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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림의 삶 (사 40:1~3, 벧후 3:8~15, 막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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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삶 (사 40:1~3, 벧후 3:8~15, 막 1:1~8)


기다리는 것은 매우 지루한 일이다. 우리는 버스 정거장이나, 기차역 대합실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오고 있는 버스나 기차, 혹은 함께 여행을 갈 사람을 기다릴 것이다. 

여행을 가는 목적지가 여유와 행복이 있는 곳이라면, 정거장에서 기다리는 기다림은 설렘의 기다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목적지가 할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곳이고,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가는 곳이고, 가지 않아도 되지만 누구의 명령으로 하는 수없이 가는 것이라면, 기다림은 고역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설렘으로 기다리는 사람이건, 고역의 지겨움으로 기다리는 사람이건, 기다리던 버스나 기차가 오면 타고 목적지로 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기다림이 없이 그냥 정거장이나 대합실에 앉아 있는 사람은, 버스가 오던 기차가 오던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는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의 목표가 없이 살아가고 있다. 자기 나름 몇 가지 계획을 가지고 살아간다지만 사실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삶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인데, 열심히 일하면 무얼 하며, 많은 업적을 쌓은들 무엇 할 것인가?

이러한 인생에 하나의 돌파구가 생겼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보내 구원을 이루겠다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이런 희망의 메시지를 받아 안고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사업이다.

막 1:1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 기쁜 소식이 바로 이 희망이다. 세례 요한은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의 기다림을 세상에 선포한다. 그는 먼저 죄를 용서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는 당시 가난한 유목민의 먹거리인 소금물에 익혀서 숯불에 구운 메뚜기와 야생벌꿀을 먹는 검소함과 겸손함을 가지고 성령으로 세례를 줄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로서 정거장이나 대합실에서 목적지가 없어 버스가 지나가건, 기차가 지나가건 관심 없었던 사람들이 이제 영원으로 인도할 버스와 기차를 기다리게 되었다.

눅 8:40 “예수께서 돌아오시니, 무리가 그를 환영하였다. 그들은 모두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고 한다. 바로 기다리게 된 우리는 예수를 환영하게 된 것이다. 예수를 사모하며, 예수가 임재 하시기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에 열광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다림이 없다면 우리의 찬양은 아무런 의미 없는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기다림이 설렘이 되려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기다림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더 기다린다. 그러다가 오시면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그런데 사실 기다리지 않는 분이 불쑥 찾아오면, 어쩌면 귀찮기까지 하다. 괜히 와서 자기를 간섭 할까 봐 지레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예수님의 일생을 바라보면 기다림의 시간인 것 같다. 아니 지금도 그 기다림의 끝은 없어 보인다. 태초부터 시작된 우리 곁으로 오시기 위한 탄생을 기다리시던 시간들, 또한 복음 전도 여행을 시작하기 전 그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나사렛에서 함께 하시면서 기다리시던 시간들, 복음 전도 여행을 하시면서 기다리시던 십자가의 죽음의 시간들. 부활을 기다리며 그 차디찬 무덤 속에서 3일을 머무셨던, 그리고 승천하시어서, 우리에게 다시 오시기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분이시다.  기다림으로 모든 것이 향하고 있으신 분이심을 우리는 알게 된다. 

예수님은 왜 우리를 기다리실까? 벧후 3:8 하나님은 시간을 재는 다른 척도들을 가지고 계신다고 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종말이 언제인지,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올는지 등 우리가 언제까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하는가에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고 오래 참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10절에서 나오는 ‘주님의 날’은 온 우주적인 재난의 날이다. 그날이 되면 태초에 일어났던 창조 이전의 혼돈 상태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다. 12절에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심판의 날이 오는 것을 고대하며 기다려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흠 없이 유지하여 그날을 재촉하려고 애써야 한다고 한다. 더구나 14절에 보면 그 날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행실에 티도 없고 흠도 없도록 노력함을 통하여 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에게 은혜의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저는 제가 갖고 있는 돈과 명성만큼 제 구두를 사는 것 이상으로 그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오프라 윈프리의 ‘그 이상의 무엇을 해야 한다'라는 말을 통해, 그녀는 아프리카의 아동들을 위해 학교와 체육관을 지어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고 한다. “가능한 많은 돈으로 누군가 더 많이 행복해 질 수 있다면 그것은 해 볼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한다고 한다. 

산부인과 전문의 최경숙 동서의원 원장(58)은 유방암을 앓고 난 후 “유방암이 오히려 내 인생에 축복이 됐다”고 간증한다. 1990년대 그는 나름대로 유명한 산부인과 개업의였다. 그러다 1999년 유방암 판정을 받고는 유방을 잘라내고, 암세포가 전이된 겨드랑이 임파선도 제거했다. 거기에 자궁과 난소까지 떼 내는 대수술을 함께 받았다. 

최 원장은 “생사의 고비에 있을 때 내 몸이 회복되면 남은 인생을 남을 위해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된 2000년부터 최 원장은 노숙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탈북자 등을 위한 의료 봉사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의 진료는 예전과 달랐다. 동남아 지역에서 진물 나는 나환자를 끌어안고, 장애 환자를 손수 씻어준다.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 이라크, 북한에도 찾아가 의료 봉사를 하며 2002년 카자흐스탄 의료 봉사 중에 뇌염에 걸려 또 다시 죽음의 위기를 맞았지만, 이후에도 봉사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의 주업은 의사가 아니라, 의료봉사입니다. 암은 내게 죽음으로 몰아갔지만 암 때문에 나는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라고 간증한다.

우리는 흠과 티가 많은 사람인데, 어떡하면 좋을까? 사 40:1의 ‘위로하다’는 표현은 성경 언어에서 말로 안심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나쁜 상황이 달라지도록 개입함도 뜻한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말씀에 따르면 주전 587년의 대 재난(왕하25장,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림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신다. 이제 사로잡혀 와 살던 생활은 끝났다. 이제는 해방된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우리를 건지시는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갈 곳을 몰라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보내셔서, 희망을 기다리게 하셨다. 그 희망을 위해 우리는 구원과 영생을 기다리게 되었고, 그 기다림이 설렘으로 내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흠과 티가 없는 상태로 기다림을 빨리 끝내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이런 우리들을 주님께서는 다시 위로하시면서 오히려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오늘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의 위대하심 앞에 나를 내어 놓고 나를 더욱 겸손하고 경건하게 추스르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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