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수감사절] 영원한 감사 (막 14:3~9)

  • 잡초 잡초
  • 328
  • 0

첨부 1


영원한 감사 (막 14:3~9) 

오늘은 일 년의 시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12월을 앞두고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감사 주일입니다. 당연한 때에 당연한 일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전혀 감사할 수 없을 때에 감사하지 않을 일로 감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 주변에 세월이 흘러가며 머리카락을 잃어버리고 대머리가 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전광씨가 지은 ‘평생 감사’라는 책에 보면 대머리가 되는 것을 별로 좋아할 사람들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머리로 인하여 우리는 감사할 조건이 무려 여섯 가지나 된다는 말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대머리는 여성에게는 거의 없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은 감사해야 한다. 
2.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대머리가 된다. 날마다 앞이마를 쓰다듬어 주시기 때문이다. 
3.대머리인 사람은 얻어먹고 사는 사람이 없다. 대머리로 구걸하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보았다. 
4.비교적 목회자들이 대머리가 된 사람이 많다. 엘리사도 대머리였다. 
5.비누, 샴푸, 물을 상당히 절감할 수 있다. 
6.하나님을 편하게 해 드린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기 때문이다.

오늘의 본문에는 한 여인의 우연한 감사가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에 이르기 까지 기억될 영원한 감사 사건이 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여인은 자신의 감사가 그렇게 까지 기억될 감사라는 것을 모르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저 이 여인은 은혜 입은 예수님을 향하여 한 놓칠 수 없는 한 순간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응답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날의 감사는 주님이 기억하시고 인정하시는 영원한 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본문 3절은 그냥 ‘한 여자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2:3에 의하면 이 여자가 바로 죽었다가 다시 산 베다니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여인이 예수께서 같은 동리에서 나병환자 이었다가 치유를 받은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이 식사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자신의 옥합을 깨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본문 9절에서 이 여인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헌신이 영원히 기억될 가치가 있는 영원한 감사 사건이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한 여인의 헌신이 이렇게 영원한 감사가 될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 때문일까요?

1. 악한 인생 틈에서 드려진 선한 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적 정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과 링크되어 있는 14장 1-2절을 읽어 보실까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때는 바야흐로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본문의 에피소드가 끝나는 9절이후 그러니까 10절에는 바로 이런 음모를 촉진하는 악한 도구로서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여기 우리는 악한 시대 악한 사람들의 얼굴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때만의 정황은 아닙니다. 지금은 과연 다를까요? 최근 탈란트 문근영씨가 사회 복지를 위해 지난 6년간 6억 5천만원을 기부했다는 기사가 뜨자마자 칭찬대신 그를 향해 온갖 악플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셨는지요? 참으로 이 시대가 악하고, 사람들이 악하다고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그런데 본문에도 악한 시대 악한 인생의 틈새(1-2절의 악한 지도자들과 10절의 악한 제자 유다)에서 성경의 기자는 전혀 다른 한 여자의 얼굴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여기서 ‘좋은 일’이란 단어는 ‘선한 일’ 혹은 ‘아름다운 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은 이 여자를 비난하는 자들의 악한 행위와 비교되는 선한 일, 아름다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행위가 돋보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 여자는 악한 시대, 악한 인생들의 틈새에서 시류를 본받기보다 세상과 다른 인생 곧 선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자 한 까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헌신은 더욱 기억될 가치가 있는 영원한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나도 더불어 악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세상이 이기적이라고 해서 나도 별수 없이 이기적인 인생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세상이 악하기에 나만이라도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고 결심하시나요? 바울 사도의 권면처럼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것”을 인생의 우선순위로 알고 살고자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누가 영원한 감사를 드리는 인생을 살수 있습니까? 세상의 악함을 탓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붙잡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자신을 드리는 성도들을 그분은 지금도 찾습니다. 악한 인생의 틈새에서 드리는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감사를 찾습니다. 이 여인의 헌신이 영원한 감사가 될 수 있었던 첫째 비밀이었습니다.


2. 부족한 중에서도 바쳐진 통전적 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가 경험하는 감동의 하나는 인간이 자신 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를 개방하는 순간들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여인의 헌신에 대하여 주께서 감동하신 이유도 이 여인의 자신의 존재를 깨트린 소위 통전적 헌신 때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주인공 마리아는 옥합을 열어 주님께 향유를 조금만 부어 바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헌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중요한 손님이 내방시 손님의 머리에 향유를 몇 방울씩 떨어트리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정도로도 마리아의 헌신은 칭찬받을 만한 헌신이었습니다. 아니면 마리아는 옥합을 열어 향유를 전부 주님께 부어 드리는 방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옥합은 다시 향유를 채워 다른 대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최고의 헌신으로 이 여인의 헌신은 당시에 큰 뉴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헌신은 그 정도로도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몽땅 부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통전적 헌신이라고 칭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는 그 옥합은 다른 이를 상대로 사용되지 아니할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최소의 헌신도, 최고의 헌신도 아닌, 전부를 통째로 드리는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8절은 “저가 힘을 다하여(더 이상 남겨둔 힘이 없었다는 의미)내 몸에 향유를 부었다고”고 기록합니다. 바로 이런 헌신이 주께서 기억하시는 영원한 헌신이 된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이 여인이 이 날 주께 드린 향유의 가치를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 당시 평범한 팔레스틴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주께 드린 향유의 가치는 쉽게 말하면 당시 평균 노동자들의 1년 품삯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할만 합니다. 

자,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뜻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1년의 샐러리를 드려본 일이 있으신가요? 좀, 주저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조금도 망서린 흔적이 없습니다. 여인은 주저 없이 옥합을 깨트려 향유 전부를 주께 부어 드린 것입니다. 아니 이것은 향유를 드린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존재, 그녀의 마음, 그녀의 사랑의 모든 것을 부어 드린 것입니다. 이 헌신이 하늘을 감동시키고, 주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 하여금 앞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천하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이 여인의 헌신이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던지는 도전은 결코 향유의 문제도 옥합을 깨트리는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가 과연 복음의 목적을 위해 자기의 자아를 깨트려 드릴 수 있느냐는 통전적 헌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 드리는 모든 헌금의 기회, 감사의 기회는 이런 통전적 헌신을 테스트하는 시험의 기회일 따름입니다.


3. 사람을 넘어 서서 구세주께 드려진 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헌신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헌신이 사람이 아닌 구세주에게 드려진 헌신이라면 더욱 귀하고 더욱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 헌신의 대상이 나만이 아닌 온 세상을 구할 분이라면 그 분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인지요. 

랄프 마틴(Ralph P. Martin)이라는 성경학자는 오늘 본문의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사건은 매우 중요하게 상징적이고 극적인 신학적인 행동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구약에서 기름을 붓는 것은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에게만 하는 행위이었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인류의 메시아에게 드려질 행위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야말로 인류의 참된 왕이시고 선지자이시고 제사장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랄프 마틴은 신약 시대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실 메시아로 믿은 첫 번째 사람이 아마도 이 여인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은 그들의 직위에 취임할 때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또 한번 그들의 장례식에 그들의 사체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어쩌면 이 여인은 바로 그 때 예수님의 죽으심의 때가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때를 놓칠 수가 없다고 아마도 판단했을 것입니다. 아니 그분이 돌아가시면 그의 사체에 그녀가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살아있는 구세주에게 그녀의 신앙의 고백을, 그리고 사랑의 고백을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그녀는 아마도 판단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바로 이런 여인의 심정의 고백을 아시고 받으셨다고 증언하지 않습니까? 8절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준비하였느니라” 믿음의 고백은, 그리고 사랑의 고백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을 때에 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이런 여인의 이 믿음과 사랑의 고백에 주님은 감동을 입으시고 이 여인의 헌신은 영원히 기억될 감사이었다고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까?

베스트셀러와 영화로 우리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남겼던 작가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시간의 제한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사랑의 고백의 중요성을 가르친 애절한 레슨이었습니다.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나 교수로 가수로 인기와 돈을 누리면서도 세 번이나 자살을 감행했던 미대 교수 유정과 세 사람이나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고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 윤수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상처 받고 상처 주는 인생 속에서도 사형수 면회 그리고 편지라는 마음을 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들은 서로에게 필요했던 하나님의 사랑의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형수 윤수에게는 살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윤수가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그런 회한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살아서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에 태어나 내 입으로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그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사랑한다고 말입니다.” 

한 평론가는 이 책의 소감을 이런 만회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운 독백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래도 죽기엔 너무 아깝지 않겠니? 니가 쓰레기 통에 버리는 30분이지만 누군가는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기다리는 그 시간 그 시간” 

그 남은 시간에 여러분과 제가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시간에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구세주이신 그분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면이 보다 더 큰 일, 이 보다 더 중요한 일, 그리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이 이 감사절에 우리가 주의 만찬을 통해 그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사랑의 고백을 드리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감사절에 오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주신 주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이동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