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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눈 (요 9: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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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 (요 9:35~41)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 절하였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말하였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 눈 하나 뜨지 못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절기를 가리켜 대강절, 강림절이라고도 부르는 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림절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듯싶습니다. 대강절, 강림절에 들어있는 ‘내릴 降’ 자는 자칫하면 주님께서 위에 계시다가 아래로 내려오시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공간을 위계적으로 파악합니다. 위는 선하고 상서롭고 아름답고 아래는 악하고 불길하고 추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때의 ‘하늘’은 저 푸른 하늘이나 어떤 특정한 공간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니 계신 데 없으시고,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질서 속에 계신 분이라는 외경심이 담긴 은유(metaphor)입니다. 하늘은 위/아래가 없습니다. 

대림절은 오늘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다가오심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삼지사방으로 분산되어 있는 우리 정신을 純一하게 모아야 합니다. 욕망으로 부푼 마음을 내려놓고,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던 마음도 내려놓고, 마음을 깨끗하고 고요하게 비워야 합니다. 오늘부터 성탄절 전 주까지의 전례색은 보라색입니다. 지금 제가 두르고 있는 領帶(stole)도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참회의 색인 동시에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삼가는 것을 나타내는 색입니다. 주님은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만 만나 뵐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 뵙기 원하십니까? 그분을 만나면 무슨 말씀을 듣고 싶습니까? 또 무엇을 구하고 싶습니까? 여리고 길 가에 앉아 있던 눈먼 거지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꾸짖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부르시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고 묻자 그는 즉시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자,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막10:46-52).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바디매오가 부럽습니다. 병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꿈에도 잊지 못할 소망 하나를 간직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느닷없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결국 인생은 눈 뜨기를 배우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구상 시인은 노년에 이르러 두 이레 강아지 만큼 은총에 눈을 뜨니 세상에 은총 아닌 것이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눈을 뜨는 데 70년 이상이 걸렸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사람을 영어로는 ‘enlightened person’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 속에는 ‘light’ 곧 ‘빛’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어두컴컴한 마음에 불이 밝혀진 사람이 곧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더 이상 無明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지 않습니다. 눈 하나 뜨지 못해 우리 인생은 고달픕니다. 은총 안에 살면서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니 우리는 늘 가난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면 바디매오처럼 청하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 다시 보고 싶습니다.” 


• 도그마의 포로가 된 사람들

오늘 본문에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스스로 등장했다기보다는 역사의 무대에 끌려나왔습니다. 길을 가던 제자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 눈 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사람들은 불행의 원인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일에 익숙합니다. 주님은 원인과 결과의 도식을 가지고 이 현실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면서, 하나님의 뜻은 당신이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그를 불행에 빠뜨렸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의 관심은 현실을 교리적, 신학적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을 온전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는,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 이적에 놀랐습니다. 여기까지라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다른 치유 이야기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가 시작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앞을 보게 되었으면 함께 축하해주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그게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일의 자초지종을 다 들은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 예수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다른 이들은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표징을 행할 수 있겠느냐며 갑론을박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빛을 되찾은 사람의 기쁨에 동참할 마음의 여백조차 없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심판관인 양 남을 판단하는 일에는 익숙할 뿐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옛날에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시장에 가는 길에 신발 하나를 사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노끈으로 발 크기를 쟀습니다. 시장에 도착했는데 노끈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혀를 차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 발(實體)이 거기 있는 데도 그는 노끈(그림자)에만 정신이 팔렸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꼭 그렇습니다.

설왕설래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을 뜬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는 서슴없이 “그분은 예언자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윽박지르듯이 말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처럼 오용되는 말이 없습니다. 큰 교회당을 짓고, 헌금을 바치고, 말끝마다 ‘주님, 주님’ 한다고 과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 곧 생명이 온전해지고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며 사는 세상을 위해 헌신할 때 드러나는 실체입니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9:25)

촌철살인입니다. 눈 뜬 사람의 대꾸는 유순하지만 안다 하는 이들의 허위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줍니다. 그가 하는 일이 그가 누구인지를 증거합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좋은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가 없습니다. 주님도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요14:11). 바리새파 사람들은 논리가 부족해지자 점점 조급함을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예수를 믿을 수 없는 까닭은 그가 근본을 알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고침을 받은 사람은 마치 못을 박듯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시는 줄을, 우리는 압니다.”(9:30-31)

마치 지혜자의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기들의 오류나 편견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논리가 궁핍해지고, 패배를 시인하기 싫을 때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그들은 그를 바깥으로 내쫓았습니다. 이 때 ‘바깥’은 실외를 뜻하는 말이기보다는 회당에서 축출했다는 말일 겁니다. 이 말은 공동체적 삶에 참여할 자격을 박탈했다(ex-communication)는 뜻입니다. 차라리 잘 모르겠다고 납작 엎드렸다면 쫓겨나지는 않았을 텐데 괜히 바른 말을 하다가 그는 큰 시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 울타리 밖으로

그가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신 주님을 그를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분이 누구냐”고 묻는 그에게 주님은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주님께 엎드려 절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어려운 진실과 만나게 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자리는 기득권자들에게 쫓겨난 자리였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한 평생 교회에 출입하면서도 주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는 까닭은 안주의 울타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삶의 관성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도 유대교와 로마 제국에 의해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래서 예수께서 자기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자고 말합니다(히13:13). 루터도 쫓겨났고, 웨슬리도 쫓겨났습니다. 성공회에서 설교권을 박탈당한 그는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설교를 했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새로운 세계는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십니다. 눈멀었던 사람, 이제는 공동체의 울타리 밖으로 쫓겨난 사람에게 주님은 당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알리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39)

여기서 말하는 ‘못 보는 사람’은 자기의 무지함을 자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배우려는 사람입니다. 그는 결국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보는 사람’이란 스스로 본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은 배울 마음이 없습니다. 자신이 장님이면서도 장님인 줄을 모릅니다. 그렇기에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게 됩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울은 스스로 ‘본다’는 자부심에 가득 찼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환한 빛 앞에서 소경이 된 것은 은총이었습니다. 자기의 눈멂을 자각할 때라야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으니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냐?”고 불퉁거립니다. 주님은 다만 탄식하실 뿐입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41b)


• 인당수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대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자기 확신이 강할수록 ‘자아'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남에게 곁을 주지 않습니다. 여백이 없어 답답합니다. 그들은 남들을 쉽게 판단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나는 옳다’는 확신은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르다'는 부정적 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어느 분이 광어는 ‘편견’에 가득 찬 물고기라고 농담을 하더군요. 광어의 눈이 몸 한쪽에 치우쳐 있기에 하는 말이겠지만, 사실 그분은 넌지시 우리야말로 광어族이 아니겠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자기에 대해서 긍정적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자기 눈에 비늘이 드리워있음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눈을 뜬 사람은 부드럽습니다. 그는 풀꽃 하나 속에 깃든 우주를 봅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그런 진실을 가르쳐줍니다. "꽃은 참 예쁘다 풀꽃도 예쁘다/이 꽃 저 꽃 저 꽃 이 꽃/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이게 진실입니다. 눈을 뜨고 보면 삶은 신비입니다. 눈 하나 뜨지 못해 우리는 지옥을 만들며 삽니다. 어떻게 해야 눈을 뜰 수 있을까요? 물론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 주님의 마음을 얻으면 눈은 저절로 열립니다. 주님의 마음, 그것은 세상의 온갖 아픔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심청가를 잘 아시지요?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줄 공양미 삼백 석을 받기로 하고 뱃사람들에게 팔려가 인신제물로 바쳐진 곳은 인당수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이 황해도 장산곶 앞 바다 어디쯤이라고 합니다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다만 유독 제 시선을 끄는 것은 ‘인당수'라는 말입니다. ‘印堂'은 한자로 양쪽 미간 사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로부터 사람들은 제3의 눈이 미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 맹인의 눈뜨는 이야기와 인당수라는 지명이 연결되는 것은 이 지점입니다. 아버지의 눈이 떠지기를 소망하며 심청이가 뛰어든 그 인당수야말로 영의 세계가 열리는 지점이었습니다. 하늘의 옥황상제도 차마 그를 죽게 할 수 없어 남해의 용왕을 시켜 그를 구합니다. 이야기는 심청이 삼 년을 그곳에서 지낸 후 연꽃에 실려 인간세계로 나와 황후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배설한 잔치 자리에서 딸과 만난 심학구의 눈은 그제서야 열리게 됩니다. 그 순간 다른 눈먼 이들의 눈도 여름 하늘의 번개같이, 예서 번득 제서 번득 일시에 다 열렸습니다. 

그들의 눈뜸의 시작은 바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인당수였습니다.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어 자기를 희생한 그 자리야말로 제3의 눈이 열리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인당수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려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 아래 서 있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고 고백했습니다. 눈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막 대림절기의 순례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인당수에 뛰어들고 계십니다. 그 사랑을 아십니까? 그 희생을 아십니까? 지금 우리는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계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태우고 땀 흘리는 자리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이고, 우리 마음의 눈이 열리는 인당수임을 잊지 마십시오. 마음의 눈 하나 열리면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지만, 그 눈 하나 뜨지 못하면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어도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 대림절에 사랑과 헌신을 길을 걸어 마침내 우리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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