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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만 바라봅시다 (사 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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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사 40:1~11)


지난 주말은 몹시 추웠습니다. 주변에 감기 환자들이 꽤 많이 보입니다. 여러분도 감기에 조심하십시오. 목요일 금요일에는 당회를 준비하기 위하여 우리교회 장로님 아홉분과 저는 덕산 온천에서 새벽 4시가 가깝도록 회의를 하였습니다. 교회 전반에 대한 의견 교환과 새해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저녁 회의를 시작하기 전 거기서 아주 가까운 수덕사를 둘러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꼭 40년만의 발길이었습니다. 1968년 대학 2학년때 당시 수덕사에 머물러 계시어 유명하였던 일엽스님을 만나 보겠다고 몇몇 친구들과 수덕사를 찾았던 그때의 일을 떠올렸습니다. 신학생으로의 열정과 꿈으로 가득차 있었던 그때의 모습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40년이 지나 환갑이 넘은 목사의 모습은 스쳐지나가는 낙엽이 다 떨어진 겨울나무 같아 왠지 초라하고 허무한 마음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기분이 묘한 시간이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기 전 시인 황지우님의 ‘겨울나무에서 봄 나무에로’라는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겨울나무에서 봄 나무가 되는 일이 얼마나 치열하게 이루어지는가를 시인은 생생하게 그려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피어난 꽃도 얼마 가지 못하고 허망하게 떨어지고 맙니다. 겨우내 몸부림치며 피어낸 꽃망울을 어떻게 그렇게 허망하게 떨구어 내고 마는 것입니까? 아무리 화려한 꽃도,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아름다운 꽃도 불과 며칠 가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은 단지 꽃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 이야기입니다. 

왜 그리 허망하게 시들어지는 것입니까? 하지만 허망해 할 것만 아니라, 그런 우리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겨울을 맞는 우리들에게 오늘로 주시는 말씀 안에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풀처럼 마르고, 꽃처럼 시드는 우리의 인생을 어찌해야 할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지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깨우치심과 감동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본문은 우리 인생의 유한성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그 한복판에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끼워 넣듯이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사야서 전체의 흐름을 보면, 이사야서의 전반부는 심판과 멸망, 진노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계속하여 이스라엘의 멸망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던 그들은 정말 그렇게 바벨론에 의해 멸망 되었고, 그들은 포로로 붙잡혀 가서 긴 노역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희망을 노래할 수 없는 긴 겨울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떨어야 했던 역사의 깊은 밤을 경험합니다. 

긴 시간, 긴 아픔의 한겨울을 인동초와 같이 견디며 달려온 그들에게 이사야 40장으로 들어오면 분위기와 음조, 억양도 달라지면서 갑작스런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을 불러 세우신 다음, 1절에서는“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 메시지를 전할 때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고 2절은 권면합니다. 사함을 얻는 백성들의 기쁨, 그것이 얼마나 놀랍게 펼쳐지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메시지와 함께 3~5절에서는“여호와의 길”이 표현되고 있는데, 완벽한 구속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유명한 메시아 예언입니다. 사막과 같은 삶에 지금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와 함께 대로가 평탄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희망과 기쁨, 생명을 말합니다. 

그런 흐름 가운데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위로의 메시지가 들려오는 그 한가운데서 6~8절의 말씀을 보면 불쑥 죽음의 메시지가 들려옵니다.“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심판이 끝났다는, 하나님이 용서하시겠다는 메시지가 들려지고, 하나님의 종에게는 가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전할 말씀까지 주신 다음에 갑자기 죽음을 예견하는 메시지가 삽입되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그래서 사막에 길을 낼 것이라고, 완전한 구원을 이룰 것이라고, 너희를 내 백성 삼을 것이라고 깊은 구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10,11절에서 여호와의 구원의 메시지를 이렇게 들려줍니다.“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하였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5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예언으로, 그리고 54장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55장에서는 하나님이 베푸실 긍휼에 대해서, 56~66장에서는 회복된 예루살렘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삶의 모습을 묘사하고, 65장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약속해 주십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구원의 메시지, 위로의 메시지가 들려지는 한가운데 존재의 패망과 시들어짐을 말합니다. 왜 여기에 그 말씀이 들어오는 것입니까?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네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부터 계속해서 강조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의 하나님이 가라사대”,“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지금 이 말씀을 주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강대국에 의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이 선명하게 선포됩니다. 흥망성쇠가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5절에서는“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7절에 시들고 마는 것도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구원의 역사를 준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요,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시작이 어디에서 시작되는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 그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누가 주인인지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인데, 주인과 구세주로 영접할 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간다는 것은 결과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바로 주인을 바꾸는 것, 바로 삶의 주권을 바꾸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겨 부르는“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라는 찬송은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게 합니다.“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삶의 현장 속에서 지금까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을 주인으로 인정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언젠가 학생들과 설교학 교실에서 요한복음 21장을 묵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이끌려 살기도 하고, 본질에 이끌려 살아가기도 합니다. 부활 후 주님은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이끌려 이 날까지 달려왔고, 지금도 그것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부르심을 받고 나아왔으나 정작 그들을 불러 주신 예수님에게 사로잡히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사로잡히게 되니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 꼬여가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였으나 헛수고였고, 허망하게 돌아섰던 제자들이 새로운 눈으로 예수를 만나게 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고기 잡는 일에 온 마음을 두고 있는 제자들의 삶은 아무것도 없는 텅빈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물을 내렸더니 배에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던 제자들은 이제 눈앞의 현상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사로잡혀 이끌려가는게 됩니다. 밤새 잡으려고 그렇게 애썼던 고기를 내려놓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 물로 뛰어들었던 그들이 영원히 섬길 분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드라마 같은 이런 장면을 연상하며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함께 15분 가까이 묵상한 다음 몇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나누도록 했습니다. 두 학생이 나와서 발표를 하고 세 번째 학생이 나왔습니다. 50대 중반의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말을 하려다가 복바쳐 오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하려고 하면 눈물이 나오고, 가까스로 안정을 하여 또 말을 하려고 하면 눈물이 터져 나와 거의 5분 가까이를 기다려야했습니다. 

한참만에야 진정하고 꺼내놓는 말은 이러하였습니다.“지금까지 엉뚱한 것을 붙잡고 밤을 지새우고, 내 경험과 지식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오늘 선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50대 중반의 학생, 현직 중소기업체의 CEO로 일하면서 신학대학원 2학년 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이제는 주인 행세하며 살았던 모습을 내려놓으려고 한다는 그 학생의 고백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지금껏 자기가 주인인 줄 알고 살았고, 자신이 마치 대장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엉뚱한 것 붙잡고 살아왔던 세월, 그것을 내려놓기까지 그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그들에게 그것을 깨우치고 계셨습니다. 네가 주인이 아니다! 구원의 복음과 함께 들려진 말씀은 그것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내가 주인이 아니다! 고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또 한 가지 깨우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꽃은 시든다, 풀은 마른다. 이것은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만물의 유한성을 표현한 것이라면 거기에서 중요한 것 하나를 강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성과 불변성입니다. 모든 것은 시들고, 모든 것은 변하고, 모든 것은 마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구원의 메시지는 변함이 없으며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역사는 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700년이 지난 후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통해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오늘에 우리에게 그 구원의 소식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습니다. 오히려 꽃은 시들면서, 풀은 마르면서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시들어갑니다. 짧은 시간,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화려하게 피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맘껏 드러내고 시들어가면서 이것을 드러냅니다. 

매서운 바람에도, 그 추운 눈보라 속에서도 꽃을 피우기 위해 참고 참아왔던 그 오랜 인고의 시간들을 잊어버린 듯 꽃잎을 떨구면서 외치고 있습니다. 이젠 임을 위한 노래가 끝났으니 한점 망설임도 없이 스스럼없이 자신을 내려놓으면서 외치고 있었습니다. 뭇 눈길과 발길 멈추게 했던 순백의 아름다움에도, 눈부신 우아함을 가졌어도 자신이 결코 주인이 아님을 드러내며 눈길을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님을 깨우치며 외치고 있습니다.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아름답게 하신 그분을 보라. 아낌없이 떨구어내는 그곳에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 들려온다.“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과 감탄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생명을 위해서 살아라. 영원히 살 것이 아니고, 영원히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생명을 위해서 살아라. 이 생명의 소식을 전하면서 살아라. 하나님의 종에게,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에게 9절은 그것을 권면합니다.“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살아 있는 동안, 생명 있는 동안 너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으로 맘껏 생명의 주인을 드러내며 살라고 권면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 교회에 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미국의 웨렌 목사는 복음전하는 일과 아프리카 빈곤 문제와 에이즈 퇴치를 위해서 올인하고 있는 분입니다. 그가 그런 귀한 사역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배후에 훌륭한 부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그의 부친은 생전에 교회만 150개를 세웠다고 합니다. 은퇴한 후에 암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는데, 힘들게 투병하는 시아버지를 찾아가 자부가 그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아버님, 원하시는 것이 있으세요?” 거친 숨을 내쉬면서 가까스로 토해 놓는 이야기는 그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한 명이라도 더…….” 
“한 명이라도 더.”를 거의 100번 가까이 속삭이듯 외치고 운명했다고 합니다. 

꽃피는 호시절에 들려주시는 말씀, 꽃이 지는 시절에 들려주시는 말씀, 생명의 세계를 위해서 살아라. 영원한 것을 붙잡고 살아라. 네가 이룬 그것에 취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라. 꽃은 시들고 풀은 마른다. 네 짧은 인생에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강림절을 지내고 있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는 과연 무엇을 기다리고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너희 하나님을 보라’하라’(9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에게 기대를 걸고 살아가십시오. 세상을 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그렇습니다. 그 주님을 사랑하고 그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하셨으니 영원한 것을 바라 보고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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