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1) (엡 4:15)

  • 잡초 잡초
  • 838
  • 0

첨부 1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1)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5) 


I. 본문해설 

사도는 예배소서 4장에서 교회와 교회 안에 있는 신자의 일치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고 강조하며 하나의 몸과 그 몸 안에서 다양한 성도들이 어떻게 일치를 이루며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이바지 할 수 있는지 상세하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명백하게 신자의 개인적 성화의 삶이 교회의 일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주고 있습니다. 


Ⅱ. 신자의 성화와 교회의 일치 

사도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5)”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신자 각 사람의 성화가 교회 전체가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루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가 되게 하고, 그 교회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거룩한 뜻에 이바지 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강설하기 전에 우리는 중생과 그리스도의 몸의 문제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A. 중생과 그리스도의 몸 

중생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죽어 있는 영혼을 주권적인 능력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성령 안에서 거듭나고 난 후, 최초의 움직임이 바로 회심입니다. 그리고 이 회심은 죄에 대해 깊이 회개하고 그리스도 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회개와 믿음, 두 가지가 합쳐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게 되면 그것은 순수하게 영적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과는 상관없이 살던 인간이었는데 거듭남으로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몸과 함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어 실제적으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그 때 인간은 놀라운 영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인식론적으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영적인 세계와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기뻐하게 되고 성향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바뀝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몸 자체가 예수의 사랑이 항상 흐르는 몸이기 때문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성도의 마음과 영혼 안에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 졌다고 할 때 이것은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는 지역에 있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 이면에 있는 교회로, 예수를 믿고 구주로 고백하며 교회의 참된 표지를 지니고 있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성도들의 연합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과거, 현재, 미래와 천상과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영적으로 하나를 이루는데 공교회 혹은 보편교회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머리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이는 개별적인 교회의 한 지체로 만드셔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현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와 규율, 제도, 통치, 모임의 형식들은 인간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하며 거부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복음의 참된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 경륜과 하나님이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운 거룩한 뜻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성화의 삶을 살 수 없고 그들을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의 경륜을 펼치며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편 교회의 한 사람으로 우리들을 접붙이신 아름다운 경륜이 보이는 교회에 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별적인 교회에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자아가 힘쓰고 있는 것을 발견하며 자신은 아직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중생한 성도들이 보편 교회의 아름다운 성도의 지위를 개별 교회에서 누릴 뿐 아니라 성화의 삶을 통해 구현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하늘과 이 땅의 모든 것들이 이제 내 것이 아니요, 형제들과 함께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사도의 발 앞에 두고 공동체의 삶을 선택한 것은 종교의 열정에 들뜬 나머지 한 선택이 아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을 무한대의 감화로 깨달았기 때문에 일어난 올바른 종교적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면 그의 모든 것은 교회의 것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니 하나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성도들의 연합을 통해 지역의 개별교회 속에서 보편교회의 정신을 구현해 나가며 한 가족들 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배에는 참석할 테니 공동체와 관계를 맺기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방식을 고집한다면 현저하게 불순종의 길을 걷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진리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은혜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은혜가 없이 우리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은혜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이 은혜를 교회와 상관없이 마치 학원처럼 지식만을 나눠주는 것처럼 나누도록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의 결점이나 부도덕조차도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교회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은혜 있는 교회를 찾아 떠돌아다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커다란 경륜 속에서 당신의 또 다른 뜻을 이루시기위해 기도 가운데 다른 곳을 섬기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동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주님의 뜻과 인도가 아니라 교회의 어떤 결점을 보면서 욕을 보이고 돌아서는 행동들, 교회의 부도덕이나 허물을 발견하면 자신이 혼자 모든 피해를 뒤집어 쓴 것처럼 하는 것은 복음이 이야기 하는 교회 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상처 내는 일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속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자신은 거기에 접붙여졌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위탁된 진리를 통해오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데 은혜를 받기 위해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목회자의 목양을 거절하고 교회를 단지 수단으로 생각하는 이런 사람은 복음진리의 근처도 가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그 품에서 말씀의 젖을 먹으며 신자의 도리와 사람의 도리를 배워야합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 나가야합니다. 


B. 원리적 연합과 실제적 연합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접붙이실 때 이루어지는 연합은 신비적인 것입니다. 무엇에 의해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으로 주님을 끊임없이 버려도 주님은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또 주님이 여러분들을 붙잡고 계시는 한 여러분들이 끝까지 주님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원리적인 연합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연합도 있습니다. 실제적인 연합은 성도가 실제적인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관계 속에서 누리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연합입니다. 그래서 실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할지라도 실제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리며 살 수 없다면 그리스도와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실제적 연합은 성화의 정도만큼 이루어집니다. 이 연합 속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이천년 전의 죽음과 부활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기뻤던 때는 가장 슬펐던 때이고, 가장 행복했던 때는 가장 가슴 아팠던 때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충만하던 때에는 목마르던 그 때가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나같은 인간을 위해 죽으셨다는 뼈저린 신앙의 고백 속에서 그의 고난에 아파할 때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라던 그 길에서 고통을 만나더라도 그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내 안에 주님이 살 수 있다면 이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릿도와 실제적인 연합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능가하는 신자의 의무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랑이야 말로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외쳐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바로 하나님이 자기 같은 인간들을 왜 구원하셨는지 그리고 그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가 어떤 희생과 고난을 지불하셨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오래된 복음을 들으며 나 같은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치르신 큰 희생과 무한한 은혜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할 말을 잃고 눈물만 흘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왜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시고 교회를 가정처럼 이루셨는지 깊이 깨닫게 하는 것도 교회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위해 우리에게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아름다운 진리를 성경책에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을 토대로 하나님은 진리의 세 저장고를 이 땅에 두셨는데 교회, 목회사역, 그리고 성도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목회 사역을 통해 진리가 풍부히 드러나고 성도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는지 잘 살펴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함으로 불완전한 성도들이 온전한 몸을 이루게 하는 것이 교회를 세우시고 부르신 경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개개인의 성화는 성례전 적으로 하나님께 봉헌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C. 신자의 성화와 성례전적 봉헌 

즉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믿고 회개하고 더욱이 그리tm도 예수의 성품을 받아 거룩해져가는 성화의 삶은 성례전적으로 연합된 교회에 드려지고 교회는 그것들을 한 데 묶어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오류에 빠지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이고 성화의 삶도 교회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신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도 주님을 닮는 것, 끊임없이 은혜를 받으며 성화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Ⅲ. 성화의 목표: 그리스도 

오늘 사도는 그렇게도 중요한 성화의 목표가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A. 그리스도가 목표라는 의미 

그리스도가 성화의 목표라고 하는 의미는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성화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분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우선 그분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완전함에 이룰 수 없거니와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우리에게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형상은 우리의 형상과 는 달리 사람이자 신이신 본성 안에 있는 형상이고 우리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지만 그분처럼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지신 형상은 완전한 형상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더라도 완전한 형상이 아닙니다. 완전한 형상이라면 그리스도까지 자라야한다고 말할 리가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죄와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성화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자라는 것에는 충분한 의의가 있습니다.

만약에 인생이라는 항로에서 배에 있는 사공을 우리라고하고 배가 우리의 삶이라고 보며, 우리에게 이 길로 가라는 선장을 성령의 비유하고 그 지도가 성경이라고 한다면 북긍성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킨다고 말해봅시다. 북극성을 따라 도착한 항구는 북극성이 아니지만 우리 각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인생의 목표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각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 경로는 다양해도 한 분이신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각 사람의 인생의 목표는 각기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어떤 이들은 정치를 하며, 목회를 하고, 학생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어가십니다. 바로 거룩한 교회를 만드시는 일입니다. 

또 그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온전히 회복하여 당신의 영광을 온 땅과 하늘 위헤 가득 드러나게 하는 것이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의 관계인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성 속에서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은 한 사람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분을 본받아 갈 때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며 이 땅의 교회다운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형상에 회복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B. 구원의 계획과 그리스도 형상의 회복 

즉 하나님께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니님을 닮은 영적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자연적인 형상과 도덕적인 형상으로 구별됩니다. 분석과 종합을 통해 사물의 일치를 찾고 자연적인 삶에서 자신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연적인 형상이고 고유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도덕적인 형상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형상에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이해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의지에 따라 순종하며 살 수 있는 영혼의 기능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습니다. 하지만 자연적인 형상은 대부분 상대적으로 건재하지만 도덕적인 형상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창조의 목적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을 운명적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을 당신의 사랑으로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하나님 닮은 인간의 형상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 형상이 그리스도를 닮았는지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화의 상태, 교회의 성화의 정도가 어느 지점에 까지 이르렀는지 혹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향하게 하신 그 목표를 따라 향하고 있는지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과 마음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상태의 어떠함은 우리의 마음에 나타나는 것을 보십시오. 이 마음은 작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사람들은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뜻을 존중하여 자신도 그 뜻에 순복하고자 하는 마음의 강한 작용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마음 안에 작용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회복하면 회복할수록 신자의 마음은 예수를 충분히 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간절히 피력한 소원도 바로 이것이 었던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회복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사랑한 마음의 성향을 지니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성향들을 갖게 됩니다. 그 사람의 어떠함은 결국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 나타내게 되니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통합하여 우리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인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그렇게 중요시 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이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각할 것이며 그의 삶은 구원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되어 빛이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의 중요성은 신약 시대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물론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성향이라는 말을 빈번히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이 신약 신대에 와서 기독론적 전환을 이룬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인격을 통해 마음을,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의 어떠함을 유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경륜하신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셔서 교회 안에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경험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선배들과 목회자, 신앙의 동지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본 받고 닮아가는 그 아름다운 삶을 보며 자신들이 가보지 못한 성화의 길에 대해 소원하는 마음을 품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한 가족처럼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며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며 보편 교회의 상들을 이 구체적인 교회에 이루어 가게 하신 것입니다. 


C.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지만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성화 되고 싶지 않아서 이 고단한 회개와 끊임없는 십자가,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부인과 연단을 원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행복했을 때가 언제일까요? 맨 처음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주님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못된 인간을 위해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시고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리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죽인 것을 바로 내가 짊어져야 한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소원은 벌레 같은 인간을 구원하신 그 분의 크신 은혜에 감격하면서 그 분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때입니다. 그런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신자는 무슨 지식을 섭취해도 어떤 물질을 소유하고 하늘 높은 자리를 누려도 잠시 일 뿐이지 행복하지 않습니다. 


V. 결론 ; 순종으로 참여함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이제껏 자기의 고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셨던 주님의 손길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으로 주님의 이 성화의 계획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교회 안에서 나 때문에 불완전해진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더 온전하게 되도록 섬기고 그 교회의 아픔을 끌어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일들을 위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며 하나님이 주신 교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도록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