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와 화평이 입맞추다 (시 85:7~13)

  • 잡초 잡초
  • 1001
  • 0

첨부 1


의와 화평이 입맞추다 (시 85:7~13)

 
“입맞춤”이라는 아름다운 명화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미술관에 많은 사람들이 무척 보고 싶어하는 유명한 그림 하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그린 가로, 세로 180cm 되는 “입맞춤”이라는 유화입니다. 꽃이 가득 아름답게 핀 벼랑 끝처럼 보이는 곳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껴안고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뺨에 입맞춤을 하고 여자는 그 감흥에 완전히 몰입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남여 모두 금빛 찬란한 황금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남자의 옷은 직사각형의 모자이크 무늬가 있는 강인한 남성상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여자의 옷은 원형의 무늬로 부드러운 여성상을 부각시켜주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감미로운 모습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녀 간의 입맞춤의 아름다운 환상을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이 그림이 떠오르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시편 85:10)

이 구절은 마치 연인이 서로 사랑의 입맞춤하는 것처럼 아름답게 쓰여 있습니다. 마치 두 인격체처럼 대면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동사는 ‘만났다’는 것이고, 두 번째 동사는 ‘서로 입맞추었다’는 것으로 그 의미가 더욱더 상승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표현으로 볼 때 마치 남녀 간의 사랑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인애와 진리, 의와 화평의 입맞춤은 예수님이 오실 때 가능합니다. 

의와 화평이 어떻게 서로 입맞춤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세상의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로맨스가 있다면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춤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로맨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해주신 축복의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했을 때 인애와 진리가 함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와 화평이 인간과 함께 동참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한쪽이 먼저 오면 한쪽은 떨어져갑니다. 다른 한쪽이 오면 다른 한쪽은 함께 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의와 화평이 인간의 죄 때문에 함께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합하여 입맞춤을 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애와 진리가 함께 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의와 화평이 함께 거할 수가 있습니다. 

입맞춤이란 인류역사상 오랜 기간 동안 떨어져 있던 두 인격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합일을 아름답게 설명한 것입니다. 입맞춤이란 두 인격체를 전제하며 사랑을 깨달아 표현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입맞춤을 했습니다. 성인이 된 자녀들에게 때때로 껴안으면서 볼과 이마에 입맞춤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징그럽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표시입니다. 

성경에서 입맞춤은 사랑과 화해의 표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입맞춤의 모습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정과 우정의 표시이며 사랑으로 화해했다는 표시입니다.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후, 에서의 공격이 두려워 자신의 고향집을 떠나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른 후 고향집으로 되돌아갔을 때 형 에서를 만나 둘이 껴안고 화해의 입맞춤하는 장면이 멋지게 그려져 있습니다(창세기 33장). 
  
요셉은 자신을 애굽에 팔아넘긴 형들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먹을 것이 없어 총리대신이 된 그를 만나기 위해 왔을 때 그는 형들을 껴안고 눈물 흘리며 입맞춤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창세기 45장).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모세와 아론은 호렙산에 올라가서 입 맞추면서 결심했습니다(출애굽기 4장).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에게 기름 부어 안수하고 그에게 존경과 사랑의 표시로 입 맞추는 장면도 등장합니다(사무엘상 10장). 가장 멋진 친구로 알려진 다윗과 요나단은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겨 둘이 헤어질 때 서로 입 맞추고 이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사무엘상 20장). 
  
입맞춤의 모습은 구약 성경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준 재산을 다 탕진하고 허랑방탕하게 지냈습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가 뛰어 나가 누추하고 냄새나는 아들을 껴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입맞춤하면서 아들이 살아왔다고 기뻐하며 반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풉니다. 
  
바울은 3년이나 목회했던 사랑하는 에베소교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때 성도들과 바울의 사랑이 뜨거웠고 이제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에 서로 껴안고 입맞춤하면서 이별합니다(사도행전 20장). 
  
바울은 편지로 교회에 문안하면서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로마서 16:16, 고린도전서 16:20)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도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베드로전서 5:14)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입맞춤이란 사랑의 표시입니다. 
입맞춤이란 우정의 표시입니다.
입맞춤이란 화해의 표시입니다.
입맞춤이란 친밀함의 표시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와 민족의 타락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시편 85:10)
 
이 네 가지는 모두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간에게 다가올 때 함께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범죄 했기에 하나님의 진리와 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리와 의와 거룩함으로 오면 인간은 비명을 지르고 아우성을 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리 앞에 징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진리와 의를 잠시 뒤로 접어둡니다. 그리고 인애와 화평으로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그럴 때 인간은 처음에는 조금 좋아하는 것 같다가 뻔뻔해지기 시작합니다. 금방 교만해지고 자기 노력과 능력으로 축복받은 줄로 착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역사가 전부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인간은 또 비명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역사 속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진리와 인애가 함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와 화평이 함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편 85편의 시인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인이고 이스라엘 민족이 타락한 백성인지를 고백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를 함으로 예루살렘이 멸망되어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간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구나. 인간은 죄인이구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구나. 인간은 땅에 사는 존재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존재이다.’ 

시인은 죄를 용서하시고 축복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타자로 죄악 속에 들어올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깨달은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악과 민족의 죄악을 용서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되돌아올 수 있었던 축복을 허락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 사랑하시는 분, 화평케 하시는 분, 죄악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가슴으로 안아주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시편 85:1~2)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 덮으셨습니다. 이 축복을 경험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고향에 다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은 완전히 피폐하고 황폐해졌습니다. 무너진 돌들은 남았고 들풀만 핀 허허벌판이었습니다. 귀향의 꿈을 품고 왔는데 모든 것이 무너져있는 예루살렘을 보았을 때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고통을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아직도 우리에게 분노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우리에게 진노하고 계십니까? 우리를 기쁨의 대상에서 제외 시키셨습니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진리와 거룩함 앞에 누가 설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죄인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시편기자는 낙담하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분노를 거두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때의 현실은 아직 황폐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다시 이겨나가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시인은 마음속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자기 민족을 위로할 생각을 했습니다. 민족을 격려하며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롭게 일어날 기회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민족을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은 작은 것도 소중하고 큰 것도 소중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격려란 인간을 새롭게 하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아이다 모리스(I.G.Morris)가 쓴 “지극히 사소한 것은 중요하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너무 사소한 것이다. 
무시하는 말이나 의심에 찬 표정, 말과 다른 경멸하는 웃음에 
눈앞에 목표가 있어도 우리의 발걸음은 느려지고 희망과 용기가 사라진다.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따뜻한 손으로 내미는 악수와 주위 사람에게 들은 
사소한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생각에만 머물러있던 계획들을 
마무리하게 하고 두려움과 의심들을 떨쳐버리게 한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일들은 정말 작은 일들이다.”

세계 경제 금융의 위기 때문에 온 세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경제적인 위기를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국민들이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한 것이 어떻게 될지 몰라 고통 받고 있습니다. 신문과 텔레비전에 부정적인 이야기들만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소망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먼저 서로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기업을 하는 분들도 다시 노동자들과 함께 격려하면서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백성들이 얼마나 열정과 능력이 있는 백성들입니까? 50년 전, 100년 전 이 땅이 참혹할 때 꿈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축복을 주셨습니다. 기대하고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땀을 통해서 이 땅이 이만큼의 축복을 받았기에 우리는 다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힘들수록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다시 일어납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축복해 주셨으니 다시 기도하며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잘못이 있으면 용서받게 하옵소서. 우리의 거짓이 있으면 용서받게 하옵소서. 우리의 게으름이 있으면 용서받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못된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용서받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면서 다시 새롭게 변화되는 대한민국을 건설해 나가야 합니다. 
  
시인은 바로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으로 징계와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인애와 진리가 함께 만나고 입맞춤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애는 히브리어로 ‘헤세드’라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이루시겠다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신실한 사랑, 끝없는 사랑, 실패 없는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 화평을 이루는 사랑, 끝까지 이어져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애와 진리가 함께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거룩함과 화평의 역사가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용기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민족과 세상을 위한 새로운 꿈과 비전을 본 이 시인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우리 교회, 그리고 이 민족을 축복해주시는 비전을 다시 확인하고 용기를 가집시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죽으셨으며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꿈과 비전을 바라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애가 없는 진리, 사랑이 없는 진리란 무자비하고 잔인한 심판뿐입니다. 사람들을 끊임없이 분노하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없는 인애는 친절의 탈을 쓴 미숙하고 어리석은 동정에 불과합니다. 공의가 없는 거짓 평화입니다. 화평이 없는 공의, 냉혹한 분노만 남는 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화평은 굴욕이고, 화평이 없는 정의는 독선에 머무릅니다.
 
우리에게는 인애도 있고 진리도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의도 있고 화평도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 중 하나만 주장합니다. 의의 분노만 주장을 하던지, 적당히 타협하는 친절만 주장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과 다릅니다. 

예수님 안에는 의도 있고 화평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인애도 있고 진리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땅 위에 새로운 믿음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의 왕,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분 안에 들어올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베푸시는 인애와 진리가 서로 입 맞추고, 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모하며 가슴에 품으세요. 예수님이 내 안에 있을 때 축복된 역사가 이 땅에 나타날 것입니다. 시편 2편에서 시인은 놀라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편 2:1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추십시오. 우리가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지막 날 다시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 의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담당하셔서 새로운 평화의 역사를 이룩해주실 것입니다. 주님과 입 맞추는 자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주님과 입 맞추는 자가 내 자신과 화해하게 됩니다. 주님과 입 맞추는 자가 이웃과 화해하는 축복의 역사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는 의도 없고 화평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인애도 없고 진리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맞추는 것을 깨닫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게 하셔서 우리를 통해 이 땅위에 새로운 꿈과 비전을 가정과 교회, 사회와 국가에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