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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믿는 하나님은... (삼상 17: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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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하나님은... (삼상 17:41~49)


지난 시간 우리는 삼상 16장에서 반복해 나오는 ‘버리다.’와 ‘택하다’라는 동사를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히브리어로 ‘마아쓰’와 ‘바하르’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버리고 선택하는 데에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삼상16:7절에서는 그 원칙을 ‘사람의 중심’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중심을 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중심’이란 마음(heart)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심을 가꾸어야 합니다. 

유리거울을 들고 외모를 치장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들고 중심을 가꾸어야 합니다. 

딤전2:9-10절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려면 중심을 가꾸어야 합니다. 

딤후 2:2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어 삶이 지루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중심을 가꿔야할 시간입니다. 
도대체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원망하십니까? 
중심을 가꿔야할 시간입니다. 

오늘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블레셋 장군인 골리앗과 목동 다윗과의 싸움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윗은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그의 이름이 온 이스라엘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본문을 읽을 때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골리앗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간단히 설명하고 있는 반면 그의 신체와 무장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상세히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골리앗의 인적사항을 봅시다. 
4절 “싸움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것으로 끝나요. 
그러나 그의 신체와 무장 상태에 대한 설명을 보세요. 

5-7절 “그의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 다리에는 놋 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상당히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골리앗이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해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특징은 이름을 기록한 데에서도 나타납니다. 
삼상17장에서 골리앗의 이름은 2회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4, 23절이지요. 
그러나 다윗의 이름은 30회나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히 호칭 이상, 그 사람의 내면적인 자질 곧 인격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겉으로 대단해보여도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을 가진 사람은 대단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계산에 의하면 골리앗의 키는 290센티가 넘습니다. 
그가 입은 놋 갑옷은 57 킬로그램에 달했고, 창날의 무게만도 7킬로그램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골리앗의 모습은 다윗의 연약한 신체 조건과 미미한 무장과 대조를 이루어 그만큼 다윗의 승리를 극적으로 만듭니다. 

누가 보아도 다윗은 골리앗을 이길 재목이 못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볼 때도 골리앗이 강자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볼 때도 골리앗이 강자였습니다. 
아무도 다윗이 골리앗을 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이 승리를 장담했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실제로 다윗이 승리한 것입니다. 

오늘 저가 관심하고 있는 것은 다윗이 승리한 비결입니다. 
다윗이 승리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다윗이 승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①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의식이 분명했기 때문이고. 
② ‘내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하나님 인식이 분명했기 때문이고, 
③ ‘이 상황을 누가 관리하고 있는가’라는 상황인식이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의식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37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윗은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거꾸로 매달아놓아도 죽지 않는다.’라는 자의식이 분명했습니다. 

“봐라. 사자의 발톱에서도 나는 살아나지 않았는가?” 
“봐라. 곰의 발톱에서도 나는 건짐을 받지 않았는가?”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의 자의식을 비교해보면 다윗의 자의식이 얼마나 탁월한지 그 차이를 알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군대를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부릅니다. 
26절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36절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다윗의 눈에는 자기 군대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보질 못했습니다. 
“창도 칼도 없는 군대가 무슨 얼어 죽을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 골리앗 앞에서 떨고 있는 겁니다. 
11절 “사울과 온 이스라엘 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본문에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실제 싸움 장면은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48,49절 두 절 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윗과 골리앗이 주고받는 설전은 41-47절까지 무려 8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투를 소개하려면 전투장면을 많이 써야 하잖아요? 
그렇잖아요? 
두 사람의 설전을 많이 소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싸움 자체보다는 다윗과 골리앗의 설전에 나타난 그들의 영적인 차이를 부각시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과 골리앗의 말 속에서 그들의 영적 차이를 확인해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의지하는 골리앗은 의당 질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은 의지하는 다윗은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가? 

저는 강원도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강원도는, 지금은 다르지만 예전에는 대부분의 길이 고갯길이었습니다. 
눈이 많이 온 겨울이었는데 고갯길을 오르던 버스가 시동이 꺼지고 뒤로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옆에는 낭떠러지입니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금방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소리를 지르면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야단입니다. 

그런데 차 뒤에 앉아있었던 저는 아무 두려움이 없었어요. 
평안했어요! 

슬그머니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당신들, 오늘 운 좋은 줄 아세요. 나 때문에 당신들이  죽지 않은 거요’ 

어디서 그런 믿음이 생겼는지 몰라요. 
얼마나 그 생각이 강열했으면 지금도 그 때의 생각을 기억하겠습니까? 
목동 다윗에게도 이런 자기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의식이 그의 삶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2. ‘내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하나님 인식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4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여기 보십시오. 
다윗은 지금 골리앗이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고, 자기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골리앗은 외적무장에 의지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반면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하나에 의지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고백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란 이름은 사무엘서에 처음 등장하는 표현( 1:3, 1:11, 4:4, 15:2 등)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란 영어표현으로 ‘Lord Almighty'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능력은 외적으로는 우주 끝까지 미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내적으로는 영혼 가장 깊숙이까지 미칩니다. 
다윗이 물맷돌만 가지고 전장에 나간 것은 물맷돌의 위력을 믿었거나, 물맷돌을 다루는 자신의 기술을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이렇게 비무장상태로 전장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갖 난관 중에서 경험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편46편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2-3절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 지라도 우리는 두려워아니하리로다.” 

7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여러분, 인생사에서 이것보다 더 위급한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매 주일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 첫머리가 무엇입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나요? 
아니면 매주일 하나님께 립 서비스를 하고 있나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달라져야 하지 않나요?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막대기와 물맷돌 몇 개를 들고 전장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복음성가 - "예수 이름으로"
 

3. ‘이 상황을 누가 관리하고 있는가’라는 상황인식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47절을 읽어봅시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주권과 땅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삼상 2장에서 한나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삼상2:6-7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주체가 누굽니까? 
음부에 내리기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주체가 누굽니까?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주체가 누굽니까? 
낮추기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주체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난리 법석을 떨어도 하나님이 OK하시면 OK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NO하시면 NO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옛날 골리앗을 이기게 했던 다윗의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대적이 우리 앞에 있어도, 아무리 거대한 문제가 우리를 덮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상 승리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많은 환난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나약함이 드러날지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의식을 분명히 하십시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하나님 인식을 분명히 하십시오. 
‘이 상황을 누가 관리하고 있는가’라는 상황인식을 분명히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반드시 이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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