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것까지 참으라 (눅 22:47~53)

  • 잡초 잡초
  • 1567
  • 0

첨부 1


이것까지 참으라 (눅 22:47~53) 
 
 
사람은 살면서 보통 세 가지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좀더 즐겁게 살 것을 하는 후회입니다. 웃고 살아도 될 것을 괜히 짜증을 부리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둘째는 좀 더 베풀며 살 것을 하는 후회입니다. 어차피 없어질 물질이고 젊음이고 세월인데 다 사라진 후에야 나누지 못하고 산 것에 대해 후회를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가장 큰 후회는 좀 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순간을 참지 못해서 평생을 후회할 일을 만들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참지 못해서 후회하는 삶을 바꾸어보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부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야한단 말인가? 그레, "여기 칼 두자루가 있습니다." 라면서 칼을 내밀어 보였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주님은 답답해서 "그만 족하다"하시면서 대화를 마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앞으로 제자들에게 닥칠 환란과 핍박과 위협이 극심할 것을 염두해 두시고, 그 때를 대비해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준비된 칼인 말씀과 기도로 영혼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라는 뜻으로 말씀 하셨습니다.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그 깊은 뜻을 깨닫지 못햇던 것입니다.

결국 말귀를 알아 듣지 못햇던 제자 중 베드로가 기어코 일을 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답답할 때가 없습니다. 
갸룟유다의 가증한 입맞춤을 사인으로 해서 대제사장들의 사병과 성전을 지키던 군사들이 예수를 거칠게 붙잡고 포승줄로 묶으려 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칼에 대한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지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두 자루의 칼을 사용할 시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제자는 "주님, 지금 칼을 쓸까요?"라고 물었고, 성질 급한 베드로는 벌써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어 땅에 떨어뜨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주님의 음성이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내가 준비하라고 한 칼은 그 칼이 아니니라"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땅에 떨어진 말고의 귀를 주어 치료해 주시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베드로의 행위가 비록 이유있는 것이었을지라도 "이것까지 참으라"하신 것입니다. 
비록 주님을 위한다고 한 것일지라도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지금 제자들은 칼을 뽑을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만약 예수님의 제자였더라면, 우리도 그 곳에 있었더라면 가만히 있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칼을 뽑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에는 미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모든 테러와 살상과 공격적인 행위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인정한다고 하면, 이 땅에 살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온통 칼부림 천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정말 어떤 사람을 향하여, 베드로처럼 미움의 칼을 들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 대하여 결코 화해하지 않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만은 내가 용서할 수 없어. 나에게 어떻게 했는데. 절대로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어." "참을 만큼 참았어 이제 더 이상은 아니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할 수 없어" 이런 생각을 우리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님은 마치 송사를 기각하는 판사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마저 참으라."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바로 이유가 있음에도 참으신 하나님의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은, 바로 이유가 있음에 흘려주신 보배피인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 했는데, 우리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선명하게 각인된 곳이, 바로 주님이 달리신 피 묻은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이, 모든 용서할 수 없는 이유, 미워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이유들이, 십자가 앞에서 여지없이 부서지는 거룩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곳이 분명히 미워해야 할 이유, 칼을 뽑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그것을 내려놓은 귀한 자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도 이 지상의 교회 안에는 본문의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경고합니다. "이것까지 참으라!"(51절). 하나님이 쓰신 십자가의 구속의 대본에는 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키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이 들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점을 오해한다면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구속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잡으러 온 자의 귀를 칼로 쳤으나 주님은 그것까지 고쳐 주셨습니다. 자기를 죽이러 온 자에 대한 사랑과 끝까지 참으시는 인내의 주님, 그 주님을 더욱 닮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칼을 빼든 베드로가 아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내의 부족으로 수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흔히 상대방에 대하여 자신이 기대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거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나 행동을 통해 마음에 화가 나면 "참을 만큼 참았다."고 막말을 하고서는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원수를 맺습니다. 사실 막말을 하려고 벼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상대방은 하는데 왜 나는 못하느냐 하는 마음에 손해보는 것같고, 바보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 감정과 이성으로 종결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최종적인 종결지점이 되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가증스러운 입맞춤도 참아야 하고, 칼을 들고 공격하고싶을 때도 참아야 하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참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잘 참아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죄인이며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연고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지금은 참을 수가 없었으나 곧 그들은 참는 법을 배우게 되고 거의 모든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기까지 고난을 참고 이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상하고, 화가나면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온데 간데 없고 분노만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질러 버립니다. 그리고 크게 후회합니다. 이것이 수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내하지 못해서 영혼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19에 보면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주께 날마 더 가까이 나가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화도 나고 미워하기도 하며 싸우게도 되지만 그 화가 나와 너와, 남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성도로서 이 나그네와 외국인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서재 벽에 이런 글을 붙여 노았다고 합니다. "화가 나면 열까지 세자, 그리고 죽이고 싶으면 백가지 세자" 이런 방법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말씀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주 참기 힘들고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올 때, 주님의 이 말씀을 떠올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어려분들에게 실재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여자의 인내는 여자를 아름답게 하고, 남자의 인내는 남자를 가치 있게 만듭니다. 소년의 인내는 사랑을 받고, 청년의 인내는 칭찬을 받고, 노년의 인내는 존경을 받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14장 12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인생문제에 있어서 인내하는 것보다도 더 복되고 좋은 인내인 줄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 많습니다. 의분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칼을 뽑지는 않지만, 여러 번 마음속으로 칼을 뽑게 됩니다. 지금도 상대방을 향해 칼을 빼려고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람, 이미 칼을 뽑아서 높이 치켜들고 있는 사람, 혹은 이미 칼을 내리쳐서 상대방의 귀를 잘라버린 사람, 모든 종류의 칼을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아멘입니까?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을,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No more of this" "그것 이상 더 가지 말라. 거기에서 멈추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말고의 한쪽 귀를 잘랐습니다. 가만히 두었다면 틀림없이 나머지 왼쪽 귀마저 잘랐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오른쪽 팔도 자르고, 왼쪽 팔도 자르고, 목도 잘랐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더 이상 가지 마라. 거기서 중단하라." 이미 잘라버린 것은 주님께 맡기고 여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더 이상 칼을 들고 달려가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벌써 형제의 귀는 하나 떨어져 나갔습니다. 여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더 이상은 가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더 이상의 말고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오늘 이시간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 속에 응어리진, 모든 미움과 원한과 나쁜 감정들이, 영원히 멈추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