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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소중한 당신 (사 43:1~7, 롬 8: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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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소중한 당신 (사 43:1~7, 롬 8:14~17)


제가 어린 시절 교회학교에 열심히 나갔는데 여름성경학교가 되면 성경학교를 처음 시작하는 날은 늘 반을 새로 편성했습니다. 그래서 새로 반을 편성하고 나면 못 보던 아이들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늘 아이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만들었는데 그 때 부르던 노래가 생각이 납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 다니셨던 분들은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 그 이름 아름답구나.” 기억하시죠? 그래서 우리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면 “멋있다.” “용맹하다.” 이런 찬사를 붙였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우리가 어릴 때나 성장해서나 물어야할 질문이 있다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누구일까? 오늘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어떤 존재일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저 애굽에 바로 왕에게 가서 내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서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기겁을 합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관대 그런 일을 감히 하겠습니까? 내가 누구입니까?” 

그는 자신을 묻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이미 80이 넘은 촌로입니다. 나는 양치는 목동입니다. 나에게는 아무 힘과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 내가 어찌 가서 그 강한 바로 앞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내어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는 스스로 자신을 비하시킵니다. 여러분! 인생의 문제는 “내가 누구이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흔히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정체성은 하나님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회사 CEO, 사장이 있었습니다. 사장이 현직에 있을 때는 자신감이 넘치게 출퇴근하며 늘 생활에 활력이 넘쳤습니다. 회사에 가면 내가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정년이 되어 퇴직을 했습니다. 집에 가만히 들어와 앉아있으니 갈 때도 없고 오라는데도 없고 우울증에 빠져버립니다. 밥도 먹기 싫고 사람도 만나기 싫고 잠자는 것도 귀찮고, 그는 인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정체성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대통령이면 어떠하고, 장관이고 어떠하고, 사장이면 어떠합니까? 그건 하나의 직업에 불과한 것입니다. 직업은 늘 바뀔 수 있습니다. 때가 되면 직장에서 은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의 직업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사회적인 신분으로 평가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사실 하나만 확실하다면 우리 인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장자리 그만뒀다고 우울증에 빠지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퇴직했다고 인생포기하지 않습니다.

정체성을 회복할 때 우리 인생의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내 주인으로, 그리고 그 분을 믿고 신뢰하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미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습니다.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들은 자꾸 의심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 맞을까?’ 내가 믿는 성도는 성도 같은데 내가 자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 보니까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그리고 성령이 내 안에 거주하신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임이 틀림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할 때 내 인생에 목표가 달라지고 사명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만 일본의 한 불쌍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자기 어머니가 남들에게서 손가락질 받는 기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장하면서 아이들은 “너는 기생의 아들이야.”라고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어머니 밑에서 자랄 수가 없어서 자기 아버지의 집에 가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배다른 형제들이 있습니다. 본처의 자녀들은 늘 이 기생의 아들인 서자를 구박합니다. “너의 엄마는 기생이지?” “너는 기생의 아들이지?” “너는 우리하고 근본이 달라” 늘 구박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는 인생의 산다는 것이 뭔지 몰랐습니다. 아니 죽고 싶었습니다. 왜 사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자신에게 중병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폐병 3기였습니다. 그는 툭하면 피를 토하곤 했습니다. 살 의욕조차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사람도 없고 또 그를 치료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밖에서 바람결을 타고 소리를 들려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것이 도대체 뭔데?’ 기생의 아들이라는 말은 너무너무 듣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달려갔습니다. 달려갔더니 북을 치면서 구세군전도대가 전도를 하고 있는데 한 여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달려가서 
“아줌마! 나 같은 기생의 아들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나요?” 
“그럼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어요.” 
“나 그럼 예수 믿을래요.” 그는 예수를 열심히 믿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아주 성실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병은 더 깊어지지도 않고 낫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생각했습니다. ‘살다가 어차피 죽을 인생, 하루를 살아도 예수님처럼 살아봐야지. 남을 위해서 봉사하며 살아봐야지.’ 그리고는 자기 책을 정리해서 리어카에 싣고 고베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다리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걸인들과 넝마주의들과 노숙자들과 그리고 이미 늙어서 쓸데없는 창기들과 폐병환자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들을 섬겼습니다. 목욕을 시켜주고, 밥을 먹여주고, 치료를 해 주는 등의 일을 했습니다. 

책에 보면 심지어 변비가 심해서 대변을 누지 못하는 환자들의 항문을 자기 손가락으로 파헤칠 정도로 그들을 섬기고 사랑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폐병에 걸린 이 젊은이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수했습니다. 나이 70이 넘도록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에게 존경받는 분이 되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일본의 성자로 알려진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이십니다. 

그는 기생의 아들이라는 설움 때문에 살고 싶은 의욕을 잃어버렸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앞에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자기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많이 걸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평가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별 볼일 없다고 그러면 ‘그래 맞아!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야.’ 저 친구 좀 무능하다. 그러면 ‘그래 나는 무능한 사람이야.’ 이렇게 살아갑니다. 누가 좀 뭐라고 칭찬하면 금방 좋아하다가 누가 좀 나쁘게 말하면 또 금방 낙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우리는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정체성입니다. 

오늘 이사야 43장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먼저 그분은 나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너는 나의 소유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창조했고, 내가 너를 조성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이사야 43장 1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그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직접 지명해서 불렀다.” 
“아담아! 아담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울아! 사울아!” 부르듯이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셔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불러주셨고 그리고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왕의 소유입니다. 왕의 자녀입니다.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소유라는 도장을 크게 찍어주셨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러기에 악한 영들이 우리를 더 이상 괴롭힐 수 없습니다. 아니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이, 성령의 인이 우리 마음  속에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숲 속에서 아주 더럽고 지저분한 개가 발견되었습니다. 몹시 굶주려있었고,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 개가 누구 집 개냐고 쳐다보면서 지나갔습니다. 한 경찰관이 지나가다가 그 개를 봤는데 목덜미에 이름표가 달려있습니다. 그 이름표를 유심히 봤더니 그 이름은 밥스라는 개인데 그 밑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 강아지는 왕궁에 속한 강아지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강아지를 데리고 경찰서에 가서 목욕을 시켜주고, 잘 보호해주고, 약을 발라주고, 그리고 먹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찰관은 그 강아지를 잘 데리고 있다가 국왕에게 왕궁으로 전달해 주었습니다. 

얼마 전 국왕부처가 에든버러에 휴가를 왔다가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귀가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국왕이 기뻐했는지. 

여러분! 그 강아지는 국왕의 소유이기 때문에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소유자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는 내 것이라.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자녀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보배롭고 존귀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을 가리켜서 “너는 보배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장 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으면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나의 귀염둥이요 나의 사랑이라.”라는 뜻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너무 예쁘면 “쟤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야.” 남들이 나에게 뭐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은 이제 한물 간 사람이라고, 당신은 이제 무능한 사람이라고, 당신은 이제 미래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던지 나를 사랑하십니다. “너는 나의 보배로운 사람이야. 너는 나의 존귀한 사람이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지나가다 보니까 보석이 진흙탕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보석에 진흙이 묻었습니다. 그 보석 귀합니까? 천합니까? 진흙이 묻어도 보석은 보석입니다. 우리가 때로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죄를 범할 때도 있습니다. 시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보석은 보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배롭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을 가리켜 존귀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마귀의 음성을 들으면 뭐라고 합니까? “야! 너는 별 볼일 없는 존재야. 너는 실패한 사람이야.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는 무능력해.” 마귀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마귀의 음성은 듣지 마십시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실까요? 4절에 보니까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내 대신 죽습니다. 3절에 보니까 애굽, 구스, 스바로 너를 대신해 속량물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당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가 내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습니다. 그만큼 나는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천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스스로 열등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자신을 비하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너는 보배롭고 존귀한 자라고 말씀하시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보호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43장 2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물과 불 속에 살아갑니다. 특별히 이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있는 70년의 시간입니다. 그들은 고난당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포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물 가운데 있을 때, 불 가운데 있을 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고,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고, 불이 너희들을 사르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정말 물과 불 가운데, 어떤 고통과 시련 가운데 있을지라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너를 지키시겠다고, 여러분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존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미국의 한 중년부부가 살았는데 부인이 언젠가부터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큰 글씨도 잘 읽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출근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남편이 며칠 동안 아내를 데리고 출근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여보! 이제 당신 혼자 한번 출근해 봐요.”하고 말하였습니다. 아내는 너무 낙심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우리 남편이 이럴 수가 있나?’ 너무 서러웠습니다. 그래서 혼자 출근을 하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전봇대에 부딪힐 뻔도 하고, 버스를 잘못 타기도 하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매일 매일 힘든 투쟁과 싸움을 이겨나갔습니다. 무려 2년이 지났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버스도 지혜롭게 잘 타게 되었고, 길도 잘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버스를 내리는데 버스 기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참 행복하시겠습니까?” 
“아니 뭐가 행복합니까? 앞도 잘 안 보이는데...” 
“아니, 남편분이 늘 이렇게 동행해주시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니? 우리 남편이 언제 나와 함께 동행합니까?” 
“제가 보니까요, 아주머니가 버스타면 뒷자리에 남편이 타시구요, 내리면 남편이 따라 내리고요, 늘 뒤에서 남편이 아주머니를 따라 가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울컥하고 기쁨이 솟는지. 
‘아! 우리 남편이 말은 그렇게 해도 내가 넘어질까 봐 나를 뒤에서 늘 지켜보고 있었구나.’ 

남편은 아내를 따라갑니다. 아내가 잘 가서 직장에 출근하면 자기는 그제야 자기 직장으로 출근합니다. 그 일은 2년 동안이나 해 낸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남편을 원망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눈으로 볼 순 없지만, 만 질순 없지만 여러분 가까이서 여러분과 동행하시고 여러분의 인생길을 지키시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과 불 가운데 지날지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목자가 되셔서 여러분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과 고통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제 하나님의 자녀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마귀의 속삼임에 속지 마십시오. 이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너는 내 사랑받는 존재야. 너는 내 것이야. 내가 너를 불렀어. 너는 너와 함께 있을게. 너는 나의 보배롭고 존귀한 사랑하는 내 자녀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로마에 양자 법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문화에 정통합니다. 로마 사람들은 귀족층이 있고 중산층이 있고 하층민이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자기 자녀가 그렇게 총명하지 못할 때 다른 집 아이를 입양해서 자기 아들을 삼습니다. 또 자기가 부리고 노예 중에서도 혹시 총명하고 아주 잘 생긴 아이들이 있으면 그 아이를 노예의 신분에서 자기 아들로 삼습니다. 입양을 합니다. 요즘도 자녀가 없으면 고아원에서 아이를 입양해 올 수 있습니다. 남의 집 아이를 자기 집 아이로 입양할 수 있습니다. 호적을 고칩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법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마귀의 종이었지만, 죄의 종이었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입양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뀐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네로라는 유명한 황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원래 노예였습니다.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노예였습니다. 황제는 자기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가 너무 똑똑하니까 그 노예를 자기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난폭한 황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신분이 바뀝니다.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또한 이제 어떤 아이가 새로운 가정으로 입양되어 가면 옛 가정의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부채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빚쟁이들이 와서 아들에게 그 빚을 갚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만약 새로운 집안으로 입양되어 간다면 이제 그 아버지 부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요즘도 부모가 채무를 많이 남기고 가면 우리가 상속을 포기하면 그 채무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속박과 올무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얽매지 못합니다. 과거의 모든 잘못된 것들이 우리를 붙들지 못합니다. 우린 예수 안에서 자유로운 삶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여러분의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과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았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신분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또한 어느 집에 입양되어 가면 그 새 아버지의 재산을 다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정에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후사가 되어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그 새로운 가정에 고난과 영광을 함께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말씀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좋은지요. 시편 27편 10절에 보니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때로 어떤 못된 아버지들은 그 자식을 버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잘못 했다고 꾸짖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둘째아들이 재산을 가져다가 방탕하게 다 써버리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와도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아들로 맞이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잔치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혀 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정말 염치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조금 염치가 없어야 합니다. 과거에 내가 이런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내 인생의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축복, 새로운 은혜, 새로운 영광에 동참하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늘 아버지가 바로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귀한 사실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공장에서 막 찍어내는 그런 상품이 아닙니다. 공장에서는 수건을 몇 천 장씩 찍어냅니다. 쓰다가 지저분하면 걸레로도 쓰곤 합니다. 상품보다 좀 나은 것이 명품입니다. 무슨 백화점에 가면 유명 외국 브랜드를 팝니다. 명품 가방 등, 그러나 그것도 귀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명품이지만 그것도 많이 있습니다. 진짜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작품입니다. 작품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만드셨습니다.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쌍둥이도 안 닮았습니다.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DNA가 다릅니다. 난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확신을 가집시다. 이 의식이 있다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는 세상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풍랑보다 위대한 분이십니다. 이 풍랑을 명령으로 잔잔케 하실 수 있는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언젠가 잠깐 지나치다가 CTS 기독교 방송을 듣다보니까 미국 레이크우드교회의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마침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밑에 한국말로 자막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교회에 한 중년부인이 어린 아기를 데리고 주일에 나옵니다. 이 아이가 목사님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오면 “목사님!”하고 쫒아옵니다. 그럼 목사님은 달려가서 아이를 안아주고 뽀뽀해주곤 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참 예쁜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보면 안아주고 싶고 뽀뽀해주고 싶고 그렇습니다. 그 아이들이 목사님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중년부인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오늘도 목사님은 예배가 끝나고 이 아이를 안아주고 뽀뽀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이만큼 엄마 손을 잡고 가더니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쟤가 왜 안아주는 것이 시원치 않았나? 뽀뽀가 시원치 않았나? 한 번 더 해달라는 건가?’ 싶어서 “한 번 더 안아줄까?”했더니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목사님께 귀를 자기 입에 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이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 아이는 아빠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아빠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목사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는 하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게 하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를 품어주시고 안아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늘 아버지가 내게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는 감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접할 하늘 아버지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분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의 의식을 가지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승리하는 인생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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