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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예수, 세상에 오신 하나님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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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세상에 오신 하나님 (마 1:18~25)

  그토록 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기독교가 마치 로마의 국교처럼 대접을 받게 되면서 신자들은 예수 믿기가 참 편해 졌습니다. 그 때, 오히려 스스로 광야를 찾아 나갔던 신실한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광야에 작은 암자를 지어 놓고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오직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했던 사람들이지요. 그 중에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50년 동안을 고기는 물론 빵조차 먹지 않고 검소하게 살면서 자신의 삶을 오로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로서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단 한분뿐이던 형님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에게는 마리아라고 하는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머물던 광야의 암자의 바깥방으로 어린 조카딸을 데려다 놓았습니다. 마리아도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을 말씀을 배우며, 기도하는 일에 열중하면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마리아는 아주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라났습니다. 

그 무렵 수도자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좀 이상해 보이는 한 사나이가 가르침을 받는다는 핑계로 아브라함을 찾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브라함보다는 마리아에게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으로 대하는 남자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는 이 낯선 수도사와 함께 도시로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곧 버림을 받고 사창가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홀로 남은 아브라함은 마리아 때문에 무척 가슴이 아팠습니다. 시간이 좀 흐른 후 아브라함은 기도를 통해서 마리아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아내고는 그녀를 찾으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수도사의 모습이 아닌 장교의 모습을 하고는 마리아가 머물고 있는 여인숙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면서 ‘여기에 참한 아가씨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왔소이다. 그 아가씨를 이리로 데려 오시오...’ 그러자 마리아가 그를 맞으러 나왔습니다. 그는 창녀의 옷을 걸친 조카딸을 보면서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하지만 아직 자기가 작은 아버지라는 것을 감춘 채로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는 지난 50년 동안 먹지 않았던 고기며 모든 음식을 아주 맛있다는 듯이 먹고 마셨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잠자리를 같이 하자며 이끄는 마리아에게 끌려서 그녀의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녀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을 얻고자 머나먼 길을 달려 왔다오...’ 그 때에 비로소 마리아는 군인의 복장을 한 이 사나이가 자기의 작은 아버지 아브라함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집으로 돌아가자는 아브라함의 말에 울면서 소리쳤습니다. ‘저는 작은 아버지를 쳐다볼 수도 없어요. 너무나 수치스런 몸이라구요...’ 그러자 아브라함은 성경에 나타난 용서받은 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결국 이런 이야기들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작은 아버지가 그녀에게 보여주었던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데리러 온 작은 아버지의 행동이 그에게는 지난 50년 동안 그가 지켜왔던 모든 계율을 한 순간에 깨뜨리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작은 아버지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동이지요. 

그녀는 이런 작은 아버지의 행동 속에서 그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 것이지요.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여기까지 찾아온 작은 아버지의 요청을 뿌리 칠 수가 없었습니다. 사막으로 돌아 온 마리아는 다시금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면서 성녀 마리아로 변하게 됩니다. 세상에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죄가 없었고, 답답함과 죄책감으로 그녀를 찾아 온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느낄 수가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탄절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까 성탄절이 코앞으로 다가 온 것이지요. 성탄절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지요? 아마 어린이들은 산타클로스나 선물 같은 것이 생각날 것이고, 젊은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눈이라도 내리면 기분이 참 근사할 텐데...’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확실히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교회 보다는 백화점이나 도심인 것 같습니다. 아마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느끼려면 이제 우리는 교회를 찾기보다는 화려한 장식을 해놓은 백화점이나 번화한 건물을 찾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아마도 교회는 계속해서 고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올 해 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고 감나무에다가 전등을 좀 걸쳐 놓았는데... 도무지 돈은 만만치 않게 들어가고도 효과는 별로 나지 않는 것 같아서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우리가 크리스마스의 근본적인 정신으로 돌아가 본다면... 어떻게 성탄절 장식을 하고 크리스마스에 어떤 분위기를 연출하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증거하는 첫 번째 성탄절의 이야기는 그 날이 우리도 전혀 모르는 사이에 시작된 날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무엇인가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는 징조를 별을 통해서 발견한 점성술 학자들이... 별이 인도하는 대로 찾아간 것이 당시 세상의 변방에 있는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찾아가서 자기들이 본 별 이야기를 하였더니 온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지라...’(마태2:3) 이렇게 말을 하고 있지요. 

당시에 유대에 사는 어느 누구도 예수의 오심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 오신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렇게 남모르게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서 일어난 일들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 가운데는 2천 년 전에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성탄절이 가지는 2중적인 메시지를 읽게 됩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자면 다른 아기들이 태어날 때의 모습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한 아기가 태어난 이야기입니다. 공교롭게도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이제는 우리에게는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게 되는 아주 배타적이고 제한적인 이름이지만, 당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참 많았다고 하지요. 예수는 당시에 태어났던 많은 아기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예수라고 하는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해서 이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며 우리의 모든 관심을 예수에게만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그래서 그의 처음의 탄생은 세상의 다른 아기들의 탄생처럼 단지 그의 부모들이나 가족들에게만 기쁨이었지만, 이제는 온 세상이 그토록 떠들썩하게 그의 생일을 기념하고 있으니? 도대체 예수는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지요. 
   
먼저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 탄생 이야기에 선행하는 하나의 길고 지루한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족보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이야기하는 서두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 이렇게 말을 시작하면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에게 이르는 길고 지루한 족보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어려서 성경을 처음 읽을 때에 마태복음부터 읽게 되는데, 족보에서부터 걸리는 것이지요. 우리 집 조상님들 족보도 모르는 내가 예수님 족보는 알아서 뭘 해... 큰맘 먹고 성경책을 펴들었다가 이 예수님의 족보 때문에 한 장도 일기 못하고 책을 덮었던 적이 참 많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보통 성서학자들이 아브라함 이전에 이르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이른바 원 역사... 인간 세상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바탕을 제공하는 이야기라고 이해하니까... 아브라함부터 언급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인간 세상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지요. 거기서부터 예수의 시대까지를 족보는 다루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이렇게만 말하기도 하고... 좀 생략된 부분도 있고 해서 분량으로 따지자면 한 장이 채 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누가 누구를 낳고... 이런 이야기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한 숨과 눈물이 배어 있는 것일까요? 이들의 삶 속에는 집도 절도 없이 마치 나그네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를 앞에 두고 절망하며 힘들어 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치 산처럼 쳐들어오는 적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던 사람들도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것은 예수라는 한 인간의 족보이면서도 이들의 살아온 모습을 파헤쳐 들어가 본다면... 이것은 때로 우리들 자신... 혹은 우리의 이웃이나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걸어 온 삶의 여정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나같이 바라는 바램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이제 도저히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없는 현실이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데... 그래도 우리들은 이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갈 수가 있을 텐데... 삶이 고단하고 힘들면 힘들수록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희망은 더욱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조상들의 족보를 설명하면서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기다림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규정지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의 탄생이 정말 소중한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기나긴 기다림... 기나긴 목마름... 이제는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데... 이렇게 오로지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다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이것이 바로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시거나 모르는 척하시면서 지나치신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서두에는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시면서 그에게 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밑에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가는 히브리 민족 자체가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 것이지요. 그 때에 하나님은 그를 보내시면서 나는 내 백성이 애굽에서 겪었던 모든 고난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다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성탄절이 가지는 깊고 심오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세상에 태어나심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신다거나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제 세상에 오시는 예수를 향하여 오늘의 말씀은 이렇게 그의 정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제 우리에게 오실 아기에게는 예수라고 하는 이름도 있지만, 임마누엘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어떤 것인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이것은 더욱 놀랍고 감동적인 일이 아닌가요? 예수는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바로 아래서 고통을 겪을 때에 모세를 보내셨던 하나님은 이제는 자신이 친히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아기 예수 탄생이 담고 있는 가장 극적인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통해서 자신이 직접 사람의 모습을 하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제 태어나실 아기 예수 속에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서두에 말씀드렸던 수도사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조카 마리아가 그만 유혹에 빠져서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이나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직접 그녀를 찾아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마음을 열 수 있도록 그는 차려진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 50년 동안 자신이 지켜오던 모든 계율을 스스로 허물어뜨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했을 때에 마리아가 그의 행동에서 읽은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작은 아버지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읽은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마리아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우리들 가운데 찾아오신다는 것 가운데 담겨진 가장 귀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들 스스로가 생각해도 못마땅하고 부족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들 인간들이 사는 아주 작고 작은 별 중의 하나인 지구까지 우리를 찾아오실 정도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까닭이 있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사랑이라고 하는 말로만 설명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동안의 모든 실패나 상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들은 태안 앞바다를 중심으로 발생한 기름의 유출로 벌어진 사태를 심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언제나 다 복구되어서 바다나 그 속에 사는 생명체들이 예전과 같은 깨끗한 모습을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하지만, 오염되고 상처를 입은 것이 어찌 그 바다뿐이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들의 내면은 그것보다 더 많이 오염되기도 하고 더 많은 상처를 입고 신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얼마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나 할 것 없이 다 탄식하며 세상을 살고 있다고 그렇게 말합니다.(로마서 8:19-23)
    
오늘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이런 우리들과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금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때문인 것이지요. 오늘 아기 예수를 통해서 친히 이 세상 가운데 오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점점 더 병들고 오염되어 가는 세상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면... 우리는 모든 잘못과 허물을 딛고 다시금 새롭게 출발 할 수가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한8:11) 간음하던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삶을 기회를 주시는 예수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누구든지 예수를 통해서 이렇게 담대하게 선언할 수가 있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친히 오신다는 것! 생각해보면 이것처럼 행복하고 좋은 소식이 없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들 자신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을 사노라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까지도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번 성탄절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소중한 뜻을 다시금 새롭게 발견하는 축복의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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