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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의 말씀이 결여된 삶 (민 14: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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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말씀이 결여된 삶 (민 14:1~3,10)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데 그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오늘 설교 제목을 “말씀이 결여된 삶"이라고 정했습니다. 무엇이나 결핍한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영양이 결핍되거나 양식이 결핍되면 삶에 불균형을 낳습니다. 오늘 세계적으로 경제파동이 발생한 것도 결핍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래서 지금 온 세계가 홍역을 치루고 있습니다. 신앙의 삶에도 영성과 말씀의 결핍이 아주 좋지 않은 불균형을 낳습니다. 이 영성의 불균형은 신앙에 문제를 야기하고 사고와 판단에 지대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래서 판단을 착오하고 그릇 판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풍성한 영적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예수를 생명으로 말씀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장 먼저 주신 것이 천국에 대한 언약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제 일성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세상에 새 길을 제시하셨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길을 가도록 안내하셨습니다. 

그 언약과 말씀을 마음에 잉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사람이고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과 언약에는 무한한 힘과 능력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잉태하고 힘입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과 이 말씀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잘 나타나 있는 사례가 오늘 읽은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열두 명의 정탐꾼의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모세는 마침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입구인 바란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곧 가나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12지파에서 1명씩 12명의 지도자를 차출해서 들어갈 땅 가나안을 실사하기 위해서 정탐을 실시했습니다. 

13장21절을 보면 “신광야에서 하맛 어귀까지 정탐”하기 위해서 입니다. 신광야는 가나안땅 제일 남쪽 경계선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맛 어귀는 최북단 경계선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가나안땅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약 160km의 땅을 두루 살펴보고 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2명의 지도자를 엄선해서 중책을 맡겨 40일 동안 정탐을 실시하라고 보냈습니다. 그 12명의 정탐꾼들이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마침내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 내용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12명중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긍정의 보고를 했습니다. 그 긍정은 절대적인 긍정이었고 그 땅은 언약 그대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땅을 정복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0사람은 부정적으로 보고하고 그 땅을 악평했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땅은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사람을 삼킬 정도이고 그곳 사람들은 모두 장대 같았고 우리는 메뚜기 같았다, 그리고 그곳 성벽은 철벽으로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고 백성들이 누구의 말을 믿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절망하고 낙심하고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지도자는 참 중요한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정신도, 생각도, 말도, 사고도, 판단도,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 조직이 갈등하고 불화하고 분란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여기 10명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잊었습니다. 그 언약은 신앙의 근거인데 불행하게도 그 언약을 잊고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습니다. 신앙인은 이 성경에 나오는 언약, 약속, 계시, 섭리, 말씀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에게 이 약속, 계시, 말씀을 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미래 불투명 

미래는 꿈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미래가 없는 사람은 내일, 미래, 장차, 먼 훗날, 저 산 너머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있다면 오늘 현재만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미래는 천국입니다, 언약입니다, 신앙의 안목을 가지고 내일을 보면 그 천국이 보입니다. 언약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보입니다. 장차 있을 심판이 보입니다. 그리고 장차 주어질 상급도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장차 주어질 상을 보았습니다. 그 상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상을 바라보고 매일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20년 종살이를 하는 동안 인내로 이겨나갔습니다. 왜냐하면 벧엘에서 본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종살이와 옥중생활을 잘 이겨나갔습니다. 그가 일찍이 꿈에서 본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내일, 언약,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이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인 것을 보지도 발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마음에 꿈도, 미래도, 언약도, 말씀도 없으니까 가나안이 그들에게 주어진 선물의 땅인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현실 더 부각 

가나안땅에 가서 본 것은 그곳의 땅이 거칠다는 것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키가 큰 것만 보였습니다. 성이 견고한 것만 보였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가져온 포도송이가 너무 커서 두 사람이 메고 온 것은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땅에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견고한 성처럼 보였지만 어디엔가 허점이 있다는 것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크고 견고하고 황무지 같은 땅만 생각났을 것입니다. 

마음에 말씀이 없는 사람은 주어진 언약도, 하나님 약속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의 모양에 덮여 버립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수없이 가나안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출애굽을 한 목적도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생한 것도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수 없이 언약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 말씀에 대한 확신도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아득한 현실만 보였습니다. 이 무서운 현실은 내 안에서 믿음이 약해질 때, 언약이 흐려질 때, 말씀이 고갈될 될 때 더 크게 나타납니다. 내 안에 믿음과 말씀과 영이 강하게 역사하실 때는 현실은 아주 작게 보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두려워하지도 무섭게 여기지도 않고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기도와 말씀과 하나님의 영감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피곤도 없습니다. 고난도 적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때는 아골 골짝 빈들에도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고 찬송을 크게 부를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이 언약과 약속과 말씀과 주의 영이 내 마음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가난도 좋습니다. 오히려 그 삶이 감사하고 기쁨이 있고 행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역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과 언약이 흐려질 때는 앞이 캄캄해 옵니다. 가난이 무섭고 그래서 더 피곤하고 미래가 두려워집니다. 거기에서 무슨 소망적인 생각이 나오고 안목이 나오고 올바른 판단이 나오겠습니까. 그때 나오는 말은 불평과 불만과 짜증과 넋두리와 두려움의 말들만 나타날 것입니다. 

여기 10명의 정탐꾼들은 마음에 언약도 말씀도 영도 고갈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무거운 사명을 가지고 갔다 오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는 암담한 현실만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나타난 현실과 그곳 사람들의 건장한 모습과 견고한 성만 눈에 강하게 띄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온 말이 모두 두려운 보고뿐이었습니다.  

지도자는 그래서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꿈이 없고 말씀도 없고 언약도 안목도 없는 지도자는 자신만 불행한 것이 아니고 그 백성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보고를 듣고 자신들만 비관한 것이 아니고 온 백성들을 비탄에 빠지게 하였고 낙심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여 그 순박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힘 

말씀이 결여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일입니다. 성령의 생각은 희망이고 가능이고 긍정이고 소망입니다. 말씀에 의지해 살고 하나님의 영에 의존해 살면 환경과 처지와 상관없이 소망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곳 그곳은 어디나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대답이나 언어나 말이나 생각은 한결같이 밝고 따뜻하고 소망이 넘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영에 의지하지 못하고 말씀을 떠난 삶에는 현실만 강하게 대두되고 두려움이 엄습해 오고 불평과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됩니다. 이 10명의 지도자들은 언약을 잊었고 말씀의 힘도 상실했으니까 나오는 생각은 모두 부정과 불신과 불가능과 두려움뿐이었습니다. 

특히 신앙지도자의 요건은 말씀에 대한 의지력이고 성령에 대한 의지력과 언약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자신감이, 믿음이, 긍정의 생각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사고가 긍정적이어야 하고 미래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그런 안목이 없다면 그 조직은 불행하게도 전진하거나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대부분 역사가 후퇴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때 그 10명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어떻게 생긴 사람들입니까. 그들의 명단이 민 13장4-16절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수치입니다. 그것은 대대로 씻어지지 않는 수치였고 불명예였습니다. 

성경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은 출애굽의 목적지인 가나안을 앞두고 그 역사의 길을 가로 막았던 장본인들을 역사적으로 심판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들은 도도히 흐르던 역사의 물줄기를 억지로 가로막았던 사람들입니다. 역사적 사명을 띠고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그렇게 악평을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 결과 온 백성들이 그날 밤 소리 높여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도둑질만 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희망을, 소망을, 기대를 꺾는 것도 죄입니다. 그리고 흘러가야 할 역사를 멈추게 하는 것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로를 가로막는 것도 다 죄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다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내 마음에서 원망이 솟아나오거나 요즘 특히 웬일인지 짜증이 많이 나온다거나 누군가가가 괜히 보기 싫어진다거나 미래가 암담하다거나 신앙생활에 회의가 찾아온다거나 하면 여러분 자신을 한번 깊이 살펴보십시오. 살펴보면 틀림없이 내 안에 말씀이 결여되어 있거나 영이 고갈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낼 때에 모세는 보내기 전에 기도회를 하고 보냈어야 합니다. 그들을 다시 무장시키고 하나님께서 수차례 주신 언약들을 다시 확인시키고 말씀을 회복시킨 후에 보냈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것들을 생략하고 그들을 그냥 보낸 것이 잘못입니다.    


섭리 잊음 

이 대목에서 가장 슬픈 현실은 그들이 여기에 오기까지 주어졌던 하나님의 섭리를 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나안에 대해서 수차례 주신 언약의 말씀들을 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이 가나안에 가기까지 나타났던 수많은 기적들을 그들은 너무 쉽게 잊었습니다. 

출애굽할 때까지 주어진 10가지 재앙들, 홍해를 건널 때 있었던 그 통쾌한 기적, 마른 광야에서 주어진 구름기둥과 불기둥, 반석에서 물을 내 마셨던 일, 만나를 먹었던 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적들을 손쉽게 물리쳤던 일 등 얼마나 많은 섭리와 기적과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그 10명은 가나안땅에 살고 있는 키가 큰 사람들을 보는 순간, 그 땅의 박토를 보는 순간, 견고한 성을 보는 순간, 그 섭리들과 기적들과 하나님의 손길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철병거가 쫒아올 때 불기둥이 막았던 것도, 홍해 앞에서 오도 가도 못해서 쩔쩔맬 때 넘실거리던 홍해가 두 쪽으로 갈라져 유유히 건너가던 일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 눈앞에 나타난 풍랑이 너무 크게 보였던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 순간 방금 전에 있었던 5병 2어로 5천명을 먹이시던 그 섭리의 주님이 그 옆에 있었는데도 그것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러니까 넘실거리는 파도가 더 크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10명의 지도자들은 부정적인 보고 뿐 아니고 사실도 왜곡했습니다. 너무 커서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온 포도송이를 가져왔으면서도 그 땅이 사람을 삼킬 만큼 박토라고 사실을 왜곡해서 보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눈에는 좋은 면은 안보이고 좋지 않은 면만 보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그들이 언약도 잊고, 말씀도 상실하고, 출애굽을 시키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만 낙심했으면 괜찮은데 자신은 물론이고 그 부정적인 영향이 파급되는 효과가 너무 컸습니다.  

행복도 전염되기는 합니다. 그런데 소망, 희망, 행복은 전염되는 효과가 너무 작습니다. 그에 비해서 어두움, 절망, 낙심, 분노, 부정은 전염성이 너무 큽니다. 백성들에게 오직 희망과 소망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갔다 온 사람들의 보고를 들어보니 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분노하고 절망하고 밤새 통곡하다가 마침내 돌을 들어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10명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너무 불행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 입구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고를 듣고 분노하고 불신하고 통곡했던 그 백성들도 모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뿐 만 아니라 모세도 아론도 기성세대들 모두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뿐 아니고 그 백성들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고 40여 년간 광야에서 재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은 그런 생각, 사고, 자세, 불평, 불신 등 언약을 잊고 말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에서 이 말씀과 언약의 믿음을 갉아먹고 잊어버리게 하고 영을 소멸시키는 모든 질투, 투기, 경쟁심, 물욕. 현실집착 삶, 탐욕들을 조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도 이 10명과 똑같이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즉 우리에게 언약으로 주어진 천국도 잃어버리게도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 이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이 말씀이 내게 힘과 깊은 안목과 능력과 언약을 믿게 하는 영감을 얻게 됩니다. 그 말씀이 내게 꿈과 먼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도 가지게 합니다. 겨자씨는 작고 볼품이 없지만 그 씨가 땅에 심겨지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인다고 했습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그 안에 생명의 근원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이 말씀과 언약이 있으면 주님은 내게 말씀으로 오시고 주님으로 오시고 구세주로 오시고 메시야로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움직여 주어진 소명의 삶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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