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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합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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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합 2:1~4)

<Move 1-인생의 터널에서>

일전에 고속도로를 운전해 가다가 터널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마침 어느 방송에서 나오는 지역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긴 터널을 지나가는 동안 전파 수신이 안 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듣는 말씀을 계속해서 들을 수 없었고, 시끄러운 잡음만 들려왔습니다. 문득 마음 속에 깨달아지는 것 한 가지가 있었는데, ‘아! 인생의 깊은 터널을 지날 때에는 이래서 힘이 드는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끝이 안 보이는 긴 터널을 지나가는 동안 어려움과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들려오기만 한다면 넉넉히 극복하면서 갈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 사람들은 힘들어하게 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답답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신음이 터져 나오고, 밀려오는 절망감 때문에 몸을 떨어야 하는 시간을 보낼 때도 있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문제 때문에 몸부림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신앙의 힘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믿음을 지켜 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Move 2-국가적 위기 앞에서>

주전 7세기 경에 사역했던 하박국은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도 힘이 들었지만 지금 국가적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강대국 앗수르가 일어나 바벨론을 함락시키더니 이제는 남왕국 유다를 점령하기 위해 기병대가 출발했다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익히 들었던 하박국은 그 일을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면서 기도해 왔던지요! 피를 토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몸부림치며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데 염려했던 그 일이 이제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누구에게 달려갈 것인가?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제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선지자가 기다린 곳이 어디입니까? “파수하는 곳” “성루”였습니다. 왜 하필 파수하는 곳에 서서 기다렸을까요? 그는 하나님이 한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 일을 행하고야 마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 군대는 반드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는 그때까지 속이 타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자기 혼자서라도 성루에 서서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는지 지켜보며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요 방패이신데 내가 누구에게 나아갈 것입니까? 그는 이 절대 절명의 어려움과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깊이 파고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심판의 계획이며, 갈대아 사람들이 이 나라를 칠 것이라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이제 그것이 현실로 닥쳐왔습니다.

하박국의 이런 태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예루살렘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박국은 예루살렘이 망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성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예루살렘이 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망해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한편으로는 예루살렘을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린 것입니다.


<Move 3-하나님 대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있던 그는 외칩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이리이까? 내가 강포로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리까?”
절규하듯, 탄식하듯 토해놓는 그의 기도에는“어찌하여, 어찌하여…!”라는 탄식의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하필이면 갈대아 사람들입니까? 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쳐서 망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 악인들을 들어서 왜 하나님의 백성을 치게 하시며, 그들 속에 의인도 많은데 어찌하여 의인은 망하게 되고, 악인들은 이렇게 득세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대답해 주십시오.”

지금 하박국 선지자는 악의 문제, 고난의 문제, 악한 자들이 의인을 괴롭히며 득세하는 것에 관해 불평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국가적 및 역사적인 상황에서 이것은 앗수르에 의한 이스라엘의 억압에 대한 일이었습니다.


<Move 4-사랑하는 아들아>

그때 하박국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통치였습니다. “하박국아, 내가 다스리고 있느니라.”내가 두 눈으로 주시하면서 너희를 보고 있으며, 이 역사를 보고 있느니라.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가 이 고통 속에서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나오기를 내가 기다리고 있느니라. 네가 아플 때 나의 마음은 말도 못할 정도로 아프단다. 그러나 너희가 이대로는 안 된다. 새로워져야 하느니라.”

하나님의 묵시는 반드시 성취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유다의 포로생활이 끝날 때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이 적군을 막아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포로생활은 반드시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더디게 느껴질지 몰라도 끝까지 기다리면 반드시 회복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고난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며 회복하실 때가 반드시 옵니다. 우리에게는 그 기간이 길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기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절대 오래 끄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일분 일초도 더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든 것은 정확하게 끝이 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병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서 있을 때, 파수하는 곳과 성루에 서 있을 때 좋으신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가 너희를 주목하고 있느니라.”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 초등학교 1학년짜리 외동아들을 둔 젊은 집사님 가정이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병을 안고 태어났던 아들은 자라는 동안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했습니다. 너무 어려서 수술을 받지 못하던 그 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8시간이 넘게 걸리는 대수술이라고 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수술실에 들어가는 아이를 위해서 함께 기도했는데, 엄마는 그 긴 수술 시간 동안 수술실 앞을 떠나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자녀가 아픈데 어느 부모의 가슴이 아프지 않겠습니까마는 아들이 아픈 수술을 받고 있을 때 엄마의 아픔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엄마의 가슴뿐만이 아니라 온몸은 수술실 밖에서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그분의 귀한 자녀들을 수술실로 들여보내시고 계십니다. 찢어질 듯한 아픔 속에서 지금 그들을 연단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푸른 상록수로 설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계셨습니다. 

안도현 시인은“대 숲이 푸른 이유”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대숲의 푸른 머리카락을 빗질하려고/ 바람이 대숲으로 들어가네/ 대잎들이 배때기를 일제히 뒤집은 채/ 바람을 밀어내려고 버티네/ 이것 좀 봐 화가 잔뜩 난 바람이/ 한 손으로 대숲의 머리채 휘어잡고/ 한 손으로 대 숲의 종아리 후려치네/ 대숲이 왜 저렇게 푸르냐 하면/ 아으, 한평생 서서 매맞은 탓이라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이렇게 힘든 현실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불현 듯이 닥쳐온 직장에서의 퇴출과 회사의 부도, 너무나 무능력하게 느껴지는 나의 존재의 빈약함은 우리들을 힘겹게 하는 아픔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바로 수술실에 사랑하는 아들을 들여보낸 엄마의 심정과도 같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우리들을, 이렇듯 세상의 거친 현실 속에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을 가슴아파하며 바라보고 계시지요.

하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축복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기다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큰 글씨로 판에 새겨 “그 때가 온다. 하나님의 묵시가 이루어질 때가 온다. 그러므로 기다려라. 더디게 느껴져도 기다려라”라고 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속이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평행구절이 되는, 즉 인용구절이 되는 히브리서에는 오늘 본문 2절의 말씀이 좀 다르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하박국서 2절에 나오는 “속히 이르겠고”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히브리서는 오실 이가 속히 오신다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들 인간의 무능함과 실패, 불의와 죄성에 대한 답이 무엇입니까? 오실 이가 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속히 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오셔야 비로소 우리네 삶의 문제, 고난의 시간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의 시대는 어떠합니까? 삶의 질도 높아지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가 되었지만 정작 우리네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왜 우리 주님이 오셔야 합니까? 그분만이 우리의 마음을 고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은혜의 빛을 비추실 수 있고, 죽어 있는 마음에 하나님의 생명을 흘려 보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모든 어려움과 절망과 실패에 대한 해답이십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우리의 능력과 실패에 너무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에서 회복되는 일과 그리스도가 오시는 일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사이에 400년의 간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400년 동안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교향곡을 들어보면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어갈 때 침묵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침묵의 시간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때 앞서 느꼈던 감정을 정리하고 다음에 펼쳐질 주제를 기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이 펼쳐질 주제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침묵의 시간은 길어집니다. 400년에 걸친 침묵의 시간은 이제 펼쳐질 위대한 사건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400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이라는 사건의 엄청남에 비할 때 400년은 결코 긴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많은 문제가 있고 우리 자신에게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을 도울 능력은커녕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조차 없습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답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문제, 모든 어려움의 해답이십니다. 대림절의 첫 주를 열며 우리에게 오신 그 주님을 우리는 간절함으로 다시금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책임지시고 친히 담당해 주실 그 주님을 말입니다. 온 힘을 다해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기다리십시오.


<Move 5-의인은 신실한 믿음으로 산단다>

안타깝게 대답을 요구하면서 몸부림치는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드디어 대답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교만하고,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주셨을 때 하박국의 마음은 후련해졌습니다. 악인들은 제멋에 살고, 가진 것과, 자기의 술수를 자랑하면서 살고, 죄악된 삶을 자랑거리로 알고 살지만 ‘그러나’ 의인은 오늘도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신실성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일반적으로 나이팅게일은 밤에만 노래하는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새가 밤에만 노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팅게일은 낮에도 지저귀지만 다른 새들의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깊은 밤, 모든 새들이 잠들어 잠잠할 때, 나이팅게일이 부르는 노래가 홀로 청아하게 들리는 것이며,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잡다한 소음이 이제 어둠에 묻힌 시간, 나이팅게일의 고운 노래만이 온 숲에 울려 퍼지기 때문에 이 새의 노래가 더욱 신비롭고 환상적인 노래로 들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 절망의 어두운 밤을 지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잠을 이룰 수 없는 그 고통의 어두운 밤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한 마리 외로운 나이팅게일의 삶이라 할지라도 하늘에 사무치는 영혼의 노래를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낮의 분쟁과 시끄러운 시간에는 군중의 함성에 묻혀 그 어떤 아름다운 노래도 들리지 않지만, 조용히 단독자로 갖는 한밤의 묵상은 신비로운 영혼의 노래가 되어 하늘에 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그래서 이 시대와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흐름이 최저점에 도달하는 곳, 세상의 허영이 명백히 드러나는 곳, 세상의 신음소리가 가장 비통하게 들리는 곳, 익명의 신이 가장 침투하기 어려운 곳에 우리의 눈을 고정한다면,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인생의 수수께끼가 최고점에 도달하는 곳에서 만물의 변혁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실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 그분의 영광의 소망이 우리에게 떠오르고 그분은 우리에게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된다. 오직 우리에게 거슬리는 분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그분이 바로 거기에 우리를 위하는 분으로 서 계신다.”

일본에 가난한 목사의 아내로서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하라자끼 모모꼬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악성 폐암의 선고를 받았지만 남편은 나중에야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녀는 곧 남편에게 노트 두 권을 사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녀는 그날부터 시작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생명이 붙어 있는 44일 동안, 죽기 이틀 전까지 글을 썼습니다. 죽기 하루 전날도 자기 남편에게 구술로 일기를 부탁해서 썼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유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간증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사랑했던 주님 앞에 삶의 마지막 순간을 드린 간증이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이 책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일본인들에게 강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전도의 문서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입에서“당신이 악성 폐암에 걸렸소. 의사가 두 주일 남았다고 하오.”라는 선언을 들은 그날의 일기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마음은 주를 경배하며, 내 영혼은 내 구원이 되신 하나님을 기뻐하노라. 오늘이라는 날, 1978년 6월 28일을 나는 분명히 적어 놓아야만 하겠다. 오늘은 내 길지 않은 생애에 있어서 획기적인 날이 되었다. 나의 생애는 오늘부터 시작된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삶이다….”7월 30일, 나는 교회에 갈 수 있는 모든 기력을 상실했다. 그날은 주일이었다. 나갈 수 없는 교회! “지금쯤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겠지.”

그녀는 예배드리고 있는 교회당과 그 예배의 광경을 생각하면서 병상에서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녀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마지막 일기를 썼습니다. “신앙이란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그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란다.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는 엄마의 병을 알고 있다. 머지않아 더 심한 육체의 괴로움이 엄습해 온다는 것도 각오하고 있단다. 

그러나 엄마에게 더 분명하게 알려진 사실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직도 사랑이시며 신실하시다는 것,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더 깊게 엄마를 감싸 주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또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이 엄마와 함께 계셔서 곧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다 주시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단다. 아들아! 제발 고통스러운 이 엄마를 보아라. 엄마의 최후를 꼭 지켜보아 주기를 바란다. 엄마의 육체가 식어져 굳어졌을 때, 거기에 죽어 있는 것이 엄마가 아님을 꼭 확인해 다오. 죽는 것은 육체일 뿐이다. 이 엄마의 나그네 길에서 엄마는 육체를 남기고 떠난다. 그러나 이 엄마는 여기를 떠나서 어딘가로 갔다는 것을 너도 알게 될 것이다. 어디에 갔을까? 어느 분 앞으로 갔을까? 하나하나 네가 스스로 기도해서 해답을 얻어 보아라. 그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기는 커다란 선물이다.”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라는 것은 중심이 뒤틀려있는 인간의 모습을 설명해주는 내용입니다. 옳은 것을 보면 옳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악하게 뒤틀어 놓고 거부하는 것이지요. 히브리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시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10:38-39)

히브리어 성경의 원래 의미는 ‘지금 성공하고 잘되는 사람들은 다 교만하고 거짓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시적인 성공을 바라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말씀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악한 자들이 잘된다고 해서, 뒤로 물러가 멸망에 빠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히브리어 성경을 더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뒤로 물러가서 멸망에 빠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바라보기를 포기하고 자포자기하며 사는 것입니다. 즉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영적침체에 빠지는 것입니다. 영적침체가 무엇입니까? 믿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이나 낙심의 감정에 자신을 내던져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유대인 정신과 의사이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족과 함께 3년간이나 갖혀 있었던 빅터프랭클이라는 분이 생각납니다. 그가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보면 도살장 아우슈비츠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특권은 수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수감자들 중에서 선택된 감시자들, 그래서 감시하는 병사들보다도 더 악랄한 카포들이나 위험한 일을 댓가로 주어지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그밖에는 허용되지 않았는데, 

단 하나 예외가 있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었거나 아니면 자기에게 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저 ‘즐기려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 삶에 대한 애착, 인간과 사회, 삶에 대한 정당한 믿음을 잃어버리면서 삶의 끈 자체를 놓아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합니다. 어찌되었든 믿음이 아니라면 고난에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는 우리는 삶의 의지를 상실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어도 고난은 있지만, 믿음이 아니라면 고난은 결코 극복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답을 한마디로 요약해 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살리라’는 것은 목숨만 부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활력있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죽어가는 짐승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산제사는 죽어가는 짐승을 바라보는 대신 그 짐승을 받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생기는 것이지요. 

자신의 실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머니를 불러가시고, 나를 이끌어 가시며, 지금도 이 역사의 운행을 주관해 가시는 바로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이니까 예수님을 보내 주셨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림의 시간을 보내는 성도의 마음이요, 대림의 의미뿐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 대망하는 종말론적 신앙으로 승리하는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제대로 드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나는 사라지고 예수님이 나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채우시고 생각을 채우시고 몸을 채우십니다. 우리 힘으로는 능력 있게 살 수 없습니다. 오지 그리스도로 채워질 때, 나의 심령이, 영혼이 채워질 때 우리는 능력있게 살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탈 때 넘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넘어질 때 넘어지더라도 계속 폐달을 밟아야 합니다. 넘어지면 넘어질수록 하나님을 더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폴 브랜드라는 한센병 전문의 외과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고통이란 위험을 경고하는 기능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센병은 고통에 대한 감각이 없음으로 인해 발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통이 없이는 기쁨도 희락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들 인간에게 부여하신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비전을 발견하고 담금질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통은 값진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극심한 고통과 버림받은 절망으로 뒤덮인 땅에서도 하늘의 소망과 그분의 은총만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한밤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캄캄한 한밤중에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노래를 부르는 나이팅게일처럼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줄탁동시(啐琢同時)라는 벽암록에 나오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병아리는 안에서 껍질을 쪼게 되는데 이것을 '啐' 이라하고, 어미닭이 그 소리에 반응하여 바깥에서 껍질을 쪼는것을 '啄'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려는 순간 미약한 힘으로 채 껍질을 깰 수 없을 때, 동시에 어미닭이 밖에서 그 동일한 지점을 쪼아 깨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줄탁동시( 啐啄同時)는 즉, 안과 밖에서 함께 해야, 일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의 말로 이 두 역할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부화”가 가능하다는 비유입니다.

저는 하박국이 살았던 그 시대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나, 고사성어가 주는 의미처럼 어둠 속 알을 깨고 세상의 빛을 보려고 하는“생명의 부화 과정”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반응에 하나님의 사랑이 만날 때 그 속에서 아름다운 생명의 역사는 있게 되겠지요. 

경제도 어렵고, 이 시대 가운데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어렵지만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를 만지심으로 인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대림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여기에 주님 오심을 기뻐하고, 기대하며 촛불을 하나 켰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에도 소망의 촛불을 켭시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그 말씀이 나의 고백이 되도록 합시다. 

또한 우리들 한소망 공동체의 고백이 되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찾아오셔서 줄탁동시의 은혜를 부어주신 것처럼, 지금도 삶의 어려움과 고난으로 인해 누군가의 줄탁동시의 은혜를 기다리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우리들이 그 자리에서 담대히 그 껍질을 쪼아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소망 공동체 모두가 더욱 따뜻하고 감격스러운 성탄의 기쁨을 맞이하기를 축복합니다.

당신으로 인해 나는 기쁨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과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일 예수님이 오셔도 나는 감사합니다라는 종말신앙의 고백이 뜨거운 예배의 감격과 함께 나이팅게일의 노래로 울려퍼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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