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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에 매여 산다는 것 (행 20: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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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매여 산다는 것 (행 20:22~27)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20세기 최고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그가 한 때 14살 연상의 여인 ‘루 살로메’를 뜨겁게 사랑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불같은 사랑을 시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눈빛을 가려 주십시오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 그래도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걷지 않고서도 당신에게 갈수 있고 입 없이도 당신에게 약속할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당신 손으로 꺾어 주십시오 그래도 내 가슴으로 당신을 잡을 수 있습니다 
내 심장을 도려내 주십시오 그래도 내 뇌는 당신을 향해 뛰놉니다 
당신이 내 뇌 속에 불을 놓으신다면 내 핏속으로 당신을 실어 나를 것입니다  

릴케는 이 시의 제목을 [사랑의 포로]라고 붙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온통 그대뿐입니다. 가슴 속에도, 머리 속에도, 심지어 피 속까지도 온통 그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철저하게 그대를 향한 사랑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던 릴케도 시간이 지나자 달라졌습니다. 점점 그 마음이 루 살로메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다른 여인과 결혼하게 됐습니다. 불같던 그 사랑도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그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그 사랑에 매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포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오래도록 지속되기가 어렵습니다. 영원하기가 힘이 듭니다.

지난 2000년 미국 코넬대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바로 사랑의 유효기간에 관한 연구입니다. 2년간 남녀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남녀가 가슴 뛰는 사랑을 나누는 기간은 대체로 18~30개월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이며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 사랑의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사랑을 단순히 뇌 속의 화학작용의 결과로 설명한다는 것인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사랑은 영원하기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외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의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뒤에 정말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머리, 가슴, 온 몸에는 온통 주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사랑에 매여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사랑에 매여 사는 것이 온통 주님을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주의 사랑에 매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제 세월이 참 많이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여전히 주의 사랑에 매여 있습니다. 아니 세월이 갈수록 더 깊이 주의 사랑에 매여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주의 사랑에 매여 사는 바울의 삶의 절정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주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면 잡히게 될 것이고, 견디기 힘든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고, 죽을 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알려주셔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물로 그 앞길을 막아섭니다.

그러나 바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 바울은 주의 사랑에 매여 죽음을 무릎쓰고 예루살렘 행을 강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처음 주님을 만난 직후부터 주의 사랑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온통 주님뿐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랑이 더 깊어 갑니다. 더 깊이 주의 사랑에 매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를 위해 죽으려 길을 나섭니다. 주님을 만난 직후부터 주를 위해 죽을 때까지 바울은 온통 주의 사랑에 매여 살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변함없이 누군가의 사랑에 매여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사랑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그 답이 나옵니다. 22절을 보면 “성령에 매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사로잡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속적으로 주의 사랑에 매여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께서 바울을 잡아주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매여”라는 말은 원어로는 “데데메노스”(dedemevno")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문법적으로 “데오”(dew)라는 동사의 ‘수동태 제 1 완료분사’입니다. 그래서 데오라는 동사가가 “묶다”라는 뜻이니까 “데데메노스”라는 말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묶여 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을 향해 갔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오히려 자기가 성령께 묶였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계속 성령께 묶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계속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면 성령에 매임을 받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주님을 사랑하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조금만 상황이 변해도 달라집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에 기복이 심하게 됩니다. 때로는 주의 사랑을 잃어버리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에 매여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1. 모르고 가는 것

본문 2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에 매여 사는 것은 모르고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 가는 도중 어떤 일이 생길 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갑니다. 성령께서 다 잘 아시고 나를 위해 최선의 길로 이끄실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히 11:8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을 떠날 때 이야기입니다.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가는 동안 어떤 일이 생길지 알지 못한 채 단지 가라는 명령만 받고 길을 나섰다는 것입니다.

창 12:1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이 고향에서 길을 떠나라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보여 준 땅이 아니고 보여 줄 땅입니다. 이 부분은 영어 성경 NIV에서 보다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e LORD had said to Abram, "Leave your country, your people and your father's household and 
go to the land I will show you.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후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가면서 하나씩 보여주시면서 인도하십니다. 

마치 징검다리를 놓는 것과 같습니다. 한 발자국 건너면 돌 하나를 놓으십니다. 그 돌을 건너면 그 다음 돌 하나를 놓으십니다. 우리는 그저 강 건너보다도 앞에 놓인 돌을 보고 그 돌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정 중심적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결과 중심적 인생입니다. 과정 중심적 인생은 오늘 하루하루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그 하루하루가 모여서 후일에 위대한 결과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과 중심적 인생은 후일의 위대한 결과를 꿈꾸며 오늘 하루하루 주님의 인도하심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과정에 성실치 못합니다. 결국 위대한 결과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에 매여 사는 것은 모르고 가는 것입니다. 한걸음 한걸음 성령의 인도를 따르며 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새록새록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으며 주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2. 두려움을 이기는 것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이 말을 원어에 충실하게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각 도시에서 결박들과 고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내게 엄숙하게 증거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동안 곳곳에서 결박당할 일들과 고통 겪을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겁이 났을까요? 지금 바울은 밀레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까지는 우선 배를 여러 차례 갈아타고 가이사랴까지 가야합니다. 가는 동안 여러 항구를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육로로 또 여러 도시를 거쳐서 올라가야 합니다. 여행 자체만도 이미 60이 넘은 노년기의 바울로서는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겁이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편안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들 그리고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위안을 삼고 용기를 내 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정 반대입니다. 때로 옥에 갇힐 것이랍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을 것이랍니다. 여행 자체도 겁이 나는 일인데 결박과 고통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겁이 났을까요?

그래도 바울은 겁내지 않았습니다. 왤까요? 성령께서 용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을 가졌던 미국대통령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는 1920년대의 미국의 대경제 공황 당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미국인들에게 비전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이 위기를 잘 돌파하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개인적으로 두려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패배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다음 해에 캄포벨로의 여름 별장에서 찬물에 빠져 하반신 불수라는 치명적인 장애를 입었습니다. 쇠붙이로 받침대를 만들어 다리에 붙이고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고, 옷도 자기 손으로 입지 못하고 두 다리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정치 생명이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 엘레나가 곁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루즈벨트가 엘레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이런 불구자가 되었는데 지금도 나를 사랑하오?" 엘레나는 미소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다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당신 전부를 사랑하고 있답니다." 

루스벨트가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시 도전하여 대통령이 되었고, 경제공황을 수습했고, 미국 역대 네 번에 걸쳐 대통령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두려울 때 용기를 주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에 매여 사는 것은 바로 성령의 위로를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곁에 계셔서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이기고 앞을 행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용기 있게 앞을 향해 나아가면서 더욱 주의 사랑이 깊어져 감을 느낍니다.


3. 사명을 완수하는 것

본문 2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사명이 있음을 늘 깨닫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명을 완수하려고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성령께서 늘 사명을 상기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 사명을 감당할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은 오프라 윈프리일 것입니다. 타임지가 금세기 미국을 움직이는 100명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 1위를 했습니다. 이분의 방송을 시청하는 사람이 1400만명이 넘습니다. 이분이 어떤 책을 읽었다고 소개하면 그날로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이번 오바마가 당선되는데도 무시 못할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분이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자서전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자기 나름의 네 가지 인생철학을 써놓았습니다. 그 인생철학은 성경에서 배운 것이랍니다. 특히 모세를 통해 배웠답니다.

1.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줘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2. 남보다 더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위로해주고 봉사해 줄 수 있    기 때문이다.

3. 남보다 더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그 꿈을 이룸으로써 사회와 이웃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남보다 더 부담되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부담을 피하는 자가 아니라 부담을 기꺼이 감당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프라 윈트리는 이렇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늘 사명이 있음을 깨닫고 그 사명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에 매여 사는 사람들은 늘 사명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께서 어떤 상황 형편 속에서도 사명을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 사명을 완수해 가면서 주의 사랑이 더 깊어져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령에 매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의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주의 사랑에 매여살 수 있습니다. 즉 성령에 매여 살면 주의 사랑에 매여 살 수 있습니다.

성령에 매여 산다는 것은 우선 모르고 가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만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에 매여 산다는 것은 두려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위로해 주시고 용기 주시는 성령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에 매여 사는 것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늘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힘쓰며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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