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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말씀이 일하시게 하라 (막 4: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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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이 일하시게 하라 (막 4:26~32)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가끔 이런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크신 하나님이라면 세상에서 좀 넓게 더 많은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지 그렇지 않고 왜 기독교라는 한 종교를 통해서만 역사하실까? 하나님이 편협하신가? 배타적인가? 하나님은 작은 분인가? 이런 질문입니다. 이것은 정당한 질문이고 누구든지 이런 질문을 할 법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답은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전달된 만큼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알고 듣고 믿는 만큼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전파될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더 널리 나타날 수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축소되면 그만큼 하나님의 역사도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 것과 비례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저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전도의 차원에서만 이해를 하려고 하는데 전도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되지만 말씀을 전하면 그만큼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원리를 좀 더 설명하자면 사람이 하나님을 좇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좇는다는 말은 막연하고 애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좇을 수 있겠습니까. 스페인 인사말로 ‘바야 콘 디오스(Vaya con Dios)’라는 말은 ‘하나님과 가라’라는 말인데 좋은 뜻이지요. 그러나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가라는 얘기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다, 그건 확실히 더 분명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 있는 아브라함에 대한 기사를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다는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간 것, 그것은 그의 인생의 한결같은 신앙의 원칙이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아브라함을 좇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을 좇아가는 신앙생활과 사람을 좇아가는 신앙생활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아마 오늘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 중에는 말씀을 좇아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고 사람을 좇아서 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누가 가자고 해서 마지못해 부모님을 따라가든 배우자를 따라가든 누구를 따라서 여기에 오는 것뿐만이 아니고 평소의 신앙생활이 사람을 따라가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롯이 그랬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지만 롯은 아브라함을 좇아갔는데 둘이 같은 길을 가는 동안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유가 서로 너무 많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그들이 각자 다른 길을 가기로 했을 때 그때 롯에게는 어디로 갈지 그의 길을 인도하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기에 윤택한 땅으로 보였기 때문에 눈으로 판단하고 소돔과 고모라로 갔다가 나중에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 롯은 자기의 생명만 겨우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신앙생활과 사람을 좇아가는 신앙생활이 평소에는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제는 부모님의 신앙이든 배우자의 신앙이든 존경하는 사람의 신앙이든 심지어 목사의 신앙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요즘에 자동차마다 내비게이션을 달지 않은 차가 없지요. 내비게이션의 원리는 인공위성에서 주는 GPS 시그널을 받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모든 내비게이션 단말기가 인공위성의 전파를 따라가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어디를 가고 있고 목적지를 가려면 어느 길로 가라고 지시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내 마음에 심어주는 말씀을 알 수가 있고 깨달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좇아가는 것이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질적인 분입니다. 예수님은 막연한 미사여구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만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없다면 예수님도 여러분 안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영화 ‘대부3편’을 보면 주인공 알 파치노와 가톨릭 추기경이 신앙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 영화는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추기경이 뜰에 있는 작은 분수 안에 있는 조약돌을 끄집어내서 돌판 위에 깨뜨립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 돌조각은 물속에 수십일 동안 잠겨있었지만 물이 그 속에 스며들지 못했습니다. 보시오, 속이 완전히 건조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유럽인은 수세기동안 기독교 문명 속에 살았지만 예수님이 그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서구 문명의 영적인 궁핍함에 대한 지적입니다. 이 말을 좀 더 정확하게 해석하면 유럽인들 속에 예수님이 안 계신 게 아니고 그들 속에 예수님의 말씀이 안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거하시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스며들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그 속에 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신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는 말씀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의 전통보다도 우선하고, 교회 예식보다도 우선하고, 성찬식보다도 우선하고, 교회 성직자보다도 우선하고, 심지어 교회보다도 우선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보다도 우선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예수님 말씀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반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믿음을 일컫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에 말씀으로 말미암는 믿음의 반석이 있어야 되고 그 위에 교회도 있고 전통도 있고 예배도 있고 기도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무리 신앙적인 열심이 있고 선한 뜻이 있고 기도를 하더라도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기도가 미신이 될 수 있고 전통은 바리새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 예배는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사실 예배의 핵심 메인 코스는 설교입니다. 그것이 왜 중요하느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으며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되고 믿음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믿음이 결정되고 여러분이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이 어떤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 대한 믿음,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많이 전하는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거듭날 수 있는 믿음을 얻게 되고, 축복에 대한 말씀을 많이 전하는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축복을 받을만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고, 병 고침에 대한 말씀을 전하는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병 고침을 경험할 수 있는 믿음을 얻게 되고, 선교에 대한 말씀을 많이 전하는 교회는 교인들이 선교할 수 있는 믿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어떤 믿음이 있느냐는 여러분이 어떤 말씀을 듣느냐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만약 전하는 말씀도 없고 듣는 말씀도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모이고 아무리 신앙적으로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볼 때 신앙의 부흥은 말씀과 비례했습니다. 말씀이 강조되고 말씀이 강력하게 전파되는 때에는 신앙이 부흥하고 상대적으로 말씀이 축소될 때에는 신앙이 위축됐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과거에 교회가 많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심지어는 라틴어로 된 성경을 모국어고 번역하는 것을 금지할 때가 있었습니다. 영어든 독일어든 이 로칼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교회가 금지하고 번역 작업하는 사람을 이교도로 몰아서 화형을 시킬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을 때는 신앙이 부흥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개혁에서 끝난 것뿐만이 아니고 그것은 부흥운동이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신학자요, 설교가요, 부흥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엿볼 수 있는데 첫째는 마틴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고 둘째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해서 성경을 다량으로 찍어낼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말씀이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서 사람들의 신앙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 맥락에서 한 가지만 더 생각하면 마귀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는 방법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마귀가 뭐라고 감히 하나님을 대적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저항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을 저항하고 가로막을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마귀가 우리 삶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길입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농부가 나가서 씨를 뿌렸을 때 새가 날아와서 씨를 먹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새가 상징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마귀가 와서 그 말씀을 먹어버려서 어느 한마디도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갈 때마다 졸음이 오는 분들, 마귀-잠마귀라고 부릅니다-가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온 다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우리 삶 속에 가시와 엉겅퀴를 자라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기운을 빼앗는다고 했습니다. 말씀의 기운을 빼앗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하와를 뱀이 시험한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서 제일 먼저 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보고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거든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것이 마귀가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길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을 대항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해서 그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만약에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은 옳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복되다, 이렇게 말했다면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이의에 하와가 동조하면서 인류는 그릇된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저는 목회사역에 대하여 누가 ‘당신은 사람들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당신은 목회를 통하여 사람들을 바꾸고자 하느냐?’ 이런 질문을 할 때 저는 제 자신이 알고 있습니다, 아니라는 것을. 저는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제 자신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꿀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바꿉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성도들을 바꾸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을 바꿉니다. 

그러므로 제가 할 일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도록 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바꿉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거듭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회심하게 하고 회개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할 일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기만 하면 되고 그 다음은 말씀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26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농부는 씨를 뿌린 것뿐이고 씨를 뿌린 다음에는 사실 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때부터는 씨가 알아서 합니다. 왜냐하면 씨앗 속에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어느 고고학자가 수천 년 된 옛날의 무덤을 발견해서 파 보았더니 수천 년 된 씨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걸 땅에 심었더니 싹이 나더랍니다. 씨앗 속에는 생명력이 있는데 그 생명력은 땅에 심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 가장 흔한 것이 성경책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책으로만 있으면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것을 심으면 생명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할렐루야! 

그 다음절을 보면 ‘땅이 스스로 싹을 낸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스스로 변화합니다. 스스로 변화하는 것을 기다려야 됩니다. 가족들이 잘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까? 잔소리 한다고 변하지 않아요. 잔소리 하면 싸움만 많아집니다. 자녀든 남편이든 아내든 부모님이든 잔소리해서 달라졌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변화됩니다. 그것을 믿으셔야 됩니다.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그래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에 대해서는 단정하면 안됩니다. 하나님도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단정하지 않습니다. 너는 죄인이니까, 너는 과거가 어땠으니까, 너는 여자니까, 너는 이방인이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사람에 대하여 단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그의 과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별자리에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손금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DNA에 정해진 것도 아니고 사람의 운명은 그 속에 어떤 믿음이 있느냐에 좌우되는 것인데 어떤 믿음이 있느냐는 그가 그 마음속에 어떤 말씀을 받았느냐에 좌우됩니다. 그것이 사람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의 미래가 어찌 될까를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오늘 여러분 마음속에 어떤 말씀이 역사하고 있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속에 어떤 말씀이 역사하고 있느냐를 가지고 장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하여 일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그냥 내 마음에 드는 말씀만 따다가 이랬으니까, 저랬으니까, 이렇게 인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하여 일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더 많이 믿고, 더 많이 쌓아둘수록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그것은 우리에게 흡족하고 만족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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