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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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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읽어나갈 때 혹시라도 펜이 있으신 분들은 ‘사랑’이라는 단어에 표시를 해두시기 바랍니다.  없으신 분들은 읽으시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손가락으로 한 번 헤아려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서른 번 정도 되죠?  연애편지를 쓰더라도 이렇게 사랑이 많이 반복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너무 흔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다니시면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해 본적이 없습니까?  왜 교회에서는 혹은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하라는 것이 별로 없을까?  물론 교회에 오면 술, 담배 하지 마라부터 성경공부 해라, 기도회 나와라, 십일조 해라 어제는 또 청소하러 나와라 등 귀찮게 하는 일들이 많기는 하지만 조금만 더 교리를 알게 되면 사실 이런 것들이 우리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술, 담배 해도, 성경공부 한 번도 안 나와도, 기도회 빠지고, 십일조 안 하고, 청소하러 안 나와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깜짝 놀라시는 분들 계시네요?  우리가 구원 받는 것에는 우리의 어떠한 행위도 필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구원은 은혜라고 합니다.  거저 주는 선물, 쉽게 말하면 공짜라는 겁니다.  그래서 좋고 고맙긴 한데 뭔가 찜찜합니다.  죽으면 천국 간다는데 안 죽어봐서 알 길은 없고,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데 지금 내 생활을 봐선 나라도 구원해주기 싫을 것 같은데…  돈을 주고 물건을 배달 시키면 그 물건을 받기 전에 영수증을 꼭 챙겨둬야죠.  그런데 구원이라는 것은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니고 공짜로 받은 거라 영수증을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죽기 전에 확인도 안 되고…  한편으로는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그렇게 좋은 거라면 내가 뭐라도 좀 거들어야 될텐데… 아무리 공짜라도 사람 사는 데 정이라는 게 있지, 인지상정상 또 맨 입으로 낼름 받아 먹기는 뭣 하고..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 사람들 눈치도 있고 하니까 주일만큼은 좀 참고 거룩한 표정 좀 지어주고, 보는 사람들 있을 때만이라도 착하게 사는 척 해보자.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이슬람교나 불교나 기타 다른 종교들처럼 분명하게 해 주면 좋지 않습니까?  적선!  적금처럼 선을 쌓아두는 겁니다.  죽고 나면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 한 나쁜 일과 좋은 일을 양팔 저울에 달아본다는 데…  나쁜 일 많이 한 것 같으면 좋은 일도 조금 해서 균형을 맞추어 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불안하면 죽을 때 재산 헌금하면서 한꺼번에 뒤집는 겁니다. 혹은 어떤 성지를 순례하고 와야 한다거나, 어떤 곳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간다든가.  비주얼이 강조되는 요즘 세대에 맞게 구원에 관한 뭔가 분명한 그림이 있어야 하는데…  교회에 와 보니 또 예수를 믿어보니 알면 알수록 그런 건 없습니다.  몇 년 동안을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오늘의 설교는 이러한 저의 고민과 현재까지의 해답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뭔가 분명하고 거창한 일 없을까요?”  쉽게 말해 하나님을 위해 폼 나는 그 무엇을 보란 듯이 해 보이고 싶은데 그런 게 없냐 이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는지 그냥 마음의 소리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너 사랑이라도 해 볼래?”  당시 저는 십대 후반이었습니다.  사실 그 때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어렵고 무거운 단어인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드는 생각은 “너 사랑이라도 해 볼래?” 였습니다.  반문했죠.  아니 사랑 뭐 그런 거 말고 좀 폼 나는 거 없습니까?  선교지에 가서 순교를 할까요?  빈민촌에 가서 일생을 봉사할까요?  나병환자들에게 갈까요?  뭔가 봉사를 해도 구체적이고 번듯한 무엇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반문이었습니다.  그래 뭐 당장은 학교도 다녀야 하고, 군대도 안 갔다 왔으니까 일단 ‘사랑’ 그걸 한 번 해보자! 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지 이미 아시겠죠?  한 번 해 보려고 하는데, 그거 정말 폼 안 나고, 귀찮고, 어렵던데요?  추상적이고 먼 곳의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가까운 곳에서의 사랑에 주목해 봤습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외국 어느 나라의 어린아이들의 한 끼를 해결하는 것보다 먼저 부모님, 형, 누나, 교회 지체들 그리고 친구들이 더 힘든 대상이었습니다.  

일단 부모님.  사랑 받기만 해 봤지 무슨 사랑을 제가 하겠습니까?  1년에 한 번 어버이날, 그리고 두 분의 생신 외에 뭐가 있었겠습니까?  부모님 은혜 감사합니다는 그나마 했지만, 부모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낯 뜨거워서 못 하겠던데요?  그래 말은 둘째로 치더라도 순종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시죠?  부모님 말씀 듣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사실 부모님 말씀만큼 저에게 도움되는 말씀이 없는데 굳이 반대로 합니다.  부모님 말씀 순종하는 거, 하려고 보니 십계명에도 있는 말씀이고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는데 하면 할수록 참 어려웠습니다.  물론 지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 삶의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숨 쉴 곳조차 없었습니다.  형, 누나.  먹을 것 가지고 싸우기나 했지 심부름 시키면 얼마나 귀찮고 짜증납니까?  사랑이라…  참 멋적더군요.  교회 지체들이요…  몇몇은 괜찮지만 조금만 범위를 넓혀보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잖아요.  교회를 떠나는 많은 사람들의 핑계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서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로 확대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랑’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다가가게 되니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랑’에 대해 추적해 보았습니다.

십계명을 크게 둘로 나누면 이렇게 구분되어진다고 합니다.  찬송가 뒷 면을 보거나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십계명이 나옵니다.  제일계명에서부터 제사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제오계명에서부터 제십계명까지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결국 둘을 다시 묶어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냄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고 듣고, 배웠더군요.  우리가 가장 처음 암송하게 되는 구절 중에 하나가 요한복음 3장 16절 아닙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알고 나서 보게 되니 정말 온통 사랑이구요,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게다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좀 과하다 싶은 구절입니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제자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유대인의 전통 식사는 옆으로 기대어 누워서 했다고들 하는데 그럴 때 예수님께 기대어 식사하던 사람이 주로 요한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일서 1장 1절을 볼까요?  요한은 예수님을 듣고, 보고, 만져 본 이후 예수님을 통해 본 하나님을 이렇게 결론지어 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일서가 쓰여진 연대는 대략 AD 90년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후 50년이 넘은 시점입니다.  요한일서를 쓰던 사도요한은 당시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일겁니다.  피 끓는 청춘남녀가 만난 지 얼마 안 되서 주고 받는 연애편지도 아니고, 헤어진 지 50년도 넘은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서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이렇게 구구절절이 사랑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에는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먼저 말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는 빛에 거하는 것이고 어두움에 거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드는 예가 바로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2장 9절부터 11절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냐 어두운 가운데 거하냐,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냐, 다른 말로 구원받았냐 아니냐를 알 수 있는 기준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애매하게 여기던 구원의 확신 어떤 증명서 말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면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말씀이죠.  반대로 오늘 읽은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불가능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 사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그게 말이야 쉽지 피를 나눈 형제, 자매도 평소에 사랑하는게 어렵습니다.  무슨 외부의 적이 있다거나 무슨 문제가 있어서 둘 사이에 결속력이 강해지기 전에 평소 밥 먹으면서 비슷한 옷을 나눠 입으면서 사랑을 나누며 확인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이렇게 떨어져 살아보니 그리고 커 보니 형제, 자매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되지만 한 지붕 밑에서 한솥밥 먹으면서 알게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조금 더 확대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지칭되는 교회의 지체들을 사랑하는 일.  어떻습니까?  옆에 계신 분들 얼굴을 한 번 보시죠?  그나마 장난이라도 칠 수 있는 사이면 다행입니다.  멋적은 웃음 정도로 목례하는 사이라도 그나마 다행입니다.  더 심각한 건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은?  제일 심각한 건 누구시더라… 입니다.  

100명 남짓한 우리 적은 식구들.  물론 자주 바뀌는 어려움이 있기는 합니다만 정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서로 반갑게 얼굴 보며 인사하고 안부 나눌 수 있는 사이들인데 그게 잘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거 큰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은커녕 인사도 안 하고 누군지도 잘 모르겠는데요?  천국 확실히 가려면 이 악물고라도 웃는 척 하며 사랑해야 한다는 거죠.  이거 뭐 술, 담배 끊기 보다 힘들구요, 차라리 성지 순례를 한 번 다녀오거나 생각날 때마다 주머니에서 동전 꺼내 주는 게 낫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거 꼭 해야 된다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답답한 형제, 이웃 사랑하는 이야기 그만 두고 그렇다면 그나마 자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넘어가 볼까요?  하나님 제가 이웃 복이 조금 없어서 이웃 사랑하기는 참 만만치 않으니까 하나님 사랑 조금 더 하는 걸로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제가 헌금도 많이 하고, 예배도 안 빠지고, 주일학교 선생님, 식사 준비, 주방 정리 등 다른 거 열심히 하겠습니다.  예!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헛다리 짚었습니다.  쉽게 말해 선물을 할 때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사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좋아하는 거 혹은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거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대학 다닐 때 받은 선물 중 가장 난감한 것이 CD였습니다.  전 CDP가 없었습니다.

성경의 몇몇 부분은 제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거룩함에 대해 죽음으로 엄중한 경고를 하는 부분들도 있습니다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은 형식적인 종교생활이 아무런 소용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에 관심없고 심지어는 지겹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야구에 아무 관심 없는 사람에게 야구 글러브 선물하기, 외국 나가는 친구 수화물 부친 뒤에 나타나서 200밀리 넘는 향수병 선물하기,  수술 전 금식 중인 환자에게 먹을 거 갖다 주기라고 할 수 있겠죠.  받으시는 하나님은 필요 없어 하거나 관심 없어 하는 부분에서 용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것들인 공평, 정의 혹은 공의, 인애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사실 그건 우리가 좀 싫습니다.  귀찮고, 폼 안 나고, 바보취급 당할 수도 있고, 하루 이틀에 끝날 것도 아니거든요.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자신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쉽지 않습니다.  어금니 꽉 물고 하는 것도 한도가 있죠.  이건 뭐 차라리 수도원 들어가서 안 부딪히고 사는 게 낮지 싶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의 변명이 이것입니다.  저 사람이 먼저 저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걸 콕 꼬집어서 하는 저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그 어느 것 하나 수월한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4장 10절, 11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우리 안에서 뭔가 쥐어짜내 듯 사랑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일단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표현으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강하냐 혹은 신실하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아기가 유모차를 타고 갈 때 넘어지지 않을까 꼭 잡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다.  조금 커서 걷게 되면 아빠 손을 잡고 걸어 다닐 때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 바짝 써 가면서 걸어 다니는 거 아닙니다.  아빠는 여유 있게 아이의 손을 잡으면서 이것저것 위험한 것은 없나 살피면서 걸어갑니다.  아이는 그냥 아버지께 맡기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잡으시는 겁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겁니다.  일단 안심하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2장 9절에서 11절의 말씀은 어떻게 해결합니까?  이게 바로 오늘의 해답이고 결론입니다.  사랑이라는 거.  머리로 하는 거 아니고, 어금니 깨물면서 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골머리 앓으시다가 결국 할 수 없어 예수님을 보내신 겁니까?  아니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어금니 깨물면서 으이구 이 녀석들 하면서 어쩔 수 없이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게 아닙니다.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입니다.  위급한 순간에 품 안에 있는 어린 아이의 생명을 위해 몸을 던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씩 접합니다.  그 엄마가 머리 써서 혹은 어금니 깨물어 가면서 한 겁니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우러나와 그렇게 한 겁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위대하다 혹은 강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 연구결과로도 그것이 사실임이 증명됐습니다.  아이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그 가냘프던 여인을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엄마의 사랑보다 위대하며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덮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서로 나누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이처럼 사랑했으니까 너희도 그 대가로 서로 사랑하라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후불을 전제로 하는 구입과 뭐가 다릅니까?  내가 너희를 이처럼 사랑했으니 그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을 전하고 나누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그러한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가까이서 보고, 듣고, 만지면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50여년이 지난 그 시점에까지 이렇게 사랑을 자랑하고, 전합니다.  

사실 요한이 이 편지를 쓰는 가장 큰 목적 중에 하나는 그 시대에 유행하던 영지주의자라는 이단에 대항하는 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론적인 글일 것 같은 요한일서는 의외로 사랑타령으로 대부분을 채웁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복음의 핵심입니다.  믿음만을 중하게 여기는 것 같은 바울의 편지나 행위로 믿음으로 보이라는 야곱의 편지는 서로 상충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로 따지니까 뭐가 먼저인지 모르겠습니다.  구원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살자라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도의적으로나 상식적으로는 이상하지만, 교리상 틀리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사랑’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사랑에 감격한 사람은 그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사실 그 탕자의 비유는 다른 의미가 있지만 오늘 보는 관점으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돌아와서 아버지의 그 사랑을 알게 된 탕자는 다시 그런 짓을 할까요?  물론 게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열에 아홉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이런 사랑을 알고 그래 다시 나가자 그러다가 돌아오면 또 받아주시겠지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는 거죠.  만 데나리온을 탕감 받고 돌아가다가 오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게 하는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고 그 소식을 들은 주인에게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이야기도 있냐구요?  

오늘 날로 풀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빚이 10억 정도 있어서 매월급에서 70프로씩 원천징수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뭐 월세를 벋어날 희망도 없고, 그나마 있는 자식들도 친척집에 흩어져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구제금융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탕감을 받게 되었답니다.  이제 월급 전체를 집으로 가져 올 수 있게 됐고, 흩어진 가족들이 한 상에 둘러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다가 얼마 전에 나한테 100만원 빌려 가고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10억 때문에 인생이 너무 힘들었던 그 사람이라면 오늘 그 10억에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100만원 빌려간 친구.  먼발치에서 먼저 알아보고 도망가려던 그 친구에게 오히려 먼저 다가가서 괜찮다고 난 오늘 10억이나 탕감 받았는데 100만원은 잊어버리라고 하게 되는 거죠.  

요한일서의 표현을 빌자면 10억 탕감 받았으니 100만원을 잊어버리라고 말해주는 것이 마땅하니라입니다.  바울은 10억 탕감 받은 것에 기뻐하고 이제 월셋방에서 살지 말고 흩어졌던 가족들 다 불러와서 행복하게 살아라고 하는 겁니다.  야고보는 100만원 탕감 안 해주면 10억 탕감 받은 사람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억 탕감 받았다는 사실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라 어떻게 증거를 대거나 말할 수 없지만, 그 100만원 때문에 힘들어 하는 친구를 도와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분명히 10억을 탕감 받은 것이고, 아직도 100만원 때문에 그 사람을 잡아서 경찰서에 데리고 가는 걸 봤을 때 그 사람은 10억 탕감 받지 못 한 사람이라는 거죠.  

저는 항상 돌아온 탕자의 뒷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그 탕자가 남 같지 않거든요.  시기하던 형과의 관계도 궁금하구요.  아마 그 약발이 몇 일 못 갔을 겁니다.  다시 옛날처럼 흥청망청 쓰고 놀던 때가 생각나겠지요.  아~!  그 때 이것만 안 했으면 아직 나 혼자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아버지 말씀은 이제 무조건 잘 들어야지 하던 다짐도 몇 일 못 갔을 겁니다.  그런데 이 탕자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하나입니다.  돌아오던 그 때의 그 마음을 기억하고 사는 거죠.  우리가 받은 선물이나 좋은 소식들도 그 약효가 얼마나 갑니까?  좋은 차는 한 달 정도, 좋은 집은 서너 달 정도 간다고 합니다.  원하던 합격 소식, 기다리던 계약 체결, 승진, 결혼 득남 혹은 득녀 여러분의 지난 삶 속에 여러분을 기쁘게 했던 많은 소식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정말 여러분은 너그러웠고, 여유 있었습니다.  귀찮던 동생의 장난도 어느 정도 웃음으로 받아 넘기고, 피곤한 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몇 일만이었겠죠.  그런데 그런 일들이 잊을 만 하면 생기고 잊을 만 하면 생긴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도 잘 안 다가오십니까?  매일 공돈이 100파운드씩 생기면 어떨까요?  외국에 나오니 이런 것들도 그립습니다.  하루에 세 끼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한 끼라도 따뜻한 한국밥상을 매일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집안 일에 지친 어머니들은 매일 한 끼라도 누가 해주는 밥 먹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번 여전도회수련회에서 일단 그렇게 한 끼 식사가 해결됩니다.  매일 교회 식구들 먹이시느라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으셨는데 비록 한 끼지만 대접 받으니 좋습니다.  이렇게 뭔가 받으면 좋습니다.  잠시라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조금 너그러워집니다.  받은 게 크면 그 약발이 조금 오래 가는 겁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비밀 혹은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to be a Christian’에는  아무런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as a Christian’이죠.  그런데 그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해 나가는 일들이 예전의 방식대로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 힘으로 거뜬히 해나가는 겁니다.  약발이 떨어져 간다면 다시금 받은 복을 세어보십시오.  그러면 또 새로운 사랑이 솟아 나오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시 물을 길으러 올 필요가 없다고 하신 이유 아닙니까?  이미 우리가 받은 구원이라는 선물만으로도 우리 맘 속에 끊임없이 솟는 사랑과 기쁨의 샘을 가진 것입니다.  또한 하루하루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선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말 할 때나 들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마침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서 오늘 한 번 봐 준다”  그렇게 뭔가 좋은 일이 있어서 상대방에게 기분 쓰는 일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린 그렇게 상대방에게 베풀 수 있게 많은 것을 끊임 없이 받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어금니 꽉 깨물고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닙니다.  기쁘게 순례의 길 갑니다.  우리가 가는 길, 형제 자매 이웃 사랑하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엄청난 사랑을 주셨으니까 그 사랑에 감격해서, 그 약발로 남편을, 아내를, 자녀들을, 형제를, 자매를, 지체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겁니다.  남 다 주고 나는 굶는 것이 아니라 그러고도 남을 만큼 그리고 나눌수록 더욱 풍성하게 주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의 비밀이고, 신앙의 비밀입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소설 아시죠?  가난한 부부는 서로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줄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탐스러운 머리털을 팔아서 남편이 아끼는 회중시계의 줄을 사 줍니다.  한편 남편은 비록 줄은 없지만 아끼던 회중시계를 팔아 부인의 머리빗을 삽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서로의 선물을 꺼내게 되죠.  서로 순간 당황했지만 아내는 머리는 다시 길 거니까 고맙게 머리빗을 받겠다고 하고, 남편도 어색하고 당황스러움을 떨치고 함께 기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자고 합니다.  만약 여기서 내가 당신 주려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하필 왜 그랬냐고, 내가 다시 이런 일을 하나 보라고 싸울 수도 있는 장면이었죠.  하지만 이 소설 속의 부부는 그 위기의 순간을 슬기롭게 극복합니다.  이 소설의 결말도 감동적이지만 시작 또한 정말 경쾌하게 시작됩니다.  서로에게 선물을 사 줄 수 없는 상황임에도 자신이 아끼던 것, 아내는 자신의 머리를, 남편은 자신의 회중시계를 팔아서라도 선물을 사 줄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쁜거죠.  

“더  잘 해 주지 못해 아쉬운 마음” 아시죠?  사실 우리는 저 사람이 나에게 더 잘해주지 않아서 아쉽죠.  그런데 서로를 보면 사실 사랑 받을 만한 사람 드뭅니다.  하지만 더 사랑 받을 만하지 않던 우리들을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지금 그리 사랑 받을 만 하지 않아 보이는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더 잘 해 드리지 못 해 죄송한 마음 또한 이웃들에게도 그 감격으로 사랑을 흘려 보내는 마음이 신앙생활이 아닐까요.  의무감으로 가득 찬 생활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더 잘 해 드리지 못 해 죄송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힘이 떨어질 때마다 상대방이나 주위의 상황을 탓하는 게 아니라 다시금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거뜬히 나아가는 거죠.  항상 즐겨 묵상하는 찬송가 가사가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이라는 찬송인데요 그런 기쁜 순례의 길을 행하는 근원적 힘이 바로 오늘의 설교제목이기도 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04장을 마지막으로 부르실텐데요 부르시기 전에 가사를 다시 한 번 봅시다.  정말 명곡 중의 명곡 아닙니까?  후렴 가사에 그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바꿔 불러도 좋을 듯 합니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 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사랑하세.”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 이제 사랑합시다라는 겁니다.  우리 일어서셔서 다 함께 이 사랑을 고백하면서 동시에 이 사랑을 주위에 흘러 넘치게 합시다.  이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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