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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먼 자에게 빛을! (마 9: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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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에게 빛을! (마 9:27~31)


다윗의 자손이여!

앞을 못 보는 맹인 세 명이 자원 봉사자와 함께 산에 올랐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쾌청했고 정상에 오르니 발 아래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때 맹인 한 명이 “아 정말 좋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다른 맹인이 이 말을 받으며 “그래 정말 좋구나.” 하고 응답했습니다. 나머지 맹인도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자원봉사자로 동행했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보이는 것도 없으면서’라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러자 그 속마음을 알았다는듯이 그 맹인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보이는 게 반이라 쳐도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에는 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 흐르는 소리, 새소리, 나무 냄새, 이런 건 눈뜬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많이 느끼거든요.” 이 소리에 보는 게 다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할 말을 잃었다고 합니다.

맹인은 우리가 보는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대신 그들은 우리가 등한시 했던 소리와 냄새에 아주 민감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한 쪽이 닫힌 만큼 다른 한 쪽이 열린 것입니다. 소아마비 시인 송명희 씨의 시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소아마비에 걸려 오랜 세월 몸이 뒤틀리고 좁은 방에 갇혀 지내던 사람이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송명희 씨는 공평하신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도대체 무엇이 공평한가요? 이렇게 불편하고 힘든데. 그녀는 육신이 불편해진 만큼 영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눈이 열린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것에 대한 감사를 모릅니다. 

그렇지만 소아마비 시인 송명희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사실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방안에만 갇혀 꼼짝할 수 없었던 시인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은 묵상의 시간을 가졌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 일에 바쁜 건강한 우리는 하나님 바라볼 시간도 없지요. 회사 일로 자녀 일로, 요즘 같은 때는 경제적 위기로 마음이 근심에 가득 차 하나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런 비슷한 고백은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도 고백하고 있습니다. 30대에 실명의 고통을 맛보았던 그는 서울역에서 구두닦이, 껌팔이 청소년들과 부랑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삽니다. 그는 그곳에서 참다운 사랑을 느낍니다. 안요한 목사는 이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낮은 곳에서 스스로 찾아낸 소명의 불빛, 그것이야말로 참된 영혼의 눈뜸인 것이었다. 육신의 눈을 뜬 사람은 볼 수 없는, 영혼의 눈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 그것을 보게 하기위하여, 그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하여 내 육신의 눈을 멀게 하고 나를 그곳으로 인도해 오신 것이었다.” 안요한 목사는 육신의 눈을 잃고는 낮은 곳으로 임하셨던 예수가 비로소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등장하는 두 명의 소경 또한 그렇습니다. 그들이 육신의 눈보다 더 밝은 영적인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을 부른 호칭에서 알 수 있습니다. 소경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직전 여리고에 있던 소경 바디매오도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막10:47) 하고 불렀습니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지 “주여” 라 불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불렀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것은 이 소경들이 처음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곧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를 말합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수님은 작은 나귀를 타셨는데 그때 무리들은 앞서가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환영했습니다. 메시야 환영 퍼레이드를 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소경들이 정확히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본 것입니다. 그분의 산상수훈의 말씀들을 듣고 또 그 이후에 있었던 수많은 기적들을 보며 예수님이 확실한 메시야임을 그들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가까이 있던 제자들이나 무리들은 이 고백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말씀과 기적에 놀라며 “저가 누구이기에” 하고 감탄했을 뿐입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하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11:5)는 말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들은 실상 메시야가 오시면 행하실 표적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보고도 몰랐지만 눈 먼 소경들은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하기도 전에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다 하지만 영적인 소경들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가 소경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자기 고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자는 실상은 영적인 소경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5장 14절에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멸망으로 끝나는 넓은 문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그들은 소경임에 분명합니다. 내가 건강하다, 내가 지식이 많다, 내가 높은 자리에 있다, 내가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들이 그가 진리의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속한 많은 것을 가졌기에 영적인 것에서는 한없이 멀어지고 눈먼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가장 낮은 곳에서, 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모욕을 당하며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지혜롭다고 하는 세상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예수님을 알아보고 따랐던 사람들은 당시에 소위 지혜가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기에 진리에서 더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고전1:18-20) 

예수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은 가난한 백성들이요 죄인들이요 배우지 못한 어부들이요 세리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26-28)

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말들과 판단들이 줄어듭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더듬듯이 말하지만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듯하나 그 활용은 다함이 없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지만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웅변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모든 것이 역설처럼 보이지만 진리를 소유한 자의 모습입니다. 

예컨대 서예가 그렇다고 합니다. 서예에서는 최고의 경지는 교(巧), 즉 아름다움이 아니라 졸(拙)이라고 합니다. 서예의 대가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봉은사 현판에 판전(板殿) 이라는 글씨를 썼는데 매우 어수룩한 필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글씨를 최고의 경지로 칩니다. 서예에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 이라고 하는데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너무 크고 헤아릴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분에 대해 정확히 표현할 말이 없어 더듬게 되고 침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고 눈빛과 느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말을 많이 하여야 한다면 아직도 그 사랑의 깊이가 얕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것에는 소경이 되고 하나님에 대한 앎에 있어서 점점 그 눈이 열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반대로 물질 중심이 되어 가고 지나치게 이성중심의 사회가 되어 가면서 우리는 정작 영적인 것에는 소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소경이 되어가면서 그 안에 기쁨도 사라집니다.

크로스비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4000여개의 찬송가 시를 작사하였고 우리나라 찬송가에도 23개가 실려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가 43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492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446장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337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등이 있습니다. 

204장 3절은 참 감동적인 가사입니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그런데 크로스비는 맹인입니다.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놀라운 기쁨을 소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눈이 가려지고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이었습니다. 

크로스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장님 만들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 험한 세상 보지 않게 하시고, 찬란한 하나님 나라보며 살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억매여 영적인 소경이 되어 가고 있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할 고백입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소경인 저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었던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이 달리 부르짖을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 나아왔던 많은 사람들의 간구가 바로 이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간구였습니다. 이 간구는 우리의 죄인됨을 고백하는 간구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간구요, 다만 자격 없는 자가 은혜를 받기를 소원한다는 겸손함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소리에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했다는 말씀이 오늘 성경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소경들도 포기치 않고 예수님을 따라 집으로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리고에 있던 소경 바디매오도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잠잠하라고 하여도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자기 소중한 겉옷도 버리고 예수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기도는 집요함입니다. 예수님이 외면하시는 것 같아 보여도, 예수님이 말없이 집으로 들어간다 하여도 그 곳까지 쫓아가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조금 기도하고 이정도면 되었지 하고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는 나무 뿌리 뽑아온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이 모습을 보시고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28)하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는 능력이 있는 줄 믿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주여 그러하오이다”하고 대답합니다. 이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며 눈을 만지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은 신구약 성경을 통 털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행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세상에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일찍이 이 메시야 시대의 사역을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35:5-6)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분명히 육체의 닫힌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소경으로 있다가 눈이 뜨이는 기적의 기쁨은 잠깐입니다. 그는 얼마가지 않아 그 기쁨은 사라지고 그 눈을 통하여 욕심이 들어오고 죄가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길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볼 수 있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눈과 귀가 열리길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은혜를 베푸시되 우리의 믿음에 반응하여 베푸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묵상했던 기적들을 되돌아보십시오. 문둥병자는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하고 믿음을 고백했을 때 깨끗하게 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집에 올 것도 없이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씀하실 때 멀리 떨어져 있던 종의 병이 나았습니다. 지붕을 뚫고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침상 채 내리우는 모습에서 주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반대로 믿음에 실패했을 때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풍랑을 맞았을 때 두려워했던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고 책망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선언하셨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는 사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자 예수님은 회당장을 향하여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두 소경을 향하여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그들이 눈이 열려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베푸시되 우리의 믿음을 보고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으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도대체 이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철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한 사람들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믿음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과 같습니다. 로케트를 쏘아 올리는 원리가 그렇습니다. 지면에 가하는 힘만큼 그 반대편으로 반작용의 힘이 가해져 로케트를 멀리 하늘로 쏘아 올립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은 만큼 하나님은 역사를 하십니다. 우리가 믿고 맡긴 만큼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게 기도해도 들어주시면 좋을 텐데 왜 이처럼 우리 믿음을 보시고 들어주시려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은혜가 은혜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쉽게 주면 그 고마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내적으로 준비될 때 하나님은 거기에 맞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놀라운 능력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고 이분을 의지하고 이분과 함께 동행하면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님이 역사하시도록 하는 도구가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능력을 내 안에 담아 두고도 사용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나면 그 이후에는 쉽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교회사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개혁신앙이나 정통신앙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안에 생긴 믿음도 실상은 하나님이 부어주신 것이라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것은 내가 갖겠다고 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비롯한 여러 은사들 중에 하나가 ‘믿음의 은사’입니다.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인데 이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멀쩡한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라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몇 번하다 실없는 것 같아 포기하고 말지요. 믿음이란 것도 위에서 부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믿어지게 하옵소서.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어떤 아이가 귀신이 들렸는데 그 아버지가 그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는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9:22) 하고 간청합니다. 

이 소리를 듣자 예수님은 그 아비를 책망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그 아비는 곧바로 이렇게 간청합니다.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9:24)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여러분 무엇보다 이렇게 간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이 연약합니다. 내 인생에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은 충분히 저희를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믿음이 없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주님 저희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면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인생을 기적과 승리로 채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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