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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출 1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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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출 14:10~20)


제 할아버지는 소에 받쳐서 돌아가셨습니다. 성질 급한 제 큰아버지는 그날 당장 할아버지를 받은 소를 도축하여 고기를 동네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시골의사 한 사람이 소에게 받힌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자기가 기르던 소에게 받혀서 병원에 오셨는데 갈비뼈가 네 대나 부러졌습니다. 병원에 오신 할아버지는 “이놈의 소, 잡아먹어야지” 라고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의사들이 급하게 수술했습니다. 수술하다보니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습니다. 갈비뼈를 수술하려고 하는데 열고 보니 폐암이 있었습니다. 갈비뼈 부러진 것은 뒤로 하고 폐암부터 빨리 수술했습니다. 너무나 천만다행인 것은 폐암이 1기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폐암은 전이가 빨리 되고 예후가 좋지 않은 병으로 암 중에서도 상당히 무서운 질환인데 할아버지는 얼마나 큰 복을 받았습니까? 할아버지는 폐암도 수술하고 갈비뼈 다친 것도 다 치료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는 완쾌되었습니다. 

확인차 병원에 검사하러 오셨을 때 그 할아버지를 수술하였던 의사들이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그 소 잡아 잡수셨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할아버지는 “아니, 아들로 삼았어.”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의사는 이 이야기의 제목을 ‘새옹지마가 아니라 새옹지우다’ 라고 지었습니다. 소에게 받혔다고 그렇게 화를 내고 소를 잡아먹으려고 할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했습니다. 참으로 길고 힘듭니다. 우리나라 36년간의 식민지 생활도 그렇게 고통스러웠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다 수탈되어 우리나라의 삶의 기반이 하나도 없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간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노래 중에 ‘바위고개’ 라는 노래가 있는데 3절 가사가 ‘10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레꽃 안고서 눈물집니다.’입니다. 10년간 머슴살이가 너무나 서럽지만 들고 울 때가 없어 진달래꽃을 안고서 눈물짓는다는 노래인데 그 노래를 부를 때면 슬픔과 아픔이 전해져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머슴살이가 아니라 노예살이입니다. 그것도 430년입니다. 아버지도 노예, 할아버지도 노예, 나도 노예, 내 아들도 노예로 살았던 세월이므로 매우 길었습니다. 이 히브리 노예들이 드디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출애굽기를 헬라어로 엑소더서라고 하는데 탈출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감격과 환희 기쁨 자체였습니다. 게다가 이집트를 나올 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평생 한번 만져보지도 못했던 수많은 금은패물들을 이집트사람들로부터 얻었습니다. 그냥 주었습니다. 옷도 주고 금은패물까지 주니 히브리 노예들로서는 정말로 꿈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같은 경제위기 때 우리는 한 번 생각해봅니다. 지금 매우 힘들고 또 앞으로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래도 괜찮지 않습니까? 물론 상대적인 어려움도 있고, 힘은 들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풍요를 주셨으며, 얼마나 넉넉함을 주셨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은금패물까지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도 잠시였습니다. 홍해 앞에서 막히고 말았습니다. 홍해를 건널 수단이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에집트 정부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히브리 노예들을 보내주었지만 너무나 애석했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노동력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바로 히브리 노예들이었는데 이들을 보내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던 차에 이 소식을 들은 이집트 정부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다시 잡아서 노예살이를 시키려고 추격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민족들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이집트 군사들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동안의 감격, 기쁨 그리고 감사는 언제 있었다는 듯 다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절망과 원망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10-11절).. 자유를 주겠다, 해방을 주겠다고 하더니 이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차라리 에집트에서 종노릇 하겠다고 할 때 그대로 두지 왜 끌고 와서 지금 이 모양, 이 일을 당하게 하느냐? 라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떤 모습인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좋을 때는 “고맙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조금만 힘들고 어렵고 덜 도와주는 일이 있으면 섭섭하다하고 아우성치고 탄식하는 존재, 바로 그런 것이 가장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수천 년 전 노예근성이 있었던 히브리 노예들뿐만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려움을 풀기 위해서 애쓰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든 자기는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자기는 책임이 없는 것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위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 여러분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든지 전가시키려고 합니다. 자식이 못마땅하거나 조금 잘못 되었을 때, 당신이 자식을 이렇게 키웠다고 아내에게 탓을 돌리기도 합니다. 경제가 다 어려운데 남편 혼자 어떻게 무서운 폭풍을 헤쳐 나갈 수 있겠습니까? 살다보면 실직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는데 이것을 다 남편에게 책임을 돌리고 원망하면 어떻게 합니까? 모두 다 어려울 때 함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힘들어하고 미안해 할 때면 아내는 내 책임이고 내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저 원망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본래적인 모습,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인간 모두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백성, 그리스도인들, 기독교 신자들은 이런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기 위해서, 그 사람들을 통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내가 세상 중에서 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는 에크와 클레시아의 합성어입니다. 에크는 영어 아웃 오버(out over)로 무엇으로부터 끄집어낸다는 것이고 칼리오라 하여 영어로는 콜(call)이라는 말로 불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불러냈다는 것인데 불러내어 비록 몸은 세상 사람들과 세상에서 함께 산다고 할지라도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소를 따로 주었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살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내가 선택한 이 사람들은, 내가 교회로 부른 이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갈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중에 갈 길이 다르기 때문에 이 세상 살아갈 때 사는 모습이 다르고 삶의 기준이 다르고 삶의 목적이 다른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내가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고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삶의 모습이 다릅니다. 나도 힘들지만 다들 힘들어서 아우성칠 때 든든하게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나도 모자라지만 내 주머니를 열어서 나보다 더 모자라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 바로 기독교인, 하나님의 사람,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목표가 다릅니다. 

어떻게 하든 나만, 우리만 생각하는 이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하나님이 좋아하는 참된 의의, 참된 가치, 진리는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삶의 목표, 삶의 중심축이 다릅니다. 내가 아니고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고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중에서 힘들고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 나와 얼굴 색깔이 다르고 말도 다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힘든 사람들, 어떻게 하면 그 힘든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판단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행복기준과 기독교인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나중은 내가 다 책임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은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내가 너무 좋아하면 다른 사람들은 힘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갔을 때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랑하고 싶습니까? 그래도 좋지 않는 일,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위해서 참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종 위대한 사도바울은 일체의 비결이라고 했습니다. 힘들어도 그러려니 하고 그냥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옹지마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변방에 살던 할아버지에게 말 한 마리가 있었었는데 어느 날 없어졌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재산이었으므로 이웃들이 위로하였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그럴 수도 있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갔던 말이 결혼해서 말을 하나 더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축하했습니다. 그때도 할아버지는 “그런 것이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 낙마를 해서 장애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온갖 소리를 다했습니다. “말이 있다 보면 또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다른 집의 성한 아이들이 전장에 나가서 여기저기서 사망소식을 듣는 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영감님은 얼마나 큰 복이십니까?”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예, 그런 것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새옹지마는 내가 넉넉하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계시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말 한 마리를 잃었다고, 말 한 마리가 더 생겼다고, 내 아들이 다쳤다고 또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다 있다는 것을 압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각별하신 은총으로 챙겨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조금 힘들어도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좀 섭섭한 일, 오해 받는 일이 있어도 넉넉하게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해를 받아도 세상 사람들처럼 하는 것이 아닌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실 것이므로 좀 오해를 받아도 하나님께서 풀어주실 것이고 힘든 일이 있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누가 주었는가? 독립군이 있은 것도 아니고 독립운동을 위해서 힘쓴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누가 해방시켜주었는가? 외국의 어느 나라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힘쓰고 애썼는가? 전적으로 나 하나님이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스라엘이 해방되기 한참 전에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내려가려 하노라 라고 미리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하나씩 하나씩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한 것도 아니고 이집트 정부나 바로가 마음이 좋아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모세에게 다 준비했으니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인도했는데 지금 죽겠다고 아우성 치고 탄식하고 한탄할 것인가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은금패물들을 많이 얻어 나왔는데 어떻게 얻었는가 말씀하십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충성했다고 에집트 사람들이 주었습니까? 여러분, 노예가 충성했다고 은금패물을 줄 것 같습니까? 이것도 다 나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한참 전에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패물과 금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얻게 될 것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동시켜 에집트 사람들이 다 가지고 가라고 내어주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민족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뒤에 에집트 군사들이 쫓아온다고,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어렵다고 탄식하고 있는가 말씀하십니다. 

안 보일 때는 힘들고 찬바람 불 때는 춥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는 정말로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힘든 그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그 쪽만 보느냐? 저 위를 보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내가 병을 고치지 못하느냐, 기업을 세우지 못하느냐, 사람을 살리지 못하느냐, 이 하나님, 내가 있지 않는가?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이제 오늘 우리들에게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 히브리 민족들이 서 있었던 홍해에 서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앞에도 길이 없고 뒤에는 에집트 군사들이 절박하게 쫓아오는 그 자리에 서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생각해보라 여러분들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한번 서보십시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고 뒤에는 적들이 그 간격을 좁혀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여기에 대한 답을 모세를 통하여 주십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3-14절)..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쳐다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시는데 여러분이 나가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기적을 주셨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해방을 주셨고 꿈도 꾸지 못한 수많은 은금 보석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제가 30년 전에 미국에 갔을 때를 생각합니다. 롱비치에 갔을 때는 넓은 길을 보고 감탄했고, 포틀랜드에 갔을 때는 넓은 길고 고속도로 변에 있는 휴게소를 보고 또 감탄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 미국보다 못합니까? 휴게실이 얼마나 좋으며 길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때 미국의 슈퍼마켓에 갔을 때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건이 팔리지 않아 몇% 세일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그것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홍해의 기적을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다 여기까지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은 나중에 하셨고 그 전에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바다를 열어주시기 전에 혹시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 군대에게 잡힐까 염려하여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요청하지 않는 일까지 챙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끌던 구름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에집트 군대 사이에 서서 에집트 군대는 깜깜해서 보지 못하도록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볼 수 있도록 환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19절부터 그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19-20절).. 얼마나 자상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얼마나 완벽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이런데도 힘들다고 탄식하고 있겠습니까? 한탄하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하나 하나 챙겨주시는 자상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홍해를 가르고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놀라운 기적을 주신 그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 기적을 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혹시라도 너무 겁을 먹을까봐, 혹시라도 이집트 군인들에게 해를 당할까봐 일일이 챙기시는 그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전부다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다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 전에도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하나 챙겨주실 것입니다. 타임스케줄을 만들어 일일이 적어두신 후 하나하나 챙겨주실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다 놓고 여러분은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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