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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는 사람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마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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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마 5:10~12)


오늘은 팔복의 마지막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받을 복”에 관해서 상고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시고, 곧 이어서 “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마음에 평안을 누리고,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사는 것을 보고 복 받은 삶이라고 말하지,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복 있는 삶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신앙의 원칙을 말해 줍니다.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을 두려워하면 주님을 올바로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첫 번째로,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봅시다.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크게 몇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결과로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이나 절도나 사기죄를 저질러서 옥살이를 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난은 범죄에 대한 징벌로서 ‘의를 위해 핍박 받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둘째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도박을 해서 경제적으로 파산한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또는 지나친 음주나 흡연으로 인해 건강을 해친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난도 ‘의를 위해 핍박 받는 것’과 거리가 멉니다. 

셋째로, 의로운 행위를 했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뇌물 청탁을 거절했기 때문에 상관의 미움을 받아 좌천된 경우가 여기 해당합니다. 또는 불난 집안에 있는 사람을 구하려다가 부상을 입은 것도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고난은 의로운 행위로 인한 고난이긴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핍박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핍박은 곧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핍박을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욕을 해도 마주 욕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불의한 방법을 사용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불의하게 살지 말라고 명하셨으므로. 손해를 감수하는 편을 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돈벌이가 된다고 아무 일이나 할 수 없습니다. 직업이 돌을 다듬는 석수라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상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합시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만일 그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상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거절할 것입니다. 물론, 그로 인해 그는 돈을 벌지 못할 것이지만, 그 편을 택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의를 위해 핍박 받는 것”에 해당합니다. 

입시철이 되면 대학입학시험과 관련된 부정행위가 신문에 보도되곤 합니다. 모든 학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간혹 실기 시험을 치르는 학과의 경우에 채점을 담당한 교수에게 뇌물을 주면 합격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불합격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전에 어떤 믿는 학생이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시험을 쳤다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이 부정한 돈을 주고 합격되기 보다는 억울하지만 떨어진 것이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에 해당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불리한 때가 적지 않습니다. 상관이 술을 좋아하는데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술시중을 들지 못하므로 점수를 못 받아 승진이 늦어질 경우가 있습니다. 이 역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집안에서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핍박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그리스도인이고 남편이 불신자인 경우나 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마는, 불신 배우자로 인해 핍박 받을 때가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믿는 아내는 교회를 가겠다고 하고, 믿지 않는 남편은 야외로 놀러가지고 합니다. 교회를 가려면 남편의 핍박을 감수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의를 위해 핍박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는 가벼운 핍박에 해당합니다. 초대교회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앙 때문에 국가 공권력에 의해서 핍박을 받아서 옥에 갇히거나 순교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를 비롯해서 열 명의 황제가 근 250년에 걸쳐서 기독교를 핍박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해서 원형경기장에 세워놓고 굶주린 사자들을 풀어 놓아 잡아먹게 하였는가 하면, 산채로 기둥에 묶어 놓고 불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신앙 때문에 집과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회적인 신분을 박탈당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당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서 예배드렸던 지하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의 선배들 가운데는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옥고를 치르거나 순교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이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들입니다.

2006년도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41세 된 아프카니스탄 사람 압둘 라흐만은 16년 전에 난민을 구호하는 국제기독교단체의 일을 돕다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그가 누리는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개종한 사실이 발각되어 탈레반 정권에 의해 추방되었다가 텔레반 정권이 무너지자 2002년에 고향 카불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 그의 가족들이 배교자가 돌와왔다고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압둘 라흐만은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판사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의 법에 의하면,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게 되어 있지만, 압둘 라흐만은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내 믿음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쯤은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미국을 비롯해서 서방 국가들이 아프카니스탄 정부에 압력을 가해서 그는 증거불충분으로 소송이 기각되었고 해외로 추방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의를 위해 핍박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사실이지, 사람치고 불이익과 고난을 받으면서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매를 맞으면 당장 몸이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신음을 내뱉고 원망을 하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떤 종류의 고난은 기쁨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고난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난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위해 고생하는 것을 즐겁게 감당하는 것은 자기의 고생으로 인해 자녀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때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난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위대한 고난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욕을 먹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결코 기뻐할 일이 못되지만,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한다면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욕을 먹고 비난을 받는다고 해서 다 불행한 것이 아니라 실은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복 있는 사람이라는 표시와 같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므로 복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하였을 때, 이를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사도들을 체포하여 공회 앞에 새우고 묻기를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사도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하기를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건강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자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불러 말하기를 “앞으로는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고는 석방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매일같이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수천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사도들을 체포해서 다시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담대하게 대답하기를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크게 노해서 사도들을 죽여 버리려고 했으나,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교법사 가말리엘의 권면을 받아들여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석방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도할지라도 경찰서에 잡혀가지 않는 신앙의 자유, 포교의 자유를 누리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수님을 전하려면 핍박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체포되고 욕을 먹고 채찍질 당하고 협박을 받았으나 슬퍼하거나 원망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 보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들이 핍박을 기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받은 핍박은 곧 그들이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나타낸 것과 같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기 위해 을사늑약을 맺을 때, 이를 도운 다섯 사람 곧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가리켜 매국노라 또는 을사오적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제로부터 높은 관직과 막대한 돈을 받아서 떵떵거리면서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그들의 영달을 부러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히려 그들을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역사책에 지울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 받은 자들로서 천국의 열두 진주 문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일로 핍박을 받게 되거든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를 받은 것에 대하여 사도들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복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 이하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두 사도의 발에는 착고가 든든히 채워졌습니다. 매 맞은 자리가 얼마나 아팠을까요?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귀신 들렸던 한 여자를 고쳐준 것밖에 없는데, 칭찬은커녕 매를 맞고 옥에 갇혔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런데 두 사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에 보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증언합니다. 

두 사도는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을 억울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죄수들을 묶은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간수가 졸다가 깨어나 이 광경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만류하여 살렸습니다. 그 밤에 간수가 회개하고 그의 온 가족과 함께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두 사도가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을 감수했더니,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위로를 그들의 심령 속에 부어주셨고, 위대한 이적과 구원의 역사를 체험케 해 주셨습니다. 그런즉 주님을 위해 받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신 대로,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고 나아갈 때 어떤 핍박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가 받을 복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받을 상을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세상에 사는 동안 상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 가서 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땅위에서의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언젠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사람의 수명은 70을 기준으로 해서 강건하면 80이고, 더 장수하는 사람은 백세까지도 살지만 그런 사람은 손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줄로 생각하고 내세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월이 감에 따라서 우리의 몸과 정신은 약해져 가지만, 의를 위해 살아가는 성도들은 겉 사람은 낡아져도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욱 강렬해지고 뚜렷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리고 일평생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나서 노년에 이르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 

이처럼 그는 주님께서 주실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을 소망이 있었기에 온갖 고난과 핍박을 마다 않고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라톤 선수가 42.195km에 달하는 코스를 완주해야 상을 받듯이, 우리도 이 땅에서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달린 후에 심판관이신 주님 앞에서 상급을 받게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핍박이 다가올 때 겁을 먹고 뒤로 물러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험이 다가올 때 세상과 타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안일함에 마음 빼앗겨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핍박이 다가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기쁨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에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크고 어렵더라도 천국에서 받아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이 없다”는 말과 같이, 주님을 위해서 받는 핍박은 장차 받을 면류관에 대한 보증과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있으십니까? 기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핍박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복 있는 사람으로서 천국을 소유하게 되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천국”은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복락을 누리는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에게만 핍박이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신약의 사도들과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같이 핍박을 경험했습니다. 그런즉 오늘 이 말씀을 경청하신 성도님마다 믿음 위에 견고히 서시고, 항상 깨어 기도하시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셔서 능히 핍박을 이겨내고 영광스러운 천국을 상속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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