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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마 9: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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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마 9:23~26)


회당장 야이로

우리는 지난 시간에 혈루증 앓는 여인을 치유하는 기적을 묵상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외로이 살던 한 여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모습에 놀랐고 또 여인과 함께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함께 기뻐할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던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자기 딸이 곧 죽을 지경이라 한시가 급한데 혈루증 앓는 여인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본문을 비교해가며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지난 시간에 말씀한 대로 이 사건을 많이 축약해 놓았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9장 18절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를 간단히 ‘직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본문은 이미 소녀가 죽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복음 5장의 본문과 비교하면 소녀는 그 가는 도중에 죽은 것으로 판명됩니다. 이는 마태가 전달하려는 것은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에 있지 회당장의 믿음이나 주변 상황을 언급하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당장처럼 연약하며 또 죽음 앞에 절망하기 쉬운 우리로서는 회당장의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의 본문에 더 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가복음 5장 22절과 2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회당장은 보통 직책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많은 충돌이 있었는데 회당장은 아마도 바리새파이거나 그에 동조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그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엎드린 것에 그치지 않고 성경은 “많이 간구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빌고 또 빌었다는 말입니다. 사상적으로 적대적이며 또 자기 동료들이 미워하는 예수님 앞에 회당장이라는 절대적 신분을 가진 자가 이렇게 비굴한 모습이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자식 때문입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누가복음에서는 이 딸이 외동딸이었다고 밝힙니다(눅8:42). 사랑하는 자기 딸이 죽게 된 현실 앞에서는 자기 체면이나 자기 사상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더한 일도 했을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 인간은 참 별 것 아님을 깨닫습니다. 평소에는 체면을 따지고, 이치를 따지며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리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이처럼 큰 시련을 줄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아픈 것이야 어떻게 견딜 수 있다지만 자식이 아프면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부모는 없습니다. 

요 몇 년 전 수필가 이어령 씨가 기독교로 회심한 사건 때문에 교계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이도 70을 넘기고, 당대의 지성이요 석학이라고 불리던 그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그의 딸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딸이 암에 걸리고 또 눈이 실명되어가는 위기에서 이어령 씨는 미국 하와이에 있는 한 작은 교회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딸 민아에게서 빛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남은 삶을 주님의 종으로 살겠나이다.” 

이런 간절함 덕분인지 기적처럼 자기 딸이 다시 빛을 보게 되고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그 때 이렇게 자기 딸에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정말 네가 주 안에서 편안함을 얻었다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나의 무력이 증명된 것이 아니냐. 내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았구나. 동행하자. 지금 자신은 없지만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이게 해 달라.” 하나님은 진리이신 당신을 만나게 하기 위하여 이처럼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기 자신이 무력해지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때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알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회당장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그는 아직 완전히 자기 마음을 굽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회당장은 여전히 자기 생각이나 체면이 강한 사람입니다. 회당장은 주님께서 자기 집에 오실 것을 요구합니다. 아니 그렇게 급하면 자기 딸을 엎고 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지난번에 묵상했던 백부장의 믿음과는 얼마나 대조됩니까? 이방인이었지만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아팠을 때 예수님이 그 집에 가려하셨지만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8:8) 하며 주권자로서의 예수님을 인정하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또 자기가 판단하여 자기 딸 위에 손을 얹으사 낫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손을 얹든 손을 잡고 일으키든, 아니면 말씀으로만 고치든 그것은 예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가 무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간청할 뿐이지 그 방법과 그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이처럼 부족한 모습이지만 주님은 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을 찾은 그 아버지의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야이로의 집을 향하여 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밀치며 따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행렬은 도중에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방해를 받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중간에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딸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예수님은 이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멈추어 서서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나는 다급한데 주님은 전혀 태평한 듯 보일 때입니다. 나의 기도는 간절한 데 주님은 전혀 듣지 못하시는 듯 딴 일만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듣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11:5,6)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랑한다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일부러 그렇다는 듯이 그곳에서 이틀을 더 지체하셨다가 가십니다. 이 사이에 나사로는 죽고 맙니다. 주님을 목매어 기다리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자신의 오라비가 죽었을 때의 절망감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다른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주님은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더 큰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기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죽음마저도 이기는 부활신앙의 위대함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 또한 결국에 가서는 동일한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혀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왜 내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탄식만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원망조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함께 이런 기도도 한 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무슨 일을 하시길 원하십니까?” 주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신뢰하는 기도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회당장의 우려대로 자기 어린 딸은 그 사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과 지체하는 사이에 마가복음 5장 35절의 소식이 들립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가셔도 이제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절망감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회당장의 이런 절망감을  아시고 주님은 회당장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36) 

물론 이 믿음은 쉬운 믿음은 아닙니다. 자기 딸이 죽었는데 그때도 믿음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린 자녀를 불의의 사고로 보내야 하는 부모에게 믿음이란 말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오히려 원망만 가득할 것입니다. 죽음이란 인간이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신뢰한다는 차원을 넘어 죽음이라는 절대적 절망을 이길 수 있는 정도의 믿음입니다. 도대체 그런 믿음이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주님이 도중에 시간이 지체됨을 허락하셨던 것도 회당장 야이로와 제자들에게 이 믿음을 가르치시길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가니까 큰 소동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합니다. 개역성경에서 ‘훤화한다’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피리 부는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유대의 고유한 장례식 풍속입니다. 피리의 구슬픈 소리는 이별의 슬픔을 더하게 합니다. 더구나 죽은 아이는 이제 12살 밖에 되지 않았고 그 집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입니다. 온통 눈물바다요 죽음의 절망감이 이 집안을 휘어잡고 있을 것입니다. 정말 죽음은 인생을 무력하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석가모니와 관련된 일화입니다. 고따미라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큰 부자집의 안주인이었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딱 한 가지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소원하다 결국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아들이니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가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복받친 여인은 죽은 아이를 안고 만나는 사람마다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한 노파가 석가모니에게 찾아가보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은 석가모니를 찾아가 죽은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를 가엽게 여긴 석가모니가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아이를 살려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마을에 내려가 겨자씨 한 줌을 얻어오는데, 그 겨자씨는 이제껏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던 집의 것을 가져와야 한다.” 석가모니의 말을 듣고 고따미라는 여인은 기뻐하며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겨자씨를 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인은 석가모니가 요구한 그런 겨자씨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온 마을에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던 집은 단 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 여인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모든 인간들은 죽음이라는 슬픔을 안고 있으며, 단지 좀 빠르거나 좀 늦음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필연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처방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정면도전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태도는 2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주님은 죽은 소녀를 향하여 단지 자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잠과 죽음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둘 다 전혀 의식이 없다는 점입니다. 단지 죽음은 영원히 의식이 없는 것이요, 잠은 아침이며 깨어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주님은 죽음이 절망이 아니라 잠처럼 다시 깨어나는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죽음의 힘을 무력화시킵니다. 이것을 부활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시작의 문임을 믿습니다. 신앙인들은 죽음을 죽음이라 부르지 않고 잠이라 부릅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후에는 하나님 품에 있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15:51)

주님은 제자들이 이런 부활 신앙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이 땅에서 부활의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죽은 소녀를 살림으로써 그렇습니다. 마가복음 5장 41절에서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달리다 쿰”, 곧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달리다’는 소녀라는 뜻이고 ‘쿰’은 일어나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마치 아침에 늦잠 자는 아이를 향하여 엄마가 “그만 자고 일어나!” 하고 명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나 걸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이 기적은 단순히 죽은 자를 살리는 소생의 기적이 아닙니다. 부활의 기적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은 우리 죽은 자들의 손을 붙잡고 “아무개야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 소리에 다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명령하실 때는 죽음을 뛰어넘는 이 부활의 믿음을 소유하시길 원하여서였습니다. 이미 죽은 딸 때문에 슬퍼하고 절망한 무리들을 향하여서 예수님께서 구지 말씀하셔야 했다면 “슬퍼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시던지 “좌절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죽음의 절망감 앞에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 부활의 믿음을 갖기를 소원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순간부터 죽음은 그 힘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은 결정적으로 무력해졌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이런 부활신앙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옛날 어렵게 살던 시대보다 지금은 더 죽음을 두려워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건강 식품을 챙겨 먹고 건강 검진을 하고 행여 사고라도 날까봐 집 안에 꼭꼭 처박혀 있지만 죽음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앙인들도 암에 걸리면 그 반응이 믿지 않는 자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부목사 시절 여러 성도들의 죽음을 보았지만 신앙인으로서 죽음을 당당히 맞는 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가 되면 그 부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찬송을 부를 때마다 천국 소망에 대한 가사가 빠지지 않는데 정작 천국 소환장이 왔을 때는 주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이 맡기신 일이 있는 동안에는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가 되면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죽음을 절망을 극복한 부활신앙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소녀야 일어나라

이 기적은 역사적인 시각까지 좀더 확대해서 적용해야 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소녀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고 밝힙니다. 12라는 숫자는 혈루증 앓는 여인의 경우에도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이름은 역설적으로 “깨운다, 살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당으로 대표되는 율법 체제는 그 딸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AD 70년경에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기록된 때가 AD 70년, 마태복음은 80년경으로 잡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이 기적을 기록하면서 죽어버린 야이로의 딸과 같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의 패망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결국 이스라엘은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신앙인은 끝까지 희망을 붙잡는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이든 역사적이든 그 어떤 어려움들과 절망의 사건들이 그들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다 죽고 다 망한 것과 같은 것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부활의 역사이며 부활신앙입니다.

에스겔 서에 보면 하나님이 죽어서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에스겔을 데려갑니다. 그뼈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렇게 대언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겔37:4-6) 여호와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마른 뼈들이 움직여 서로 짝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그 위에 힘줄이 오르고 살이 생기며 가죽이 덮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겔37:9) 하니까 사방이 생기가 들어가 그들이 살아서 큰 군대를 이룹니다. 이 환상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시 살아나는 역사적 부활의 환상입니다.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겔37:11-12)

이 환상은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된 땅에서 받은 말씀입니다. 포로 되어 망한 것은 역사적으로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다시 살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역사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위기가 임하지만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희망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아무리 위기거나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절망과 역경의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고 단지 믿기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믿음은 죽음이라는 극한의 상황마저도 뛰어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죽음이라는 절망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절망의 상황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죽음은 아닐지라도 여러 절망적 상황에 부딛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고, 닫혔던 것이 열리며, 묶였던 것이 풀어지는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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