내 것이 되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게 들려오는 것입니다. 영성 신학자 유진 피터슨은 “이 책을 먹으라”는 책에서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사냥개가 어느 날 사슴 뼈다귀를 발견하고 그 뼈다귀가 하얗게 드러날 때까지 물어뜯고 또 뜯고 다시 그 뼈다귀를 음미하며 핥아먹는 장면을 보다가 갑자기 히브리어 성경의 한 단어를 연상했다고 합니다. 그 단어는 ''하가''(hagah)였는데 시편 1편에 주야로 율법을 묵상한다고 했을 때 바로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단어가 사31:4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라고 할 때‘으르렁거린다’는 단어가 바로 ‘하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젠가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재미있어서 으르렁거리며 이 말씀을 묵상하며 그 진리에 빠져 들며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들은 적이 계신지요?

<우리가 할일 셋째>는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묵상의 목적도 묵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붙들고 살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 말씀이 우리의 건강이 되고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묵상이라는 단어는 본래 메디켈루스(medicelus)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인데 이 단어에서 약(medicine)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묵상을 잘 하면 우리의 삶에 양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꾸준히 묵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QT를 거른다고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QT한 사람과 안 한 사람사이에 하루가 별 차이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면 큰 차이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QT 며칠하고 당장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보약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약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마약은 당장에 변화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변화이지요. 보약은 당장에 변화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6개월 1년이 지나면 현저한 변화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꾸준히 계속하여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작은 변화가 결국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묵상한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 스며드는 과정을 관상(contemplation)으로 이해합니다. 관상의 침묵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묵상한 말씀을 품고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먹으라”186p 이하에서의 유진 피터슨의 관상의 정의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렉치오 디비나의 마지막 요소가 관상이다. 관상은 읽고 묵상하고 기도한 텍스트를 나날의 일상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텍스트를 우리의 근육과 뼈, 산소를 만드는 폐와 피를 펌프질하는 심장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관상은 읽은 바를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어떤 것도 낭비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저장해 두지 않고 삶에서 그것을 다 써버리는 것이다. 그 삶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읽고 듣고 묵상하고 기도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형성된 삶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읽고 묵상한 궁극적인 결과를 유진 피터슨은 관상의 삶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관상의 삶이란 한마디로 예수님이 살아가신 삶, 곧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그 조용하지만 권세 있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위해 성경을 들고 한해를 결산하고 성경을 들고 한해를 맞이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진짜 복 있는 삶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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