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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인가 '종교인'인가? (마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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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인가 '종교인'인가? (마 23:1~12)


신부와 목사와 유대교 랍비, 세 사람이 모여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신부가 “저는 먼저 땅에 줄을 긋고 제가 가진 돈의 전부를 공중에 던집니다. 줄 오른편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께 바치고 왼편에 떨어진 돈은 제 주머니에 넣습니다.” 
“썩 좋은 방법은 못되는데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땅에 원을 그려 놓고 원 안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께 바치고 원 밖에 떨어진 돈은 제가 갖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돌아서서 숨을 한 번 크게 쉬고는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바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만 웃기시오. 모든 걸 다 바친다구요?” 랍비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나의 돈 전부를 하나님을 향하여 던지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께 올려 드리니 공중에 머무는 돈은 당신의 것이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요 마땅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인 틀과 형식으로 자신을 종교화하고 스스로 종교인이 되어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랜 신앙생활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점차적으로 형식에 매이게 되고 의무와 책임으로 다니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들은 의식적으로 종교인이 되려 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새 그리스도인이 아닌 한 사람의 종교인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교인의 삶에서 진정 주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을 예수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아무 생각 없이 예배를 구경하고 그저 땅만 밟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교회에 다닌다”, 혹은 “나는 기독교를 (혹은 교회를) 믿는다” 말을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교회를 다녀도 감동이 없고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하나의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굳을 대로 굳어져 껍질과 형식만 남은 종교인들(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3절)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종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책임과 의무감과 형식과 율법적인 종교인의 삶에서 벗어나 날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기쁨과 은혜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종교인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인입니까? 

  
1. 그리스도인은 종교인이 아닌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서 몰아내고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아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은혜에서 멀어져 있고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의 자리를 위협하는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을 보면 예수님과 종교인들과의 갈등이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당시 제사장과 서기관들, 또한 보수적이었던 바리새인들에 비해 진보적이었던 사두개인들... 이러한 종교인들은 한 마음이 되어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마음은 굳을 대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고 종교적 형식에 사로잡힌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겉모습에 있어서는 훌륭한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고 종교적인 형식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원리, 은혜의 원리가 아닌 종교적 형식, 율법의 원리로 종교생활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갔을 때 현지 가이드를 해 준 사람이 장신대에서 히브리 대학으로 유학을 가 있는 전도사님이었습니다. 그 전도사님 주변에 사는 랍비들은 안식일에 퓨즈가 끊어져 전기가 나가도 고치지 못하고 캄캄한 가운데에서 난방도 냉방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버텨야 한다고 합니다. 견디다 못한 그들이 간혹 전도사님을 찾아와 전기를 고쳐달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전기를 고쳐달라고 말하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너 와서 우리 집 전기 좀 갖고 놀아볼 수 있겠니?”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우고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종교적인 껍질과 형식만 남아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과 위선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삶입니다. 종교는 인간들이 정한 형식이며 틀입니다.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틀 안에 신을 만들어 놓고 자신들이 만든 종교의식의 틀이라는 함정에 스스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의식은 책임과 의무감으로 행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는 은혜 가운데 감사함과 기쁨으로 드려집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유형을 종교인과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종교인은 율법으로 인해 굳어진 사람임에 비해 그리스도인은 은혜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종교인은 의무와 책임 가운데 사는 데 비해 그리스도인은 사랑으로 인한 자발적 헌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종교인은 형식과 틀에 매이는 데 반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종교인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데 비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예배를 드립니다.

종교인의 형식을 깨뜨려야 합니다. 종교인의 형식이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종교적인 관습과 틀에 매여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꼬박꼬박 예배를 드리고 금식하고, 헌금을 드리는 이러한 형식만을 신앙생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종교생활을 할 뿐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종교의식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종교의식의 틀에 매여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 가운데, 금식 가운데, 헌금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더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은혜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형식과 틀에 매인 우리의 종교생활이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막힌 은혜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2. 그리스도인은 의무가 아닌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종교인들의 삶은 의무감과 형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5-7절)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0:46,47)

종교인들의 삶에는 생명의 풍성함과 기쁨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의무감과 형식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종교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종교인으로서 문안 받는 것과 자신들이 앉을 자리를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보이기 위한 긴 기도를 합니다. 그들의 종교생활에 생명력이란 없고 단지 금지조항과 의무규정 만이 있을 뿐입니다. 

종교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종교인은 자기의 의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갑니다. 종교인들은 고행과 수도를 하며 견디는 삶을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의 은혜 안에 살아갑니다. 종교인은 스스로 신의 경지에 이르고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높이고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는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왜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까? 내가 드리는 예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있습니까? 단지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야 한다,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이 자리에 앉아 계시지는 않습니까? 주일에 교회를 나가야 한다,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의무감이 아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종교인의 의무가 아닌 사랑으로 그 분께 나아가며 우리를 만나기 원하시는 그 분을 만나는 예배, 생명의 은혜를 누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의 생명력이 있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꾸만 무엇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스티브 맥베이의 “은혜 영성의 파워”라는 책을 보면 율법 신랑은 우리에게 자꾸만 무엇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는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의 신부입니다. 은혜의 신랑 되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의 부인이 아닌 주님의 은혜의 신부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신랑 되신 주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 만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나무의 원리 안에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생명나무의 원리란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생명을 누렸던 것처럼 행위가 아닌 오직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종교인은 의무로 살아갑니다. 계속적으로 요구하는 율법의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들 나름대로의 금지조항을 만들어 그것을 지켜 나갑니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삶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능력이 없으며 오직 의무와 책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것만 하지 않는 의무적인 사랑이 아닌 적극적인 사랑의 삶이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입니다. 예수 생명의 능력은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가능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의무감으로 살아가는 종교인이 아닌 예수 생명의 능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3.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얼마 전에 CEO를 대상으로 하는 한 정보사이트의 회원 413명을 대상으로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가장 힘이 되어준 습관’을 사자성어로 표현해달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CEO 5명 중 1명(19.7%)은 가장 힘이 되어준 습관으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을 꼽았습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중국 노나라때의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CEO들은 이 성어에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관계를 중시하라는 것’이라는 의미를 붙이고, ‘가장 힘이 되어준 습관’ 1순위로 뽑았다고 합니다. 

지도자의 유형을 보면 사람 중심의 지도자와 일 중심의 지도자로 나뉘어집니다. 좋은 지도자는 일보다는 사람을 중요시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인간관계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과 어떠한 관계를 갖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일이 아닌 내 자신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내 자신을 귀중히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초점도 사역이 아닌 예수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러한 것들(선한 일... 봉사, 헌신... 열정적인 사역...)이 우리에게 부담감과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먼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꼭 열심히 믿는 것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때로 열심히 믿는 것보다는 바르게 믿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를 보면 마르다는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대접하려고 했고 많은 것을 준비하였지만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마르다의 분주함이 아니라 마리아의 바른 자세였습니다. 마리아는 어쩌면 철이 없어 보였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깨달아 그 방향으로 갔던 것입니다.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릴 시절, 일주일 내내 열심히 아파트와 땅을 보러 다니는 땅 사랑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여전도회 회장이었던 그 집사님은 여전도회 헌신예배가 있던 주일에도 아파트를 보러 갔다가 헌신예배 시간에 맞추어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강단에 올랐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었고 땅 사랑 집사님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함께 찬송가 109동을 부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아닌 종교적인 열심이었고 빗나간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른 지도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지도자의 잘못된 열정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불행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도자가 되신 주님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0절부터 12절을 보면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나아감을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도자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의 사랑을 배우고 섬김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삶에 자발적이고도 기쁨의 헌신이 가능해 집니다. 우리는 종교적 형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아가 그가 보여주신 진정한 사랑과 섬김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사역 보다는 주님께 나아감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사역의 방향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 바른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준비하는 사람보다는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준비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선입니다.

시편 73편 27, 28절을 보면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주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전교인이 함께 하는 은혜의 새벽을 3주 동안 시작합니다. 저는 이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 은혜의 새벽의 목적은 주님을 더 사모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종교인의 형식을 벗어나 주님께 가까이 나아감으로, 이제는 종교인이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예수의 사람입니까? 종교인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종교행위에 집중합니다. 그들은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여러분은 스스로를 열심 있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혹 주님과 상관없는 종교행위에 치중되어 있는 종교인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신앙의 형식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 나에게 베풀어 주신 풍성한 은혜 가운데 나아가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의무감으로 살아가는 종교인이 아닌 예수 생명의 능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사역에 우선하기보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신앙의 껍데기에서 맴도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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