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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힘, 교회의 힘 (마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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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힘, 교회의 힘 (마 3:1~12)


어느 목사님이 새신자를 심방하기 위해 산동네에 가셨습니다.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들고는 집을 찾는데 새신자 집 찾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동네를 몇 바퀴 돌다가 결국은 찾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복덕방에 찾아가 복덕방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에게 주소를 내밀고는 도움을 청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주소를 보시고는 찾기 쉬운 곳이라 말씀하시고는 이렇게 저렇게 가면 된다 일러주셨습니다.
한 두 마디 대화를 하다가 할아버지와 친해 진 목사님은 직업병이 발동해서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혹시 예수 믿으세요?”
“아니, 나 예수 같은 거 잘 몰라!”
“그럼 할아버지 천국은 가고 싶으세요?”
“아이, 천국 가기 싫은 사람 어디 있나. 물론 가고 싶지!”
“할아버지, 제가 천국 가는 길을 알려 드릴까요?”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때 할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이봐요 젊은 양반, 적혀 있는 주소 갖고도 집 못 찾는 사람이 천국은 어떻게 찾아 가! 집이나 잘 찾아요!” 

추운 날, 더 춥게 만드는 썰렁한 이야기이지만, 신앙인의 사회적 권위가 형편없음을 나타내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신앙인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일까? 아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하여 한 번 쯤 고민해 보지 않은 신앙인들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기능이 있겠지만 특별히 사회를 향하여 해야 하는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상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사회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대한 권위를 인정할 때 비로소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힘이라는 것은 물리적이고 세속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 나이라 영적 권위에서 오는 그런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스스로 그런 힘을 갖고 있을 때 사회적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교회의 기능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교회의 힘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시 말 해 교회로서의 성숙된 모습과 교회로서의 권위를 잘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잘 지켜 나가야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한 번 외칠 때 세상이 놀라고, 반성하고, 긴장하고 또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잘못된 점을 외칠 때 사회가 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나 잘해!” 라는 반응이 나오면, 그것은 그만큼 교회가 그 사회에서 교회로서의 역할을 잘 해 오지 못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권위도 부여받지 못하고 또 존경받지도 못할 때, 교회의 외치는 소리는 성경말씀 그대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13:1) 밖에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2007년과 2008년, 작년과 올 해는 한국교회에 큰 의미가 있었던 해입니다. 2007년은 평양 대 부흥운동의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2008년도는 해외 선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입니다. 2007년이 시작되면서 한국교회에서는 큰 움직임 두 가지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2007년이 1907년에 있었던 평양 대 부흥운동의 100주년이었기 때문에 부흥 100년을 맞이하여 그 부흥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움직임은 한국의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떤 사회적 사안에 대하여 삭발을 하면서까지 대정부 투쟁을 했던 것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바로 그 전해였던 2006년 12월 9일에 한국 국회에서 통과된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반대하면서 한국의 대표적 교회의 지도자들이 머리를 삭발하면서까지 거센 투쟁운동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운동은 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해야 할 일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1907년을 꿈꾸며 대 부흥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포라고 본다면, 교계지도자들의 대정부 삭발투쟁은 사회를 향하여 잘못 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외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운동에 대하여 한국 사회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선포를 할 때 그에 대한 무반응은 원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라 놀랄 것은 없지만, 사회를 향하여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부분에 있어서의 사회의 냉담한 모습은 오히려 한국교회를 매우 당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야, 너나 잘 해라!” 라는 답변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향하여 아무 말도 못하는 교회, 또 마음을 굳게 먹고 힘 있게 외쳐도 그것을 듣고 긴장하지 않는 사회, 그런 시대에 우리 교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현상들이 이 사회가 악하고 문제가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옛날 아모스 선지자가 사악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정의를 외쳤을 때도, 요나가 니느웨의 사악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을 때도 그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척 악하고 잔인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선지자의 외침에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고 불안해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그런 반응이 없다는 것은 이 사회가 옛날의 사회보다 더 사악해서가 아니라 분명 다른 것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외치는 자의 문제입니다. 즉, 외치는 자가 예전에 비해 힘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를 향하여 외치는 자가 교회라고 했을 때, 외치는 자, 즉 교회가 왜 힘을 잃어가고 있는지,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세례요한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직전에 활동했던 선지자요 예언자였습니다. 광야에서 살면서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던 사람으로 유명하고,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던 인물이요, 후에는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죽임 당했던 인물입니다. 

요한의 죽음으로 봐서 알듯이, 요한의 시대는 그렇게 평화로운 시기도 아니었고, 편안한 시기도 아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늘 불안했던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무서워했던 시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요한의 한마다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가 외치는 말에 모든 사람들은 회개를 하였고, 환호하며 그를 따랐습니다. 또 그가 고발하는 말에 헤롯왕을 비롯하여 정치 지도자들은 겁을 냈었습니다. 

여러분, 그 권위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요한의 그 힘과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선포했고, 또 사회의 죄를 정확히 고발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맞는 생각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한국의 교회들도 말씀의 연구나 설교로 따지면 역사상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사회를 향하여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도 오늘날의 교회가 절대 옛날의 헤롯시대의 요한보다 못하지는 않습니다. 늘 바르게 살게 하기 위하여, 또 바른 신앙인으로 바른 사회를 만들어 나가게 하기 위하여 교회는 많은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때로는 목사님들이 삭발을 하면서까지, 툭하면 시청 앞 광장에 많은 교인들이 모이면서까지, 사회의 조그마한 일에도 교회가 나서서 교회의 힘으로 바로잡으려 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교회가 옛날에 비해 훨씬 더 많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많은 힘을 잃어 가고 있고 세상을 향하여 많은 권위를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주님이 우려했듯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소금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례요한과 오늘날의 교회, 무엇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오늘날도 교회는 복음을 위해 가장 많이 외치고 있고, 사회를 향해 크고 작은 일에까지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예전에 비해 사회적인 활동이 결코 작아지거나 위축된 것도 아닌데, 왜 교회는 예전에 비해 그렇게 힘이 없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하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교회의 역할이 전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교회에는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요한의 모습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요한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우선 그가 무엇을 입고 있으며 무엇을 먹고 있는지 소개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인물을 소개할 때, 웬만해서는 그의 외형적 소개는 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이스라엘 사람인지 이방인인지, 그가 어느 지파 사람인지, 또 누구의 자녀인지를 더 중요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에 있어서는 입는 옷과 먹는 음식을 더 중요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찼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옛날 약 800년 전에 있었던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입었던 옷입니다. 지금 요한은 엘리야의 입고 있던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왕하1:8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그리고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길을 평탄케 하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가 외쳤던 예언과 같은 내용입니다. 

사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즉 세례요한은 지금 엘리야의 모습으로, 이사야의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400년 만에 다시 온 예언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먹은 음식이 범상치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합니다. 메뚜기와 석청은 유대 광야에서 찾을 수 있는 자연 음식으로 메뚜기는 유대 땅과 아라비아 사람들의 보통의 식품이었고 석청은 바위틈에서 구할 수 있는 야생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의미보다는 더 중요한 의미가 그 음식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메뚜기와 석청이 레위기(레11:22)에 나오는 정결한 음식으로 청빈과 성결함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수도자의 음식으로 청빈함과 성결함을 함께 보여주는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답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에게 있었던 청빈과 성결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청빈이란 무엇입니까? 단지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믿는 것이 청빈입니다. 재물을 쌓아 두려 하지 않고, 재물에 모든 가치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을 믿으며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청빈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 청빈의 정신이 없습니다. 

성결은 또 무엇입니까? 세상과의 단절된 삶을 성결이라 합니까? 아예 세상 근처에도 가지 않고 수도원이나 기도원 같은 곳에서 따로 떨어져 살면 성결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결한 삶은 삶의 모든 기쁨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 삶의 기쁨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삶의 모든 기쁨을 얻는 것이 바로 성결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교인들에게는 바로 이런 삶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 보니 그 삶이 가져다주는 힘도 자연히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저는 개신교 교인이요 목사이지만, 가끔 개신교보다 교회의 역사가 훨씬 더 긴 천주교를 통해 교회에 관한 소중한 것을 배우게 됩니다. 특별히 제가 교회에 관하여 많은 가르침을 받게 된 교회사 책이 한 권 있었는데 그 책은 알란 슈라크 (오하이오 프란체스카 대학)라는 신부님이 쓴 <가톨릭 교회사>라는 책입니다. 그 책을 보면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말하면서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교회에 힘은 언제 주어지는지를 잘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역사적으로 힘을 얻게 된 것은 세 차례 큰 사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① 그 첫 번 째는 바로 종교 개혁 때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떨어져 나갔을 때, 가톨릭교회는 그때까지의 선교의 방법을 다시 수정하는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가톨릭 쇄신 작업의 첫 열매가 바로 그 유명한 <예수회>였는데, 이 예수회에서 동양에 파송한 선교사가 프란시스 자비에르와 마테오리치였던 것입니다.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일본에 복음을 전해 준 첫 선교사였고, 마테오리치는 중국에 복음을 전해 준 첫 선교사입니다.

두 번째는, ② 1870년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령이 결국 군사력에 의하여 탈취되었을 때입니다. 교황이 세속적인 힘을 잃었을 때, 그와 함께 가톨릭교회가 유럽에서 정치적인 세력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기나긴 역사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이나 많은 가톨릭 신자의 눈에는 이런 교황령의 멸망과 진보적인 입헌 정부들의 등장이 비극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이것이 하나의 축복이 되고 가톨릭교회로서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국가의 연대가 종식되자 가톨릭교회는 가일층 분명하게 그 본연의 임무인 영성 개발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③ 20세기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무솔리니에게 교회는 모든 것을 내 주어야만 했을 때입니다. 무솔리니는 현재의 바티칸으로 로마 교황청의 땅을 축소시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톨릭교회로서는 망하는 것과 같은 치욕의 사건이었지만 그 때가 바로 교회로서는 커다란 은총의 시기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교황의 권위가 지상 왕국을 소유함으로써 주어진다고 생각을 했던 시대의 종말을 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적인 힘을 잃으면서 본래의 영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역사학자의 눈은 정확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왜 지난 20년 동안 개신교회는 서서히 위기 속에 신자가 줄어들고, 가톨릭교회의 신자가 급증하는 가에 대한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인의 힘은 잡으려 하지 않고 놓으려 할 때 나타납니다. 교회의 힘은 높아지려 하지 않고 낮아지려 할 때 나타납니다. 약대 털옷과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을 때 비로소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하고도 참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돈의 힘을 의지하고 사람의 힘을 의지하려 할 때,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소유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석 주가 지나면 네 곳으로 흩어집니다. 교인들도 약 천 명 단위로 흩어질 것입니다. 대형 교회에서 네 개의 중형교회로 바뀌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재산도 나뉠 것입니다. 오천 명이라는 교인의 수는 우리에게 많은 힘을 주기에 충분한 숫자입니다. 사회가 함부로 하지 못하는 숫자이기도 하며, 뭐든지 하려고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오천 명이라는 숫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만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넷으로 나뉘어야 합니다. 오천 명이 주는 세상의 힘을 버려야하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으로는 오천 명 만큼의 세상의 힘은 얻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영적 힘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례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나타내지도 못하고, 성결과 청빈의 생활을 하지도 못하면서 세속적인 힘만 키우기 위해 커져야 한다면 그 교회와 교인들에게서는 어떤 영적 권위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매머드 교회가 많은 한국 교회를 향하여 오늘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 정치나 사회 신경 쓰지 말고 너희나 잘 해라!”
“주소 갖고 집도 하나 못 찾으면서 천국 가는 길은 어떻게 가르쳐!”

신영복 교수님의 의미 있는 글을 하나 소개해 드리면서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신영복 교수님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인 분인데, 지난 1968년 육사 교수로 있을 때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 되어 1988년까지 20년간 복역을 했던 분입니다. 

지남철.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그 때 우리는 그 바늘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 쪽에 고정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가 네 교회로 분립이 되는 이 중요한 시점에, 다시 하나님 앞에서 늘 본질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신앙의 힘, 교회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깊이깊이 생각하는 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을 기다리며 묵묵히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힘 있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시는 높은뜻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대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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