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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 안에서 기쁨을 누리자 (요일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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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 기쁨을 누리자 (요일 1:1~4)

어떤 청년이 늦은 시간 4호선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대부분 띄엄띄엄 앉아있고 그 청년 앞에는 술에 취한 듯한 아저씨가 앉아계셨다. 
갑자기 아저씨가 청년보고 이리 와보라고 손짓을 한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다가갔다. 옆에 앉으랜다. 
아저씨 왈 "이 지하철 기름으로 가는거 맞지?" 
청년이 "아니요. 전기로 가는 거죠..지하철은.." 
그러자 아저씨가...."헉! 이런.." 
그러시더니 다음역에서 후다닥 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가다가 방송으로 이런말이 나왔다. 
"이번역은 길음. 길음 역 입니다. 내리실문은..." 

오랫동안 살면서 매일 부부싸움을 하던 노부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싸울 때마다, 
"내가 죽으면 무덤을 파고 올라와서 당신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꺼야!!" 

이 말을 들은 이웃들은 할아버지가 죽어서 정말로 따라오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떨며 살았습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죽고 간단히 장례를 치렀는데, 할머니가 아무 걱정 없이 친구들과 파티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웃들이 다가가 걱정스레 물었다. 
"할머니.. 무섭지 않으세요??" 

그러자, 할머니가 하는 말.. 
"그 영감탱이, 열심히 땅 파라구 그래. 내가 관을 뒤집어서 넣어놓았으니까!!" 

성도 여러분! 힘들수록 웃으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격려 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서로 옆 사람을 보시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웃으며 살려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기쁨만 있으면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기쁨이 있어서 감옥에서도 성도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기쁨이 있으십니까? 지금 마음이 즐거우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은 다 기쁨을 소유하시고 돌아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살게 하신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에는 부족한 것이 없는, 현대어로 표현하면 "파라다이스" 였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천국과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은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두시고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의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람을 기쁨에 동산에 두시고, 기쁨 가운데 살게 하셨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기쁨 가운데 살지 못하고, 늘 불안과 짜증과 다툼과 분쟁속에서 힘들어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삶속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다시금 기쁨을 주기 위해 기록했다고 합니다. 4절에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사도요한은 오늘 요한일서를 쓴 목적이 바로 성도들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 본문을 기록 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쁨을 찾고, 소유하며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쁨이 충만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초점이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헬라어 원문에서 살펴보면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 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요한은 강조점을 생명의 말씀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강조점도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 안에 참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초점이 되면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됩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신 후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 마을로 가라고 하신 후 예수님은 기도하시다가 밤 사경이 되었습니다. 사경은 새벽 3시 경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은 저녁 무렵에 출발했는데 호수에 바람이 일어 더 이상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새벽 3시까지 호수에서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벽 3시경에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배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배 가까이 가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령으로 착각하며 소리 질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니까 두려워 말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들은 제자들은 유령이 아니라 주님이신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때 성질 급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정말 주님이시면 저를 명하사 물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해 보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오라" 하시자,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서 주님 곁으로 갑니다. 가다가 보니 갑자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생기니까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 순간 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자 얼른 "주님! 나 좀 살려 주세요" 외칩니다. 주님께서 살려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을 하였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옆에 풍랑을 보면 두려움이 생기고, 물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만 보고 걸어가면 물위를 걷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도 포커스가 주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남편에게 맞추어져도 안됩니다. 아내에게 맞추어 져도 안됩니다. 자식에게 맞추어져도 안됩니다. 돈에 맞추어져도 안됩니다. 일에 맞추어져도 안됩니다. 우리의 초점은 예수님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은 주님입니다. 남편과 자식과 아내는 사랑하며 섬기는 존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남편에 초점을 맞추어 살다보면, 남편이 실망을 주면 낙심하게 됩니다. 아내에게 초점을 두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자식에게 초점을 많이 두고 있는데, 나중에 부모의 공을 몰라주면 섭섭해집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초점을 두면 모두가 행복해 지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초점이 예수님이 될 때 우리 안에 기쁨이 넘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만이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님 안에 능력이 있고, 예수님 안에 소망이 있고, 예수님 안에 참된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고, 들었다고 했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그의 인생이 바뀌었기에 지금 이 예수님을 너희에게 전한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기쁨이 생깁니다. 눅 19장에 세리장이 삭게오도 예수님을 만나고 기뻐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으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습니다. 
간음하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도 너의 죄를 정죄치 않겠다 하신 말씀을 듣고 그의 인생이 바뀌며 새로운 인생이 됩니다. 

 저도 처음에 예수님을 만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자 내 안이 있던 원망과 불평, 두려움이 제거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알지 못하는 평안과 기쁨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보면 예수님을 만나 얼굴이 펴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교회 처음 오셨을 때는 무뚝뚝하고 얼굴에 웃음도 없고, 퍽퍽해 보이시던 분들이 이제는 늘 웃고 다니며, 예배에도 성경공부 모임에도, 목장 모임에도 잘 오시는 것을 보면 주님을 만나도 제대로 만났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인격적을 만나면 기쁨이 생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 모두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는 기쁨이 있었는데 지금도 기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을 늘 유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쁨을 늘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간단합니다. 매 순간 주님을 만나시면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십니까? 라는 책을 쓴 후안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신 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며, 출근하려 할 때, 일을 하면서 언제든지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 책을 반드시 사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개정판이 나왔는데, 9,500원입니다. 필독서로 지정합니다.  
성장하길 원하시고, 변화되길 원하시는 분은 3번 이상 읽으십시오. 너무 좋은 책입니다. 
  

세 번째는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 이 사귐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사귐입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8장 47절에 하나님께 속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말하고 있습니다. 

요14장 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기쁨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고 그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기쁨이 넘칩니다. 반대로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으면 기쁨이 사라지고 근심과 죄책감이 마음이 가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근심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이 “계명을 지켜라” 말씀하자 “어떤 계명입니까?” 묻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러자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나이다.”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네가 정말로 온전하고자 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말합니다. 이 말은 들은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가니라 했습니다. 이 청년이 이 말씀에 순종했다면 엄청난 기쁨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는 사람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성도들 끼리 서로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서로를 섬기고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성도간에 사귐이 있으면 기쁨이 넘칩니다. 

요한일서 2장 9-11절에 보면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성도간에 진정한 사귐이 없고, 막힌 것이 있으면 우리 안에 기쁨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미움이 있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기쁨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기쁨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사귐도 온전한 사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5장 23절에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말씀합니다." 

성도님들 서로 서로를 볼 때 마다 기뻐하며, 축복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 신앙이 살고, 내 마음에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혹시 우리 가운데 마음이 안들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화해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영국의 어떤 가정에서 치약 하나 때문에 이혼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꼼꼼해서 치약의 맨 끝에서부터 짜서 쓰는데, 부인은 주의가 깊지 못하고 무엇이나 대강대강 해치우는 성격이라 치약도 허리 부분을 아무렇게나 짜서 쓰고 팽개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늘 투덜대다가 급기야는 심하게 다투고 결국 이혼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르냐 하는 것만 따지는 생활은 남도 죽이고 나도 죽는 생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 하는 차원을 넘어서 어떤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둘 다 사는 길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이며, 정의를 넘어서는 것이며, 함께 사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기는 삶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먼저는 사랑을 베푸는 생활이 이기는 비결입니다. 
여러해 전에 중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심한 가뭄이 들어서 농부들이 물 싸움을 할 때인데, 한 성도가 밤을 새우며 자기 논에 물을 대놓고 새벽녘에 집에 들어가 잠깐 눈을 붙이고 가보니 쾌심하게도 아래의 논 임자가 논둑을 터서 물을 다 훔쳐 자기 논에다 대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 정도는 참아야지." 하고는 그날 밤도 다시 자정이 넘도록 논에 물을 댔습니다. 

새벽에 들어와 한숨 자고 나가 보니까 또 물을 빼간 것이었습니다. 당장 쫓아가서 분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목사님을 찾아가 그 억울함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누가 옳고 누가 틀렸냐를 묻기보다 당신도 살고 그 사람도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두 번이나 속아 주었으니 한번더 빼앗긴 셈치고 이번에는 아래 논에다 먼저 물을 대주고 당신의 논에 물을 대 보십시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성도는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래 논 주인이 울면서 달려와 "내가 그렇게 잘못을 했는데도 이번에는 내 논에다 물까지 대주셨습니까? 저도 당신을 따라 예수를 믿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옳고 그른 차원을 떠나 사랑을 베풀었더니 그 영혼도 회개하고 구원까지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친절을 베풀 때 이기게 됩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친절해야 합니다. 한국 전쟁 때 인민군들이 후퇴하며 한 집사님을 붙잡아다가 무거운 군수품을 짊어지우고 뜨거운 불볕 더위에 20리를 가자고 하더랍니다. 그때 이 집사님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웃으면서 짐을 지고 갔습니다. 20리를 다 가서 내려놓으라고 하는데도 그는 괜찮습니다. 아직 더 갈 수 있습니다. 하면서 10리를 더 갔더니 인민군이 “수고했소. 이젠 됐으니 내려놓으시오” 하며 하는 말이 “사실 20리 지점에서 당신을 총살하려고 했는데 당신의 친절에 감동이 되어서 살려주니 어서 가 보시오” 하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지나치게 자기의 권리와 정의만 주장하면서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 하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흑백논리를 좋아합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만 따지며 이론만 내세우는 사람은 혈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모두가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사랑하며,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나가 아니라 우리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나에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은평이가 조금 말을 하고 무엇인가 알아보기 시작할 때, 무조건 모든 것이 지껏이라고 했습니다. 무조건 잡으면 내꺼 내꺼 합니다. 조금 크니까 엄마꺼, 아빠꺼를 정확하게 압니다. 그래서 내꺼, 아빠꺼, 엄마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별거 아닙니다. 저에게는 은평이꺼, 엄마꺼, 아빠꺼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우리 것입니다. 엄마꺼도 아빠가 쓸 수 있고, 아빠 것도 엄마가 쓸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모든 것이 우리 것 입니다. 그러나 은평이는 아닙니다. 엄마꺼, 아빠꺼, 은평이꺼입니다. 그리고 은평꺼는 절대로 다른 사람이 써서는 안됩니다. 

성숙하지 못하면 자기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숙하면 내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 됩니다. 신앙도 처음에는 나를 축복해 주세요. 나를 만나 주세요. 오로지 납니다. 다윗도 시편 18편에 보면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주는 나의 산성이며, 나의 요새시며, 나의 피할 바위시며 ..... 오로지 납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윗이 시편 60, 68, 108편에 보면 우리로 바뀝니다. 
시편 60편 1절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처음에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입니다. 

교회에서도 이제 나만, 내 목장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교회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지기 바랍니다. 나에서 우리로 가야 합니다. 
 이제까지 나만 위해서 기도했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쁨 가운데 거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출 때 주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며 그분과 늘 동행할 때 주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때 주어집니다. 

날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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