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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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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 1:7~8)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던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숱한 환난과 시련 속에서 어떻게 세계선교에 주춧돌을 놓고, 또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한 대 신학자가 될 수 있었는지, 바울의 위대한 사역의 근원이 어디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의 심령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12제자도 역시 그렇습니다. 12제자들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은 하나님께 생명을 바치는 순교자의 반열에 설 수 있었던 이유도 역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명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맥이 뛰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과 같이 고동해야 한다." 고 하여습니다. 헬라 원어로 '심장'이라는 말은 바로 가슴 전체를 가르킵니다. 즉, 이 심장은 감정의 좌소를 가르키는 신장, 폐장, 간까지 이르는 가슴의 전체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과 자비, 그리고 애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졌다는 말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숙한 인격을 소유했다는 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1. 생각하는 것이다.(7절)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 말은 오늘 본문 속에서 사도 바울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관심을 말합니다. 생각의 원어를 보면 어떤 지적인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애정과 관심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에 대한 최고의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물질 황금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극도로 이기주의,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든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옛날 고어에만 나오는 말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파트에 살다보면 한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은 고사하고, 한 라인에 사는 사람, 아니 라인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문 앞에 살고 있는 앞집 사람도 잘 모릅니다. 앞집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고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전혀 모릅니다. 남남입니다. 

한 동네에 오순도순 살면서 서로의 가정에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인지, 그 가정의 형편과 사정을 잘 알고 서로서로 아름답게 교제하면서 살던 풍습은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관심이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없는 시대는 차가운 시대요, 경쟁의 시대요, 무서운 시대입니다. 냉혹한 시대입니다. 사랑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상대방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증거입니다. 

우리 가족장들은 가정교회 교우들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깊이 살펴보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가족장입니다. 또 전도회 회원들, 성가대 회원들, 또 각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회원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다면 내 주위에 있는 같은 교우들, 주일학교들, 성가대원들, 교사들과 주일학교 어린이들,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그들을 살피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입니다. 

1) 불신자의 비참함을 생각하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관심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이 불신자들은 지금 얼마나 죄 속에 깊이 빠져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모든 불의와 악독과 추함과 음란과 간음과 술수와 살인과 거짓과 속임수 등 말할 수 없는 많은 죄 가운데 빠져 있는 불신자들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마음의 아픔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은 소돔 고모라에 살면서 소돔 고모라의 많은 사람들이 범죄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고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롯과 같은 마음의 고통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있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불신자들이 범하는 죄를 보면서 롯과 같은 마음의 아픔이 우리에게 있었는가를 우리는 살펴볼 필용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죄악으로 깊이 치닫는 불신 이웃들을 볼 때마다 우리가 아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2) 마지막 날 사망의 부활을 생각하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지금 불신자들은 그들의 종말이 사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요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언제입니까? 마지막 날 우리 주님이 나팔소리와 함께 이 땅위에 재림하시는 그 때에 하나님을 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부활로 다시 부활해서 주님과 더불어 공중으로 올라가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사망의 부활로 나타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많은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부활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 중에서, 혹은 이웃들 중에서 공중에 구름타고 주님과 함께 승천하여 올라갈 때 같이 올라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산아 나를 가려라 바위야 나를 가려라" 하면서 무서워 떨며 고통 당하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말입니다. 더욱이 그 대상이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할 때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날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3)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불신자들의 최후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또한 활활 타오르는 지옥 불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매일같이 잔치를 하던 큰 부자가 살았습니다. 그 집 대문 앞에는 또한 거지 나사로도 살았습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병들었던지 주인집 개가 거지 나사로의 그 헌데를 핥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주인집에서 던져주는 빵 조각으로 겨우 생명을 연장하는 불행하기 이를 데 없는 거지였습니다. 

부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거지 나사로는 예수님을 잘 믿었던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죽은 후에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활활 타오르는 지옥 불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바라보니 자기 집 대문 앞에서 구걸하며 살았던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행복하게 있는 모습이 보인단 말입니다. 부자는 나사로에게 내 입술에 물 한 방울만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지옥이 얼마나 뜨겁고 고통스럽고 목이 말랐으면 물 한 방울 찍어서 내 혀 끝을 시원하게 해달라고 했겠습니까? 물 한 방울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만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물 한 방울이라도 달라고 부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합니까? 너와 우리의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서로 오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자가 뭐라고 말합니까? 내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저 나사로를 보내서 나의 처참한 모습을 알려주고 그들이 이 곳에 오지 않도록 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 위에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복음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에게서 복음을 듣지 아니하면 죽은 나사로가 가서 전해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지구의 마지막 날, 최후의 날,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영광의 날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활활 타오르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증거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2. 이웃을 마음에 두는 것이다.(7절) 

오늘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도 바울은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두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딤후1:3)을 보면 이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간구하는데 무엇을 위해서 간구합니까? 디모데 너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도 사랑하는 내 이웃들을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보배 되신 예수님을 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는 보배 되신 주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그릇입니다. 거룩한 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마음에 담아야 되겠습니까? 불신 가족들을 마음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요즘 전도운동을 벌이면서 마음에 두고 전도하라고들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 전도하라는 뜻입니다. 마음 속에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찾아가 그들을 권면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마음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전도할 대상자를 마음에 두고 그 대상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대상자를 찾아가고 그 대상자를 위로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고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게 될 때에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이웃을 생각하고 이웃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고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3.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7절)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을 보면 "나와 함께 너희가 은혜에 참여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에 참여했다는 것은? 

①중생을 체험했다 
이 은혜는 무슨 은혜입니까? 이 은혜는 중생을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삼아주셨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체험을 말힙니다. 

②인도를 받는다. 
이 은혜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크고 놀라운 은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③고난에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이 은혜는 바로 사도 바울이 받는 고난에 참여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도 역시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2) 고난에 참여했다는 것은? 

①그리드소의 고난을 내 몸에 채웠다는 것이다. 
고난이 왜 은혜가 되는 것입니까? 이 고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속에 채우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고난을 당하셨는데, 우리는 전혀 고난을 당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 몸 속에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 당할 때에 늘 굳건하게 고난에서 승리해야 될 것입니다. 

②연단, 성숙, 복을 받는다. 
고난이 왜 은혜가 되느냐 하면 이 고난은 우리를 실패하고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연단을 받아 양육되고 순종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큰 은혜와 복을 받기 때문에 이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는 말씀이요, 은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욥은 말하기를 고난은 나에게 유익이라고 말했습니다. 

③상 받는다. 
고난이 왜 은혜가 되는 것입니까? 고난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상급을 베푸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축복해 주시고 우리에게 수고했다고 상급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에서도 우리에게 상급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서에서도 영광과 존귀를 우리에게 입혀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자,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난 당하는 것을 경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입니까? 큰 영광과 상급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3) 복음 전하는 일에 참여 

①복음 전하는 것 자체가 은혜 
②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고, 가장 의미있는 일이다. 
③성령이 하는 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은 뜨거운 사랑의 열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셨다는 단어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외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지금 관을 따라서 슬피 엉엉 울면서 따라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민망히 여겼다는 헬라원어의 뜻을 보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나인성 과부의 슬픔을 보면서 우리 주님은 창자가 끊어지듯 슬프고 고통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여러분, 불신이웃들, 아무 것도 모르고 활활 타오르는 지옥 불을 향하여 달려가는 불신 이웃들을 볼 때에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고통 당하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아가서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왜 이렇게 때에 따라 전도운동을 벌이고, 열심히 전도하자고 전도운동을 벌여도 뒷짐만 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심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이기주의 극단주의 개인주의 세속주의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가 내 심령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지를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간에 분명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시간에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심장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차가운 심장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바꾸어주시옵소서. 우리의 무디고 냉랭한 심장을 그리스도의 뜨거운 심장으로 바꾸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교인들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곳에서 배가 조난을 당해서 수 백 명이 죽게 된 때에 그곳에 천만 다행으로 기독교인이 한 명 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속히 전신국으로 가서 전보를 쳤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다" 온 가정은 좋아서 박수를 치고 난리를 했습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보니 자기가 쳤던 전보지를 액자에 넣고 날마다 그것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 죽었던 자리에서 우리들을 구원해주고, 우리를 살려주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날마다 우리는 크신 은혜에 감사 감격하면서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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