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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평가 (대상 9: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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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평가 (대상 9:28~34)  

 
지난 주 어느 신문에 러시아 정교회 소속의 자코프라는 사제가 스탈린을 성자의 대열에 포함시켜 논란이 되었습니다.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사제가 되기를 포기했지만 신학교에 입학해 11년간 성직자 수업을 받았답니다. 2차 세계 대전 전까지 러시아에 교회가 1만개 이하였는데 전쟁 후에 스탈린에 의해 2만 5000천개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자코프 사제는 스탈린의 이런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를 성자의 대열에 포함시켰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대주교측은 스탈린을 신봉하는 일부 사제가 실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련의 역사를 보면서 스탈린과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평가자가 누구냐에 따라 사탄과 천사만큼 큰 차이가 납니다. 폭정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죽자 많은 소련인들이 슬퍼했습니다. 그들은 스탈린이 소련을 세계가 주목하는 강한 나라로 끌어올린 지도자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탈린이 강요한 희생보다 그들에게 심어준 자부심을 더 높은 평가 기준으로 본 것입니다. 

서방 세계 사람들의 평가 기준으로 본다면 스탈린보다 고르바초프가 훨씬 좋은 지도자입니다. 고르바초프는 억압의 족쇄를 풀고 자유를 준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이 냉전 시대를 끝냈지만 자유와 함께 혼란과 궁핍, 그리고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쪼개지는 가운데 수치스럽고 가난한 모습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고르바초프를 존경하지 않는 것같습니다. 

사람들은 사건이나, 사람, 사물을 평가할 때 대부분이 자기 중심적인 기준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자기에게 유익한가, 편리한가, 기쁨을 주는가 하는 주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상대적이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길이를 재는 ‘자’는 모든 사물을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크기를 중심으로 평가합니다. 자의 기준으로 볼 때 모든 사물의 가치는 크고 작음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무게를 재는 ‘저울’은 무게를 중심으로 평가합니다. 저울의 기준으로 볼 때는 모든 사물의 가치는 무게의 많고 적음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평가할 때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주관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사건과 사물을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평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실까요?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기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하시면서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외형보다 그 사람의 품고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런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을 평가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역대상 9장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부분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멸망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처참한 포로 생활을 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 생활을 하면서 초기에는 비참한 노예 생활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바벨론 사회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는 바벨론의 지도자로 세워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느헤미야, 다니엘, 에스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총리도 되고 권력의 중심의 자리에 앉기도 했습니다. 에스더는 바벨론 왕 아하수에로왕의 왕후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에서의 이민 초기에 하와이에서 사탕 수수밭에서 일을 하며 온갖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민 생활이 길어지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1.5세, 2세, 3세들이 미국 사회에 자리를 잡아 각 분야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바벨론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소망하던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해도 좋다는 허락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에스라와 같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막상 바벨론에서 70년간 생활하며 닦아 놓은 삶의 자리를 정리하고 황폐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동참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것도 어려움이지만 자신이 바벨론에서 지금까지 쌓아 놓은 부와 명예, 그리고 안정된 가정과 일터를 내려 놓고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예루살렘이 살기가 좋은 곳이고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보장된 곳이라면 잠시 고생이 되더라도 기꺼이 응하겠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은 고생과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정치적으로 불안정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밑바닥 상태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은 포로생활에서 해방되는 환호와 함께 일어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자신의 희생을 결단하고 일어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의 재건을 소망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소망하며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방향을 향해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해방을 사모하며 율법을 철저히 연구하고 지켰습니다. 그러나 막상 해방이 선포되었을 때 자신들이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닦아 놓은 삶의 기반을 뒤로하고 험난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2백만명 정도였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 가운데 4만 5천명 정도만이 1차, 2차, 3차 귀환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전체 인구수로 보면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한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자신의 삶의 자리를 희생하며 일어선 그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에스라 2,3장에 그리고 7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7장에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담겨 있는 역대상 9장에도 그 일부의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으로 구별된 사람들을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하시며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를 동경하고 사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뤄지는 것은 단지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를 위해 헌신을 결단하고, 작은 일이지만 성실함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집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곳이고 이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나라가 이뤄지는 것은 말에 있지 않고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집니다. 

교회는 자신은 봉사하지 않고 교회를 위해 헌신을 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교회는 힘이 없고, 성장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교회안에 말하기 보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사람이 많으면 교회는 힘이 생기고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평가의 기준은 말이 아닌 헌신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람들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평가 기준에 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이 아닌 헌신과 섬김의 평가 기준에 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삶이 하나님의 평가의 기준에 합한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또 다른 평가 내용을 하나 더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담겨 있는 역대상 9장을 읽어보면 특별한 내용이 없어 보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던 백성들의 명단을 각 지파와 가문의 대표자들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9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눈여겨 보면 31절에 특이한 것이 하나 나옵니다. ‘고라 자손 살룸의 장자 맛디댜라 하는 레위 사람은 남비에 지지는 것을 맡았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롭게 번역된 개정판 개역 성경에는 ‘고라 자손 살룸의 장자 맛디댜라 하는 레위 사람은 전병을 굽는 일을 맡았으며’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9장을 읽어보면 한 사람의 이름과 직무를 한 구절에서 직접 연결해 ‘아무개가 이런 일을 맡았다’고 말한 것은 맛디댜가 유일합니다. 맛디댜는 성전에서 사용하는 전병을 굽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전병을 굽는다는 것은 그 일이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특별히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본문에서 성전에서 봉사한 레위인들에 대해 기록하면서 특별히 맛디댜가 전병을 굽는 사람이었다고 강조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맛디댜를 이렇게 기록한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맛디댜가 일을 하는 모습을 보시고 그의 중심을 기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에 참으로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맛디댜는 전병을 굽는 일을 성실하게 했습니다. 사람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같이 성전에서 섬기는 레위인인데 누가 문지기를 하고, 기구를 나르고, 제사 도구를 관리는 일을 하고 성전 뒤편에서 일을하고 싶겠습니까? 누가 제단의 불을 관리하고 제단에 사용하는 떡을 굽는 일을 평생하고 싶겠습니까? 레위인으로서 성전에서 일을 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보란듯이 제사를 집례하고 성전에서 하는 일 가운데 핵심적인 일을 하고 싶지 누가 허드렛일로 여겨지는 일을 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맛디댜는 자신에게 주어진 전병을 굽는 일을 성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 한 사람이었던 것같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일에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 맛디댜를 하나님은 기억하신 것입니다. 

역대상 9장의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맛디댜만이 아니라 상식에 어긋나는 기록이 보입니다. 제사장에 대한 기록은 10-13절에 나옵니다. 4절의 분량입니다. 레위인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에 대한 14-16절에 나옵니다. 3절의 분량입니다. 

그런데 성전 문지기에 대한 기록은 17-27절에 거쳐서 나옵니다. 문지기에 대한 기록이 11절의 분량에 거쳐 나옵니다. 문지기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더 많이 분량을 할애한 것은 문지기의 역할이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의 일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하는 일보다 성전 문지기의 역할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 그 역할을 강조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직분의 크고 작음, 맡은 역할의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얼마나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감당하느냐를 보심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평가 기준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2008년도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맛디댜처럼 성실하게 헌신적으로 섬겨 오셨습니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교사로 교회학교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나오고 한 두 시간 늦게 돌아가면서 귀한 찬양을 부르는 성가대원으로 섬겼습니다. 주방에서, 화장실에서, 새벽에 교회 관리로 섬겼습니다. 구역 지도자들은 구역 식구들을 정성껏 돌봤습니다. 제직회 부서장으로 열심히 섬겼습니다. 일을 해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없지만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 말없는 섬김들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며 우리교회가 2008년도에 여러 분야에서서 성장했습니다. 맛디댜를 기억하신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여러분들의 섬김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지난 주에 여러분에게 2009년도에 교회 여러 분야에서 섬길 분들을 세우기 위해 봉사 신청서를 나눠 드렸습니다. 모든 성도님들께서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던 사람들의 마음 가짐으로 봉사 신청에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맛디댜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전병을 굽는 일이지만 그 일에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임하는 모습을 흠모하며 봉사 신청에 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귀하게 성장하는 것은 다른 교회 성도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의 헌신과 섬김에 의해 이뤄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가 귀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성장시키라고 우리들을 교회의 지체로 세우셨습니다. 교회의 성숙한 성장은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지체들의 믿음의 헌신과 섬김에 의해 이뤄집니다. 맛디댜와 같은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봉사와 헌신을 다짐하는 성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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