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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나의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 (시 1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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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 (시 130:1~8)


유대인들이 지키는 종교적인 절기 가운데 유월절이라는 최대의 절기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경축일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면서 꼭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니마민’이라는 노래입니다. ‘아니마민’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나치스가 유대인들을 가장 많이 죽였던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곡을 쓰고 노래를 만든 사람들은 그 수용소에 갇혔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니마민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시리라는 것을 믿는다오. 그러나 조금 늦게 오신다오. 나는 믿는다오, 나는 믿는다오. 영원한 평화의 그 날이 땅위에 오리라 나는 믿는다오. 그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더딜지라도 오리라 나는 믿는다오.’   

내일이 없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실 자가 오실 것이라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나는 믿는다오. 나는 믿는다오. 영원한 평화의 그 날이 땅위에 오리라 나는 믿는다오.’ 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 고난의 날들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지옥과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나와서 이스라엘을 다시 재건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이 되면 지금도 ‘아니마민’을 부르며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거룩한 꿈을 품고 그 꿈이 이뤄질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면서 깨닫습니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저에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1963년 8월 28일에 워싱턴 광장에서 했던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이었습니다. 루터 킹 목사님은 그의 마지막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 중에 몇몇은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겪고 여기에 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창조적인 고통을 겪는 선구자들입니다. 부당한 고통은 구원적 성격을 띤다는 믿음을 지니고 계속 행동하십시오. 

이 현실이 변화될 수 있고, 변화될 것임을 인식하고 미시시피로 돌아가고, 알라바마로 돌아가고, 남캐롤라이나로 돌아가고, 죠지아로 돌아가고, 루이지애나로 돌아가고, 남부 도시의 빈민가로 돌아갑시다. 절망의 골짜기에서 빈둥거리지 맙시다. 

나는 언젠가는 피에 물든 죠지아의 언덕에서 옛적 노예의 아들과 옛적 노예 소유주의 아들들이 형제애가 넘치는 밥상에 함께 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억압과 불의의 열기로 시달리고 있는 미시시피주 마저도 정의와 자유의 오아시스로 변모할 것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나의 네 명의 어린 자녀들이 그들의 피부 색깔에 의해 판단 받지 않고 그들의 인격에 따라 판단 받을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간섭과 약속 파기를 밥 먹듯이 입에 담고 다니는 알라바마의 악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를 물리치고, 어린 흑인 소년 소녀들이 같은 형제 자매인 어린 백인 소년 소녀들과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모든 골짜기가 높아지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며, 거칠은 땅이 평평해지며, 구부러진 땅이 펴지며 주의 영광이 드러나 모든 사람들이 주의 영광을 함께 보게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피부 색깔이 검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노예와 같은 차별을 받는 세상 속에서 희고 검은 피부 색깔을 뛰어 넘어 모두가 하나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열정적인 삶을 살았고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의 고귀한 꿈은 40여년이 지난 오늘 흑인과 백인의 혼혈아로 태어난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됨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꾸었던 위대한 꿈이 현실로 이뤄지는 것을 우리들은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꿈이 현실로 이뤄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 I have a dream’ 이라는 연설을 할 때 버락 오바마는 두 살의 어린 아이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위대한 꿈은 그 연설을 들었던 한 어린 소년의 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 꿈이 현실로 이뤄질 때까지는 오랜 인내와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른노래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는 누가 지은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 시기에 지는 시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며 그들을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고통과 눈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인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삶을 돌아 보았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 그리고 부와 쾌락을 누리고 즐기기 위해 하나님은 멀리하고 불순종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들의 죄와 고통을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본문을 읽어보면 고통과 슬픔 가운데 빠져 있는 시인의 마음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1-3절까지를 읽어보면 

‘야훼여,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오니, 주여, 이 부르는 소리 들어 주소서. 애원하는 이 소리, 귀 기울여 들으소서. 야훼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깊은 구렁 속에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쳐 나올 수 없는 깊은 절망과 고통 속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탄식과 한숨만을 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며 4절 이하에서 이렇게 고백하며 희망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는 야훼님 믿고 또 믿어 나의 희망이 그 말씀에 있사오니,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옵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이스라엘의 야훼를 기다리옵니다. 인자하심이 야훼께 있고 풍요로운 속량이 그에게 있으니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리라 그 모든 죄에서 구하시리라’ 

시인은 바벨론 포로 생활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의 희망이 그 말씀에 있사오니’ 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품는 희망을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을 반복함으로서 자신의 간절함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 보다도 더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군대에서 전방 철책 초소에 근무하면 겨울에 전방은 얼마나 추운지 모릅니다. 방한모를 쓰고, 방한복을 입고, 방한화를 신고 있으면서도 발이 시려워서 콩당콩당 뜁니다. 방한모로 얼굴을 감싸고 있지만 얼굴이 시려워 광대뼈를 부지런히 비벼됩니다. 밤새 보초를 서다 보면 배가 고픕니다. 무엇보다도 적의 공격으로부터의 두려움과 혼자라는 외로움이 밀려 옵니다. 보초들의 유일한 희망은 새벽이 밝아 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방이 적들로 둘러 쌓여 있었습니다. 파수꾼은 사방의 적으로부터 있을지 모르는 공격의 공포와 외로움, 그리고 사막의 기후로 인한 맹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파수꾼은 온갖 어려운 환경들을 이겨내며 오직 새벽이 밝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새벽은 두려움과 긴장감 그리고 추위로 떨고 있던 파수꾼들에게 쉼과 평안을 줍니다. 그러기에 파수꾼들을 새벽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데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림 보다 더 사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부터 자유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으로부터의 자유를 사모하는 이스라엘의 기다림은 70년간 이어졌습니다. 70년간의 기다림 후에 이스라엘은 베벨론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축복된 자리에 선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다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ale고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꾸고 그 꿈이 이뤄질 때까지 20년이 넘도록 기다렸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 후에 하나님 아버지의 부활시키심을 믿고 사흘 동안을 무덤에서 기다리셨습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믿음의 기다림은 어쩔수가 없어서 기다리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믿음의 기다림은 약속과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3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려오니’ 여기에서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물어’ 라는 한마디로 시간적인 설명이 족할텐데 왜 ‘해질 때에’라는 말을 덧붙였을까요. 왜 ‘저물어 해질 때에’ 라고 ‘때’를 되풀이 하면서 강조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해가 저물기를 간절히 기다림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안식일에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병을 고침 받기 원하는데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토요일 오후 6시가 지나면 안식일이 끝납니다. 그들은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이런 상황을 묘사하면서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이 안식일이 끝나는 해지는 때를 얼마나 사모하며 기다렸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인데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4주 주일 전부터 시작해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대림절에는 제단에 네개의 초를 세워 놓고 한 주가 지날 때마다 촛불을 하나씩 밝히며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대림절은 아기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대림절은 믿음 안에서 기다림의 훈련 기간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심을 믿을 때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에서도 ‘아니마민’ ‘나는 믿는다’를 노래하며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각 가정에서 커다란 초를 네개를 구입하셔서 주일 저녁에 가족이 함께 촛불을 하나씩 밝히며 어두움 속에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사모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네 주에 걸쳐 촛불을 하나씩 밝혀 가며 개인과 가정, 그리고 우리의 일터와 교회,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이 깃들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림 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사모하는 성도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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