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의 열매 : 절제 (고전 9:24~27)

  • 잡초 잡초
  • 427
  • 0

첨부 1


성령의 열매 : 절제 (고전 9:24~27)


미국의 20대 대통령을 지낸[가필드]가 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학교의 재단 이사장의 아들이 학교에서 매일 기도하는 것이 싫고 공부하는 과목도 많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이에 아버지인 재단이사장이 가필드를 찾아와서 학교에서 과목을 줄일 것과 기도하는 종교 활동을 줄이고 노는 시간을 늘리라는 부탁을 합니다. 이때 가필드의 대답이 유명합니다."하나님께서 한그루의 느티나무를 좋은 재목으로 만들어 쓰시고자 할 때는 100년을 키웁니다. 그러나 호박 하나를 키워내는 데에는 한 달이면 되지요."

사람에게는 육체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가만히 보면 정신적 세계가 강한 사람이 있고 육체적 세계가 강한 사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매사를<육체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정신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는 후자를<영 주도적>인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무엇이 주도하는 인격이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납니다. 늘 육체가 주도하고 정신이 따라가는 삶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주로 범죄자들이 그렇습니다. 육체가 요구하는 대로 저질러 놓고 수습하려고 합니다만 이게 됩니까? 육체의 요구대로 저질렀는데 뒤에 정신을 차리고 와서 보니까 수습이 안 될 정도로 문제가 커진 겁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구가 강렬히 일어날 때 의식적으로 정신력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속담이 있지요? 이 속담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호랑이에게 물린다는 건 육체적 문제요, 침착하게 위기를 벗어나는 지혜는 정신의 문제입니다. 결국 나를 지키는 것은 육체가 아니요, 정신입니다. 곧 의지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육체 주도적으로 산다는 것은 주로 동물적 습관에 의지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습관이란 사람을 벗어나기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이고 정신적인 단호한 결단의 의지가 없이는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정신이 문제입니다. 의지의 문제란 말입니다. 

사람의 정신이나 마음을 영어로는 마인드(Mind)라고 합니다. 컴퓨터의 구성을 말할 때 몸체를 하드웨어라고 하고 입력되어있는 프로그램을 소프트웨어라고 합니다. 컴퓨터에서 중요한 것은 몸체보다 내장 되어 있는 소프트웨어가 훨씬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를 하드웨어라고 본다면 정신은 소프트웨어입니다. 육체보다도 정신이 훨씬 중요합니다. 나아가 영혼이야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몸은 있는데 마음이나 정신이 없어서 분별력이 떨어지거나 부주의하고 어리석은 경우를[마인들리스(Mindless)]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가장 큰 병이 이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그런지,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자기를 잊고 얼이 빠진 채 사는 것 같습니다. 왜 사는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왜 달려가는지를 의식하지 못하고 무작정 달려갑니다. 언제까지 가야하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멍하게 맹목적으로 달려가기만 하는 이게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중병입니다.

<맹목(盲目)>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눈이 있는데 앞을 못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주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는 보는데 주(主)와 객(客), 주(主)와 종(終), 본(本)과 말(末)이 뒤섞여 도대체 분간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는 일도 많고, 소속된 집단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이왕이면 남보다 앞서 가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망아지처럼 뛰기만 할 뿐이지 도무지 생각 할 줄을 모릅니다. 생각 없이 뛰기만 하다가 오버페이스하고 맙니다. 너무 급하게 달렸어요, 속도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그런데다가 엉뚱한 데로 뛰고 말았습니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상황을 한 마디로 진단하자면 절제의 감성이 고장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제(節制)>라는 말을 우리 말 사전에 찾아보면"정도에 넘지 아니하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리고<절제>라는 이 단어를 영어 성경에서는 Self-control, 즉 <자제(自制)>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자기를 통제(統制)한다"는 뜻입니다. 잠언 16장 32절에"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통제하는 일은 이처럼 어렵고 또한 위대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철도 건널목이나 횡단보도 앞에는<일단정지>라는 도로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금 있는 그 곳에 잠시 서서 좌우를 살피고 그 다음에 건너가라는 뜻입니다. 이걸 무시하고 그냥 달려가면 대형사고가 납니다. 우리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 내 결심, 내 열심, 내 경험만 가지고 무작정 달려가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신앙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저돌적인 뜨거운 가슴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 년365일 기도원에 올라가서 목이 터져라 기도만해서 신령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옹고집적인 내 경험과 성격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도, 기도도, 교육도 없이 내 열심과 내열정만 가지고 달려 가다보면 영적인 대형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모르고 달려가다가도 주일이 되면<일단 정지>해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교제를 통하여 이웃을 살펴보면서 내가 가는 방향이 옳은지 속도는 괜찮은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마치 장거리를 운전하는 것처럼 단단한 준비와 점검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유턴(U-turn)도 하고, 후진(Back)도 하고, 좌회전, 우회전 방향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셀프컨트롤(Self-control)>이라고 합니다. <자기 절제>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절제를 하지 못해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말의 절제, 행동의 절제, 음식의 절제 등 우리의 삶에 절제가 필요한 부분은 참으로 많습니다. 

요즘, 여러분의 삶에 절제가 필요한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나쁜 버릇은, 쉽게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오기는 힘든 편안한 침대와도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쁜 것은 습관이 되어 굳어지기 전에 얼른 버려야 합니다. 옳지 않은 것일수록 자기절제가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바로 절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경기자로, 운동선수의 모습으로 비유해서 말하면서 경기자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까지 얼마의 수고와 희생과 자기절제가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운동선수들에게도 그 목적을 이루는 데는 무한한 수고와 어려움이 따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비유하는 운동하는 사람에게 그 목적을 이루기까지는 주어진 철학이 있습니다. 

먼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향방을 정해야 합니다. 이 말은<목적>과<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목적이라는 것은 멀리 있고 다소 추상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현재의 구체적인 것들입니다. 때때로 보면 구체적인 목표는 있는데 목적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위한 목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추상적인 목적은 있는데 구체적인 목표가 없어서 제자리 걸음을 합니다. 이 둘 다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목적은 비록 멀리 있고 추상적이지만 언제나 높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표는 그것을 위해 구체적이고 내 앞에 있는 현실이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이 목적과 목표의 의미가 분명하면 성공합니다. 특히나 운동하는 사람은 목적의식이 또렷하고 동시에 목표가 분명해야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오늘 본문 26절에서"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고"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허공을 친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의미의 문제입니다. 현대 철학에서 가장 무서운 과제가<허무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허무주의라는 말속에는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뜻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그것에 담긴 확실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의미하고는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 좇아가다가 실망하기도 하고 절망도 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 운동선수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철학은 27절에 나옵니다."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노예를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 몸과 마음을 내가 길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훈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자, 내가 나를 길들이려면 무슨 훈련을 해야 합니까? 먼저 버리는 훈련이 있어야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시기를 버리고, 헛된 생각을 버리고, 게으름을 버리고...버려야할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그런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가하면 또 얻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버리는 것으로만 되는 게 아닙니다. 온유와 겸손과 진실, 인내와 좋은 습관들을 얻어야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나를 스스로 길들여 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절제입니다. 절제가 없는 운동선수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운동선수라면 체중 조절을 위해서 먹는 것에 절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소화가 되느냐 안 되느냐, 칼로리가 적당 한가 그렇지 아니한가...어쩌면 운동 경기하는 것보다도 이 절제의 훈련이 훨씬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시간을 조절할 줄 알아야 됩니다. 만약에 2시간동안 뛰어야하면 2시간에 맞게 체력을 안배해야 합니다. 마구 뛰다가 중간에 쓰러져도 안 되고 또 마지막에 힘이 남아도 안 됩니다. 시간에 대한 절제,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산입니다. 이것만큼 확실한 내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걸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에는 절제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합니다만 사실은 그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같은 시간이 반복되는 법은 없습니다. 시간은 계속 새롭게 주어지고 동시에 그 시간은 마지막으로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에서의 저기절제의 노력이 아름다운 삶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로 돌아갈 몸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너무 좋아서 목적도 잃고, 목표도 없이 무절제한 생활로 재물의 비계 살, 명예의 비계 살, 권력의 비계 살, 학식의 비계 살, 교만의 비계 살, 게으름의 비계 살 등등 세상의 것으로 너무 비대해져 있다면 어떻게 천국으로 가겠습니까? 운동을 하여 비계 살을 빼듯 신앙의 모든 일들에 사도 바울처럼<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하는 자기절제>로 훈련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답게 세상을 다스리며 욕심과 욕망을 다스리는 사람들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