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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손을 대는 자마다 (마 14: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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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대는 자마다 (마 14:34~36)


제가 목회를 했던 동경교회에는 일본 사랍대학의 명문인 게이오 대학의 축구 감독님이 예배에 출석하십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다가 믿음을 갖게 된 그 분은 최근에는 게임이 있을 때마다 경기장에 가는 길에 제게 전화를 해 게임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십니다. 기도와 축구경기,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는 종교와 운동은 너무 다른 분야라서 운동경기를 종교로 풀어간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모습이며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풀 때의 방법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지난 10월 20일에 있었던 축구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전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골을 넣은 이근호 선수와 박주영 선수의 골 세레머니도 역시 기도였습니다. 누가 봐도 저들의 신앙이 나타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난히 한국의 운동 선수들 중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하는 사람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는 좋게 보여도 모든 사람에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운동 경기에 있어서 실력으로 하느냐? 아니면 신앙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역사적으로도 많은 논란과 시비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그 중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사건을 하나 소개합니다. 

1942년 11월 28일 토요일, 미국의 보스턴 시는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보스턴 대학의 축구 풋볼경기를 보기 위해 수 만 명의 시민이 운동장으로 몰려들었는데 이유는 보스턴 대학이 개교 이래 처음으로 대학리그 전승으로 마지막 대회를 하는 날이었던 것이고, 그 역사적인 전승우승의 모습을 보기위해 스포츠 광인 보스턴 시민들이 경기장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그 해 보스턴 대학의 경기성적은 저본 적도, 비긴 적도 없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 중이었는데, 그들이 해석하는 좋은 성적의 비결은 그들이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해 선수들이 모두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늘 성실하게 연습했고 또한 시합에 임하기 전에는 간절히 기도하며 매 시합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 날 마지막 경기는 대학리그의 성적이 가장 나쁜 팀과의 경기였는데, 경기 결과는 하나마나 승리가 뻔 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학생과 시민들은 승패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시합 후의 전 도시에서 벌어질 술 파티에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보스턴 대학의 선수들도 연습보다는 전승우승을 위해 더 많은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가장 약한 팀과의 경기이지만 최선을 다 하자고 다짐하고 마지막까지 좋은 성적을 내개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며 시합을 준비했던 선수들과는 달리 보스턴의 대학 관계자들이나 시민들은 이미 전승 우승을 자축하면서 승리를 위해 시합 후의 파티를 이미 다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호각소리와 함께 시합이 시작되었는데, 그런데 사태가 아주 이상하게 진행이 됩니다. 보스턴 대학은 눈 깜짝 할 사이에 큰 점수를 내주고 말았고, 시합 내내 끌려가는 경기를 하다가 결국은 큰 점수 차로 참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기력한 시합을 했던 선수들 모두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어처구니없이 시합에 진 보스턴 대학팀은, 물론 시즌 우승은 했지만 마지막 시합에 약체 팀에게 크게 패함으로 몹시 기분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준비된 파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모두 슬금슬금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선수들은 우승을 즐기기보다는 전승을 하지 못한 것과 최약체 팀에게 패배한 것에 대해 매우 창피할 따름이었다. 시민들과 언론들도 충격을 받고는 왜 약체 팀에게 큰 점수 차이로 졌는지 분석을 하며 보스턴 선수들의 지나친 신앙심을 문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시합을 앞두고 기도만 했다는 질타였습니다. 좀 더 훈련과 연습을 했더라면 역사적인 전승 우승을 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의 질타였습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간 선수들은 자신들도 하나님께 원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왜 막판에 약체 팀에게 큰 점수 차로 져야 했는지 그 이유를 잘 몰라 답답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일년 내내 강팀과의 경기에서는 선수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지만, 제일 약체와 경기했던 마지막 그 쉬운 기도는 왜 응답해 주지 않으셨을까? 그리고는 훈련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자책을 하게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사람들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모두 필요한 것인데, 그 하나는 <이성>에 의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감성>에 의한 것입니다. 이성에 의한 방법은 생각과 사고를 기초로 하는 방법인데 우리가 만일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매사에 충분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결정을 내린다면 중대한 과오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인생의 여정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 그리고 중요한 인간관계의 일들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결정하는데서 오는 결과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성에 의한 결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성에 의한 방법의 대표적인 요소들을 말해 보면 <지식>, <논리>, <과학적 사고>, <합리적 사고>, <이해> 등이 될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 체력, 연습, 훈련 등입니다. 운동선수가 연습은 소홀히 하고 기도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직장을 선택하거나 그만 둘 때, 배우자를 선택하거나 가정을 포기할 때, 기도만 한다고 되겠습니까? 우리는 때로는 이성이 아닌 감성적인 결정이 앞 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을 많이 그르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성적인 판단이나 결정이 꼭 모든 일을 그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결정할 때 이성적인 결정만큼이나 많이 하게 되는 것이 감성적인 결정인데, 이 감성적 결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세상을 따듯하게 만드는 모든 일은 이성이나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감성의 마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감성에 의한 방법의 대표적 요소들은 <사랑>, <지혜>, <신앙>, <믿음>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은 자신과 사람들을 이해시키지만 감성은 자신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행동을 끌어내지만 감성은 사람들의 무서운 헌신을 끌어냅니다. 

사람에 따라서 이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감성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감성이 주는 과오를 막기 위해 철저히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감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머리의 지식과 논리는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과 지혜의 조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더 가깝게 움직이십니까? 아무래도 그것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고, 남성, 여성 등 성별에 따라서도 많이 차이가 나고, 연령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종교는 항상 이성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감성적인 것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신앙>이라는 것은 결코 이성적인 요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이성보다는 감성적인 부분이 더 많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 보편적으로 여성이 많은 것은, 여성이 종교를 믿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만큼 연약해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감성적인 부분이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세계교회에 비해 여성의 비율이 매우 높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그만큼 감성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일본 교회는 한국교회에 비해 남성비율이 꽤 높은데 그것은 그만큼 일본교회는 감성보다는 이성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보았을 때 높은뜻 숭의교회는 다른 한국교회에 비해 남성과 젊은 층의 비율이 높은 편이라 여겨지는데, 그것은 신앙에 있어서 다른 교회보다 이성적인 접근을 많이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성적인 접근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교회를 이해하더라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감성적인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성적 접근이라는 것은 감성적인 결단을 이끌어내기 위한 접근방법일 뿐, 이성 자체로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대표적인 이성과 감성의 대화가 하나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관원이라 했는데, 그가 예수님께 나와 대화를 합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질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이성보다는 감성 쪽의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어머니 배에 다시 들어갔다 나옵니까?” 매우 과학적이고도 이성적인 질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감성적인 대답입니다. 

이성적인 것 만 으로는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결국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증명될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은 가버나움 근방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바로 뒤의 내용입니다. 5,000 명이 모인 상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갈릴리 동편의 벳세다로 급히 보내시고 지금 다시 반대 편 게네사렛 지역으로 건너오신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물 위를 걷는 모습도 보여 주셨습니다. 

게네사렛은 갈릴리 서북쪽의 큰 마을로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밀집해 있는, 당시 갈릴리호수 주변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게네사렛을 하나님이 주신 동산과 낙원이라 불렀습니다.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 된 곳이라는 뜻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히 학문이 발달하게 되고 따라서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게네사렛은 바로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움직임이 있는 것이 발견 됩니다. 가버나움에서는 예수님을 정치 지도자로 모시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죽고 난 뒤 불안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일한 유대민중의 지도자인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만들기 위한 모임으로 오천 명 이상이 광야로 모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성적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고 예수님도 그것 때문에 큰 부담을 안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군중들의 움직임을 보고는 그들을 해산시키고 제자들도 보내고는 호수 건너편으로 급히 가신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게네사렛에서는 감성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었다는 것, 다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으셨다는 것 등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들은 아직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믿음으로 모인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땅 가버나움은 예수님과의 이성적인 만남과 교제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죽음으로 인해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가 예수님를 중심으로 모여 예수님을 자신들을 지도해 줄 정치적 지도자로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생각이고 사람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또 다른 마을인 게네사렛에서는 믿음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네사렛은 예수님과의 감성적인 믿음의 교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6)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나음을 얻으니라 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보면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옷에 손을 대면 나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 이성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이성적인 모임으로 가버나움에서 모였을 때는 비록 한 끼 밥은 얻어먹었지만 완전한 구원은 얻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게네사렛에서는 달랐습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은 구원을 얻어 모든 병들었던 삶이 온전해 진 것입니다. 삶의 근원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완전한 나음을 얻기 위해서는, 온전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성이 아닌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합리적인 이성이 아닌 바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의학계에서는 예수의 옷자락을 잡는다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예수의 옷자락을 잡는다고 돈이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것은 매우 비이성적이고도 유치한 행동으로, 로또복권을 사는 것만도 못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교육학은 예수의 옷자락을 잡는다고 아이들의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옷자락을 잡고 사는 사람들을 무식하다, 비과학적이다, 광신적이다 하며 업신여기고 깔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에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막5:21-43 에 나오는 12년 혈루증 앓던 여인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온 여인으로 예수의 뒤에서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고 그래서 구원을 받은 여인입니다. 성경은 그 여인의 상황과 처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막5: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했던 행동은 이성적인 행동이 아닌, 바로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막5: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막5: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그 때에 그녀가 얻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막5: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깨달으니라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완전한 치유, 온전한 나음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께 나아오는 것은 이성이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올 때, 우리의 삶은 온전해지고 완전히 치유되며 참된 삶의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문제를 풀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합리적인 사고와 논리로 삶의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방법은 매우 중요하고 또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기에서 완전한 삶의 문제의 해결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 끼 밥만 해결 될 뿐입니다.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뿐이지 근본이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 보스턴 대학의 풋볼선수들 얘기로 돌아갑니다. 이해할 수 없는 큰 점수 차로 패배한 후 실망 속에 축하 파티도 거부한 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선수들, 너무 기도만 해서 졌다는 비난을 받았던 그 선수들은,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들이 왜 경기에 졌으며 왜 절망하여 집으로 바로 돌아 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다음 날 조간신문 1면 톱에 선명하게 나온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신문기사에 놀라게 되는데 그 기사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시내 <나이트 클럽 화재와 공포 - 잿더미 속에서 시체 492구 발굴> 그것은 바로 1942년에 있었던 그 유명한 <코코넛 글로우브 대 화재 참사>였던 것입니다. 

제가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심리학, 정신의학에서 하바드대학의 정신과 의사인 린드만 박사와 캐플란 박사가 위기 이론을 연구하였는데, 그 연구의 배경이 바로 이 코코넛 글로우브 대 화제이기 때문입니다. 코코넛 글로우브 화재에 가족을 잃은 사람의 심정변화를 연구하여 <위기 이론>이라는 유명한 심리학 이론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코코넛 글로우브 라는 나이트 클럽은 그 전날 보스턴 대학의 풋볼 팀이 우승축하 파티를 하기 위해 예약을 해 놓았던 술집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어떤 경우이든 하나님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는 <yes> 라고 응답하지 않고 <no> 라고 응답하실 때도 있으십니다. 심정적으로는 <no>라고 응답하실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고치시고 치유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아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여 기도하는 자에게 온전한 치유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나아오면 밥 한 끼 먹을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한 번 정도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녀들에게 배고픔을 면하도록 밥은 한 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녀들에게는 한 끼 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병든 부분을 근원부터 치유 해 온전한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녀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이든 우리 개인의 삶이든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잡는 자는 다 나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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