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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에 감사하라 (고후 9: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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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극한 은혜에 감사하라 (고후 9:6~15)

 
부모는 자녀에게 제일 처음으로 “엄마”, “아빠”라는 말을 가르칩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면 제일 먼저 가르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엄마, 아빠의 첫 번째 소원입니다. “얘야, 엄마라고 좀 해봐라. 아빠라고 해봐라.” 자녀가 “엄마”, “아빠”라는 말을 처음으로 할 때까지 부모는 수백 번을 자녀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이 말 한마디를 처음 듣고 나면 그동안 그렇게 애썼던 수고와 헌신들이 망각의 뒤로 물러나곤 합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라는 말을 처음으로 듣는 순간 가슴 저려왔던 기쁨을 모든 부모들은 경험했습니다. 이 말 한마디를 통해 세상을 다 얻은 것과 같은 기쁨이 부모들의 가슴속에 생깁니다. 

저는 아이를 키우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 아들, 딸이 어렸을 때 “아빠”하며 달려왔던 모습이 제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 앞에 “아빠” 하고 부르며 달려가면 하나님도 얼마나 기뻐하실까?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도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아빠”하고 나오는 모습을 기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구나!’ 

저는 어렸을 때 열등감 속에 빠져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열등감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말을 불러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도 사진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가슴 속에 열등감으로 자리 잡았고 아픔과 슬픔이었습니다. 저는 성격조차도 내향적이고 소극적이며 겁도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가슴 속에 아픔과 슬픔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표현하기 보다는 혼자 곱씹으면서 삭이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이런 성품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제 안에 있던 슬픔과 아픔도 서서히 물러가고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도님들을 향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말씀하곤 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만큼 더 큰 자존감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그 다음으로 가르쳐야 할 것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엄마와 아빠가 되는 참으로 멋있는 자리에서 자녀들에게 세 번째로 가르쳐야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자녀가 “엄마”, “아빠”를 부르고 나면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가르칩니다. 이웃집 사람들을 만나면 꼭 인사를 하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서양부모들은 그 말보다는 “감사합니다”라는 말부터 가르칩니다. 자녀들에게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가르치는 것도 소중하지만, “감사합니다”라는 말부터 가르쳐주는 것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가르쳐주는 것이 정서적으로나 인간관계를 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말에서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잘 못해서 어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일이 아니어서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변명합니다. 보통 때 자꾸만 감사하다고 하면 그 의미를 퇴색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하는 눈으로 사물을 보고, 감사하는 눈으로 사람을 대할 줄 알면 삶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저는 우리사회가 가진 미움과 분노의 역사를 변화시키는 언어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것은 “감사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감사의 말을 새롭게 시작할 때 가족의 언어혁명, 교회와 사회의 언어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감사할 내용이 많은 부부가 살면서 이렇게 말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여보, 지금까지 나와 함께 살아준 것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오.” “여보, 정말로 그 동안 수고 많이 했어요. 정말로 많은 땀을 흘리며 노력했어요. 지금까지 우리 가족을 위해서 일해주어 고마워요.” 감사하다는 말은 우리 삶에 새로운 축복의 역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안에는 따뜻함이 담겨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안에는 너그러움이 담겨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안에는 여유가 담겨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안에는 용서가 담겨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안에는 꿈과 비전이 담겨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감사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움직입니다. 

불평에는 따뜻함이 없습니다.
불평에는 너그러움이 없습니다. 
불평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불평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불평에는 꿈과 비전이 없습니다. 

사람은 감사와 불평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속에는 인간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는 모든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하다는 말이 왜 중요할까요? 그것은 우리 삶을 새롭게 하고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다는 말의 반대말은 불평과 원망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보면 밝고 기쁘고 환한 얼굴이 있는가 하면 불평 속에 어둡고 분노가 가득 찬 얼굴도 있습니다. 그것은 가진 것이 다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소유한 것과 누리는 명예가 다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감사와 불평은 누구에게 달려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감사와 불평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감사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감사로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불평으로 모든 것을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는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연습해야 합니다. 감사란 실천적인 훈련에 따른 것입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표현하면 또 한 번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내용이 바로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불평도 선택입니다. 불평의 눈을 가지면 보면 모든 것이 불만족스럽습니다. 이 세상이 우울하고 울적해집니다. 침울하고 음침한 삶의 습관이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감사한 일이 있을 때 가까이 다가서서 그것을 가슴으로 껴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불평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선택하지 말고 그냥 통과시키십시오. 머리와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 들어오려고 할 때 거절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패스게임을 하듯이 불쾌하고 잘못된 것은 통과시켜야합니다. 미움과 분노의 마음이 나를 붙잡으려고 할 때 통과시켜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이 우리를 붙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사가 다시 내 속에 솟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불평을 찍어내는 불평제조업자가 되고 맙니다. 불평타령만 하면 우리의 인생은 낭비됩니다. 아무도 그 사람 옆에 다가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불평을 만들라고 유혹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우리가 잘 아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이것은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에게 이 말을 뒤집어서 가르치려고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조롱하면서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적대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사탄이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항상 낙심해라 쉬지 말고 원망해라 범사에 불평해라 이것이 바로 사탄이 기뻐하는 뜻이다”

불평과 원망, 낙심과 절망을 통과시키십시오.

여러분, 불평과 원망을 통과시키십시오. 낙심하지 않으면서 살아본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평이 터지지 않는 상황을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때마다 불평과 낙심과 우리를 흔드는 모든 것들을 통과시키고 감사를 선택하십시오.
  
좋고 귀한 것은 끊임없이 내 안에 축적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쁘고 못된 것은 곁에서 떠나보내야 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좋은 것은 입으로 표현하고 나쁜 것은 물러가라고 통과시켜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감사를 배우려면 내가 가진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것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인생의 영점체험을 해야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임을 깨달아 영혼 깊은 곳에서 감사가 샘물처럼 솟아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또 언젠가는 빈손으로 떠나갑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신 모든 것들이 축복이고 은혜의 선물입니다. 인생에 내 것처럼 여겼던 것들이 조금만 없어지면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후서 9:14-15)

모든 것이 은혜와 은사요, 축복과 감사입니다. 바울의 인생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탄탄대로를 걸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없는 고통 속에 매를 맞았고 모욕과 비난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내 것이 아니기에 모든 것이 감사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습니다.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했습니다.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을 유럽의 역사,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강력한 능력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이 있습니다. 

“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이다.” 
  
우리 주위에 직장을 잃어버린 분들, 파산한 분들, 명예를 상실한 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더 우리가 기도해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바로 건강을 잃고 병상에 누워있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아프신 분들이 회복의 기쁨을 누리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 자신에게 주신 건강에 대한 감사의 기도도 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어제 저녁으로 인생을 끝마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아침 일어나지 못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병상에 누워 고통 받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내 손과 발로 아침에 일어났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내 발로 가고 싶은 곳을 못가고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발과 마음을 주시고 예배드릴 수 있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만큼의 건강에 감사합니다. 
눈을 떠서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귀를 열어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임합니다. 얼마 전 수험생들이 수능고사를 봤습니다. 시험을 잘못 봐서 안타깝게 여기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마음도 속상할 것입니다. 성적이 오르지 않아 마음 아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인생의 실패는 아닙니다. 젊었을 때 연애에 실패하고, 소중한 가정이 깨어져 이혼의 아픔을 겪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생의 실패는 아닙니다. 아직 건강하고 젊습니다.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직 꿈이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축복입니다. 
  
혹 건강마저 잃어버린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아직도 남은 한 가지 감사의 제목이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감사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을 주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나에게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영원한 세계를 약속해주신 하나님, 죽음 앞에서 조차도 함께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다시 기뻐하고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저도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이기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죽음 앞에 서서 의연하게 하옵소서. 지금까지 살았던 삶을 기쁨으로 회고하며 감사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설 수 있도록 축복하옵소서.”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봉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때 우리는 이웃을 위해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고린도후서 9:12)

내가 감사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감사합니다. 내가 감사하면 나의 이웃이 감사합니다. 감사의 시작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먼저 자신에게 감사하십시오.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십시오. “너 참 애썼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구나. 참 수고했다. 고맙다.” 내 손과 발을 만지면서 “너 오늘 참 수고 많이 했구나. 고맙다.”라고 이야기해 보십시오. 내 배를 만지고 쓰다듬으면서 “내가 먹고 마신 것을 잘 소화하게 해주니 참 고맙구나.”라고 스스로를 격려해 보십시오. 내 얼굴을 만지면서 “지금 이 나이에 이만큼 유지하게 했으니 얼굴아, 고맙구나.”하고 이야기 해보십시오. 자신을 격려하며 몸을 귀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교회와 이웃을 섬기며 봉사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의 직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찬양대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는 목소리와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교회 구석구석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예배 안내위원으로, 차량봉사로, 슬픔과 고통을 당한 분들을 위로하는 경조로, 음식을 만드는 일로 사랑의 섬김을 할 수 있는 직분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는 감사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헌금을 낼 수 있는 돈과 재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기도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함을 즐거움과 기쁨으로 감당할 때 감사는 우리를 생명력 있게 이끌어줍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고린도후서 9:7)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것은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인색함이나 억지로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두려움과 억지로 하지 말고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평생 감사」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침에 감사로 눈을 뜨면 그 생활은 맑음. 
감사의 햇살이 불평의 구름에 가려지면 그 생활은 흐림. 
그리고 그 불평이 연속되면 그 생활은 장마.”

여러분, 불평의 장마를 너무 오랫동안 간직하지 마세요. 자연의 장마는 기다리기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불평의 장마는 결심하면 됩니다.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하며 즐거움으로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십시오. 불평은 통과하기로 결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새로운 길로 열어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불평과 원망과 분노를 내쫓기 원합니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내쫓기를 결단하며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가슴에 쌓기를 원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생명의 축복을 마음껏 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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