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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족장들의 예물 (민 6:22 ~ 민 7:88) : 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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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족장들의 예물 (민 6:22 ~ 민 7:88)

  
성도가 헌금을 하는 경우와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왜 헌금의 종류가 그렇게 많아야 하는가?'하고 의아심이나 혹은 불만까지 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교회에서 실시하는 모든 종류의 헌금은 하나도 예외가 없이 다 성경 말씀 속에서 그 명백한 명령이나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보통 헌금들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고, 심지어는 '특별히 제한된 사람들이 일정한 액수의 헌금을 똑같이 나누어 내는' 헌금, 우리 교회의 예를 들자면 임직자 특별헌금 같은 것까지도 그 뚜렷한 실례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펼치고 있는 본문이 그와 같은 특별헌금의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본문 7장 2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족장들" 곧 "종족의 두령"과 "감독"된 자들이 예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 특별 "봉헌 예물"(7:88)은 전 이스라엘 백성이 다 함께 드린 예물이 아니라 그 중에서 지도자 위치에 있는 자들만 대표로 바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또 7장 3절에 보면 그 예물의 액수도 "족장 둘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하나에 소가 하나씩"으로 모든 족장들이 똑같은 분량으로 바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족장'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슨 봉급을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장로나 집사와 마찬가지로 남들보다 더 많이 봉사해야 할 의무만 있는 것이 그들 직분의 성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특별한 예물을 드림에 있어서도 이처럼 일반 백성들보다 더 앞장섰던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이런 모습은 정말 무슨 고생을 사서 하는 일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그 어려운 광야생활을 하는 중에도 그처럼 몸으로 섬기는 봉사에다 물질로 드리는 헌금까지 더하여서 그야말로 남김없이 자기 인생 전부를 다 하나님께 바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의 2008회계연도를 마감하는 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이 구약 시대 성도들이 보여 준 본을 통하여 우리 신약교회 성도들의 헌금생활이 어떠해야 마땅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헌금은 하나님께서 먼저 내려 주신 축복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사의 반응입니다. 

이 족장들의 특별예물이 바로 그와 같은 동기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본문 6장 22절부터 27절에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3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은 후에 그와 또 다른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어떻게 축복기도를 드릴 것인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그 축복의 내용은 24절 이하 세 절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 절마다 "여호와"의 이름이 반복되고 이어서 두 개의 동사가 따라 나오는 문장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볼 때에는 굳이 '여호와'란 이름을 세 번씩이나 반복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이 축복의 근원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그 같은 의도는 27절에서 종합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말씀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는 말씀에서도 더욱 뚜렷이 나타납니다.
더욱이 여기의 "내가"라는 말도 히브리 문법상 '특별 강조형'으로 기록된 단어인 것입니다.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지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복은 '자식, 부, 땅, 건강, 하나님의 동재' 등으로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일단 "주신" 복을 또한 "지켜" 주시는 것이 복 받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또한 "그 얼굴을 비춰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해 주실 때 그 접근 방법이 "은혜"라는 사실은 정말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그것이 만일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길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이 헐릴 길도,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고 응답받을 길도 전혀 가망 없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얼굴을 드시고 평강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얼굴을 드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형편에 대하여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여 주신다는 뜻이며, 그런 하나님의 보살핌이 있는 한 그 사람은 어떤 경우를 당해도 다 평안한 만사형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막이 세워진 후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 드리는 상번제가 끝날 때마다 바로 이런 축복을 백성들 앞에서 선포했었으며, 훨씬 후기에 회당에서 예배드릴 때까지도 이 축복의 선언은 매일 계속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복을 주신다.'는 이 축복의 선언이 왜 갑자기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은 바로 앞에 나오는 '나실인의 규례'와는 문맥상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로 뒤에 이어지는 7장의 내용을 통해서 정확히 찾을 수 있습니다.
  
7장은 성막과 제단을 위하여 족장들이 드린 특별 예물을 기록하고 있는데, 제사장이야말로 성막이나 예물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직결되는 직분입니다.
즉 여기서 '제사장'은 바로 '족장'들과, 그리고 제사장의 '축복'은 족장들이 성막과 제단을 위해 바친 '예물'과 나란히 병행대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축복하시고 백성은 이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써 예물을 바치고 그 뒤에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그들에게 내리시는 패턴은 구약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축복이 그 얼마나 크고 귀한지를 진심으로 체험하는 성도라면 그 하나님께 자신의 정성된 예물로써 반응하게 되는 것은 마치 영적 반사 작용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각양 좋은 축복을 직접 맛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큰 교회 짓는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불신자들로부터 상투적으로 나오는 비판이 "그렇게 크고 화려한 교회를 짓느니보다 그런 돈으로 사회사업이나 더 많이 하지."하는 말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 정말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은 그런 교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의 크기와 그에 대한 감사의 깊이입니다.
이 장망성 같은 세상에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워지고 거기서 기름 부음 받은 사자(使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과 은혜와 평강이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그 축복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체험하게 될 때 그런 성도의 심령이 어찌 감사로 감화감동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광야행군 중에도 성막을 통해 내려 주시는 축복을 기억하면서 예물을 바쳤던 것처럼, 오늘날 바로 교회를 중심으로 베풀어 주시는 영육 간의 넘치는 은혜와 축복들에 대하여 뜨겁게 감사드리는 순수한 마음으로써 정성스러운 헌금을 기꺼이 바쳐 드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헌금은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바쳐야 합니다. 

이스라엘 족장들의 첫 번째 특별예물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7장 1절 이하 9절에 "1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필하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 2이스라엘 족장들 곧 그들의 종족의 두령들이요 그 지파의 족장으로서 그 계수함을 입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예물을 드렸으니 3그들의 여호와께 드린 예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과 소 열둘이니 족장 둘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하나에 소가 하나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 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5그것을 그들에게서 받아 레위인에게 주어 각기 직임대로 회막 봉사에 쓰게 할지니라 6모세가 수레와 소를 받아 레위인에게 주었으니 7곧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그 직임대로 수레 둘과 소 넷을 주었고 8므라리 자손들에게는 그 직임대로 수레 넷과 소 여덟을 주고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로 감독케 하였으나 9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특별예물은 '성막과 거기 속한 기구가 다 완성된 때'에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과 기구에 기름을 바르고 성별케 하는 봉헌식이 끝나자마자 곧 필요한 것이 생겼는데 그것이 곧 그 성막과 기구를 운반할 때 필요한 운송 장비였습니다.
  
이 사실은 여기서 족장들이 드린 "수레 여섯과 소 열둘"의 예물을 성막을 수종드는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9절에 있는 대로 레위 지파 중에서도 고핫 자손들에게는 이 운송 장비들이 전혀 배분되지 않은 것은, 그들은 성소에 속한 비교적 가벼운 기구들을 "어깨로 메어" 운반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하여 보다 무거운 것들, 즉 장막이나 휘장 등 천으로 만들어진 비품들을 운반하는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수레 둘과 소 넷"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장 무거운 기구들, 즉 기둥이나 널판이나 금속 받침 등 중장비들의 운반을 맡았던 므라리 자손에게는 "수레 넷과 소 여덟"이라는 가장 많은 운송 장비가 지급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성막은 잘 알다시피 이동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성막이 일단 완성되었을 때 가장 급한 것이 바로 그런 운송 장비였고 바로 그것을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담당하여 특별예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이 족장들은 사실 바로 그 성막을 짓기 위해서도 많은 예물을 바쳤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큰 헌금을 드리고 이제 겨우 성막이 완성되어 조금 숨을 돌리게 되었다 싶었을 때 곧 이어서 또 그런 운송 장비가 마련되어야 함을 이 족장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예배당을 짓기 위해 힘을 다해 헌금을 바쳤는데 다 짓고 나니 그 새 성전 안에 들여 놓을 여러 가지 비품들이 필요하게 된 경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바로 그런 경우를 맞이하여 결코 힘들다고 발뺌하지 않고 지금 완성된 성막을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을 또 한 번 정성껏 힘을 모아 바쳤던 것이었습니다.

성도가 헌금하는 자세가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에 필요한 것이 나타나면 일단 그것부터 충족시키기 위해서 최우선적으로 자신의 힘을 다 바치는 것이 지극히 합당한 자세인 것입니다.
교인들 가운데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점에 있어서 정반대의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형편'을 기준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교인들은 '내가 형편이 괜찮아지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바칠 수 있다.'는 식으로만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내게 여유 있는 돈이 좀 남아돌면 교회에 헌금도 할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가계를 꾸려 갈 때도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습니다.
'내게 남아도는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시장도 좀 보고 와야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일단 가족이 먹고 살아야 하겠다는 필요성이 인식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 필요를 채우려고 애를 쓰는 것이 가장이라면 누구나 다 당연히 하는 일입니다.
'내게 힘이 생기면 그때 가서 집세도 좀 내어야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사회에서 그래도 가장 기본적인 기반이라도 잡고 살려면 무엇이 어찌되어도 집세는 꼭 만들어야 하는 것이니까 다른 지출을 줄이든지 아니면 근무 시간을 늘려서라도 그 필요를 충족시켜내어야만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일'에 필요한 헌금을 바치는 것이 어떻게 '자기 힘이 남아돌면' 그때에 가서 천천히 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을 무슨 거지에게 주는 값싼 적선처럼 여기는 것은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그 복음 전파 사업에, 그 몸 되신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세심하게 찾아보고, 그것이 나타날 때마다 그 급선무를 위하여 즉시 바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헌금은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며 다른 성도에게도 본으로 남게 됩니다. 

이스라엘 족장들이 드린 두 번째 특별예물이 바로 그런 교훈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7장 10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에 "10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 족장들이 단의 봉헌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그 예물을 단 앞에 드리니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족장들은 하루 한 사람씩 단의 봉헌 예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 12제 일일에 예물을 드린 자는 유다 지파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라 13그 예물은 성소의 세겔대로 일백 삼십 세겔중 은반 하나와 칠십 세겔중 은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14또 십 세겔중 금숟가락 하나라 그것에는 향을 채웠고 15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년 된 어린 수양 하나이며 16속죄제물로 수염소 하나이며 17화목제물로 소 둘과 수양 다섯과 수염소 다섯과 일 년 된 어린 수양 다섯이라 이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의 예물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 "단의 봉헌"을 위하여 드린 예물이었습니다.
12절 이하에서 그 예물의 명세를 보면 "은반"과 "은바리" 즉 '은쟁반'과 '은그릇'에 채운 "기름 섞은 고운 가루"와 "금숟가락"에 담은 "향"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다 "소제물"의 기본적인 요소였습니다. 
그 외에도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로 소와 양들을 각각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드린 제물 목록에는 특별한 범죄가 있을 때 드리는 속건제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일상 제사용 제물들이 다 포함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예물을 족장들로 하여금 "하루 한 사람씩" 제단에 나아와서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7장 12절로부터 88절까지의 긴 부분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 열두 지파의 족장들이 하루 한 명씩 12일 간에 걸쳐 그 명하신 제물들을 바친 것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열두 번 반복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사람의 이름만 빼놓으면 나머지는 똑같습니다.
특별히 무슨 문장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런 내용을 읽다 보면, 그저 그 열두 족장들의 이름들만 기록한 후에 그 모두가 똑같이 드린 예물의 내용은 구태여 반복할 것 없이 단 한 번만 언급해도 독자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을 왜 이렇게 지루하게 반복해 놓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 말씀에 그 똑같은 내용을 '열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도합 '일흔 일곱 절'에 이르는 긴 문장으로 기록했겠습니까?
그것은 우선 하나님께서 그 각 족장들의 예물을 매번 개별적으로 받으시면서 각각 기억해 주신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열두 명이 똑같이 바쳤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무슨 '단체 헌금'으로 받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이름까지 성경 기록에 남겨 두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그 예물을 바친 모든 족장들을 개인적으로 하나하나 기억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 예물의 내용을 볼 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본보기가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제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드리는 제사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족장들은 바로 그 제단에 모든 백성들이 정기적으로 드려야 할 제물들을 자신이 제일 먼저 종류대로 빠짐없이 갖다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모든 지파와 모든 백성들이 다 참여하여 앞으로도 끊임없이 계속되어야만 할 것에 대하여 본을 보여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보통 제물을 언급할 때에 소제는 나중에 나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오히려 번제 같은 주요 제물보다도 앞에 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소제는 모든 제물들 중에서도 제사장의 생계에 주요 원천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제가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은, 제사장들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일에 대하여서도 백성의 지도자들부터 책임지고 앞장서겠다는 자세를 나타내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족장들의 두 번째 특별예물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각각 상세하게 기억해 주신 것인 동시에 백성들 앞에서 제단에 대한 의무에 본을 보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제생활에 대하여 우리에게 명하신 말씀이지 결코 일반 헌금생활에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도 과부와 부자가 각각 얼마만큼의 헌금을 드리는지를 보시면서 그 정성을 판단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의 바치는 헌금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보시고 기억하시는 것이며 '남보다 얼마나 많이 냈는가?'를 따지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정성껏 바쳤는가?'라는 절대평가로 항상 판단을 받고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헌금은 교회 앞에서도 공적인 행위입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바나바는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서 전액을 공식 헌금했고, 반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액수를 사도들 앞에서 속이는 바람에 온 교회 앞에서 책망을 받고 그 자리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헌금은 결코 무명헌금이 아니었던 것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내에서 다른 봉사생활을 드러내기 거북한 것으로 여겨 일부러 쉬쉬하고 숨기면서 하지는 않습니다.
  
교구 심방 때에 누가 음식 준비를 하고 오늘 주일에 누가 결혼감사로 특별히 제단꽃을 바쳤는지 왜 그런 교인의 이름을 밝혀서 은근히 내게 부담을 주느냐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가 그처럼 열심히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피차 본이 되고 서로 격려가 되지 않습니까?
  
헌금생활도 꼭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매주일 목사는 일일이 다 알 수 없는 많은 교인들이 많은 종류의 헌금들을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각 사람의 헌금을 하나도 빠짐없이 살피시고 기억해 주심을 깨닫는 가운데 늘 교회 앞에 본이 되고 다른 성도에게도 격려가 되는 헌금생활을 힘을 다하여 성실히 이행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그 삭막한 광야에 아름다운 성막이 세워지고 거기서 기름 부음 받은 거룩한 제사장들의 입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복과 은혜와 평강이 선포되는 축복의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그 심령이 감화감동되었습니다.
그들의 드린 예물은 그에 대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사의 반응일 뿐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막 대신에 주님의 몸 되신 교회가 세워졌으며 제단 대신에 갈보리의 십자가가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감사가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이라도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족장들은 성막을 만드는 동안에도 '생애 최고의 것'을 바쳤지만 그것이 완성된 직후에도 그 성막을 위해 가장 요긴하고 급한 것을 위해서도 연이어서 '생애 전부의 것'을 또 바쳤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만 하면 즉시 바치는 것 역시 우리 경향교회 성도들이 지난 35년 동안 부단히 행했던 헌금생활이었습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 같은 기본적인 헌금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그 외에도 무슨 수재민 구제헌금, 선교지 신학생 수술비 헌금, 선교사 차량구입 헌금, 그리고 이제 헌당완결을 위한 특별헌금에 이르기까지 하여튼 교회와 복음전파를 위해서 꼭 필요하고도 시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교회 당회는 즉시 헌금을 결정하여 시행했고 때로는 헌금을 일단 먼저하고 나중에 당회가 추인을 하더라도 결코 늦추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족장들의 예물이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것이었으며 또한 성경에 기록되어서 다른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었던 것 역시 신약 시대의 성도에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셨을 때에 마르다의 누이동생 마리아가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다 부었습니다.
  
그런 마리아를 보고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분내어 서로 말하며" "그 여자를 책망"했던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 26:10)고 그녀의 행위를 칭찬하였을 뿐 아니라, 또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 26:1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그 사건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말하여 기념되는' 모범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강서성전의 헌당기념관에 여러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매주일 드리는 여러분의 각종 헌금들이 다 개인헌금통계로 기록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와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께서 필요로 하시는 일에 기꺼이 바쳐서 그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해 주시는 신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이 '은혜로운 헌금생활'은 구약의 성도에게나 신약의 성도에게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일이 다 주의 크신 은혜'인 줄을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세계를 받은 교회'를 통하여 많은 선한 일들의 사명이 주어진 것을 오히려 기회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별처럼 높이 들리는 영광스러운 족적'을 자신의 헌금생활을 통하여서도 꼭 체험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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