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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심은 대로 거두리라 (갈 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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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 대로 거두리라 (갈 6:6~10)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싱거울 정도로 뻔한 말 같지만 사실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진리란 항상 이처럼 평범하고 쉬워 보이는 말 속에 담겨 있게 마련입니다.
  
이 속담이 가르쳐 주는 귀중한 진리 역시 비단 우리나라 사람에게뿐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선포하는 금언(金言)을 통해서도 재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 철칙의 창시자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홍수 직후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고 오고 올 모든 인류에게 선포하셨고, 그 이래로 이 원칙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정확하게 작동해 왔으며 앞으로도 세상이 존재할 동안 계속될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은 비단 농사에서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정확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적인 열매 역시 그가 무엇으로 어떻게 심었느냐에 따라 그대로 결정되어진다는 점을 본문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바로 이 말씀을 통하여 각자의 지난 한 해를 되새겨 보고 또한 앞날의 더 큰 축복을 위한 서원을 새로이 다지고자 합니다.

1. '성경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신자만이 '좋은 것의 축복'을 거두게 됩니다. 

본문 6절과 7절의 말씀에 "6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르침을 받는 자"란 말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남의 지도 아래 있는 자'란 뜻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란 두말할 필요 없이 그처럼 신앙생활을 지도해 주는 자로서 곧 목회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뜻은 말씀을 듣고 배우는 평신도들이 그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쳐 주는 목사를 물질적으로도 잘 대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 관계에서 우선 목사는 자신이 하나님 "말씀"의 씨를 잘 뿌릴 때에 그것이 교인들에게 축복의 결과로 나타나게 됨을 늘 확신하는 가운데 말씀 선포에 주력해야 합니다.
  
목사란 자신의 무슨 '겸손한 마음'이나 '좋은 성격' 따위로 교인들을 기분 좋게 해 주는 직분이 아니며, 또는 교회의 운영을 무슨 '구제'나 '사회사업' 위주로 해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유익을 끼쳐 주는 사명이 결코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자'라는 사실을 목사 본인부터가 철저하게 믿고 체험하는 가운데, 매 주일의 강단에서부터 바로 이 '말씀의 복'을 성도들에게 풍성하게 나누어 주는 사명에 그야말로 전력투구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 편에서는 바로 그런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기만 하면 반드시 "모든 좋은 것"을 받게 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일에 들은 성경 말씀을 자기 생활에서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필연적으로 '과실'을 맺게 되고 만사가 '형통'하게 되는 축복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직접 맛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 교인들의 생활강령 제4번 "설교 말씀을 생활에서 체험한다."는 말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렇게 될 때 목사와 교인은 그 '좋은 것'을 "함께 하게" 됩니다.
여기서 '함께 하라'는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의 동사형입니다.
즉 이 관계란 문자 그대로 '나누면서'(share) '교제하는'(fellowship)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교역자를 물질적으로 대접하는 것은 결코 어떤 '지불'이나 '급여' 따위가 될 수 없으며, 오직 목사는 말씀의 좋은 것으로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고 성도들은 그 얻은 축복을 또한 목사와 함께 나누는 관계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계와 체험에 대하여 본문 말씀은 연이어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만홀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코웃음 치다, 깔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이 감히 깔보고 적당히 속여 넘길 수 있는 만만한 상대가 되실 수가 있겠습니까?

교역자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일 수는 있습니다.
'나는 할 만큼 열심히 했는데 이 지역의 교인들의 수준이 낮아서 신앙이 안 자라고 이 교구에는 새로 짓는 아파트는 없고 다 이사 나가는 교인들뿐이니 성장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지.'라고 스스로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목사가 설교 준비에 불충하여 교인들이 은혜를 받지 못했고 그 전도사가 전도와 심방에 게을러서 교회 부흥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속으실 리는 만무합니다.
교역자들도 오직 '심은 대로 거둘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역시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스스로를 속일 수는 있습니다.
'내 진심이야 교회 봉사도 많이 하고 싶지만 지금 내 현실이 너무 바쁘고 힘이 드니 어떻게 하나?'라고, '나는 정말 더 헌금을 하고 싶지만 하나님께서 내 사업에 축복해 주지 않으시니 별 수가 있나?'라고 제 딴에는 아주 완벽하게 자신을 합리화시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같이 속아 주실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은혜를 받지 못하니 교회봉사는 그저 짐으로만 여겨질 수밖에 없고, 예배시간에만 '아멘'할 뿐 엿새 동안의 삶을 통하여서는 그 말씀에 따르는 순종이란 조금도 없으니 축복이 따라오려야 올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저 위에서 다 환히 내려다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심는 자만이 좋은 것으로 거두게 되어 있음'은 그 어느 장로나 집사나 권사나 교인에게도 예외가 없는 철칙일 뿐인 것입니다.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해 줄 이 성경 말씀의 씨앗을 자신의 생활 속에 부지런히 뿌림으로써 시절을 좇아 맺게 해 주시는 각양 형통의 축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심는 신자가 '영생의 축복'까지 거두게 됩니다. 

본문 8절에 "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읍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육체'와 '성령'은 사람이 자기 인생의 씨를 뿌릴 수 있는 두 가지 투자의 대상과도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은 사람의 낮고 천한 본성, 즉 악한 본성이라는 그 '나쁜 땅'에다가 자꾸 자기의 행실을 심어가는 것입니다.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하여 저지르는 일, 이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저지르는 일, 해야 마땅한 일인 줄 알면서도 게으름으로 인하여 못하는 일,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는 바로 육체를 위하여서만 심고 심고 또 심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인이라 하면서도 실제로 마음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는 일은 순전히 '자기의 육체를 위한 일' 곧 남편 직장 승진이나 자녀 대학 입학이나 자기 인생 행복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인생은 점점 더 '돌밭'이 되고 점점 더 '썩어진 것'만을 거두는 흉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자신이 좀 더 경건한 성도로 자라지 못하고 좀 더 성숙한 신자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날마다 내가 어디에다가 씨를 뿌리며 무엇을 위해서 밭을 갈고 김을 매고 있는지를 곰곰이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자기 생을 그 수단으로 바치려 하지 아니하고 정반대로 자기 인생이 목적이 되고 예수님을 그 수단으로 써 먹으려 하는 교인은 정말 백날이 가도 진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육체를 위하여'서만 심고 있으니 거기에서야 당연히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만 나올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반면에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라는 말은 '성령의 뜻을 따라서 행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오직 성령께서 감화감동시켜 주시는 바를 따라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데, 그렇게 살 때에 최종적으로 거두게 되는 열매가 바로 "영생"이 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성령을 좇는 성화생활'이며 그런 성화의 완성 단계로서 '영화'(榮化)에 이르게 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예배 드려야 할 곳에서 제물의 씨를 뿌리고 기도하러 모여야 할 바로 그곳에 서원의 씨를 심으면서 또한 순간순간마다 자신의 삶 구석구석에 경건의 씨를 부지런히 뿌려나가야만 성화라는 열매를 이 세상에서도 맺을 수 있고 결국 내세의 영생이라는 최고의 수확까지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좀 더 거룩한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기는 잘못을 흔히 저지릅니다. 
'나는 원래 본성이 이렇게 되어 먹은 놈이니 아무리 해도 별 수 없다.'라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미리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해이며 또한 핑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건생활 역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심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 자신이 이미 어떤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그에 따라 행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행위에 대한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며, 오히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려 있다.'라는 자세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성격이란 것은 우리의 행위에 의하여 다듬어져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화'도 '심고 거두는 것'입니다.
본문 앞장에도 보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라는 저 유명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경건생활들을 가리켜 "성령의 열매"라고 했으니, 그것은 분명히 어떻게 심었느냐에 따라서 거두게 되는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영어 속담에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버릇을 거두고 버릇을 심으면 성격을 거두고 성격을 심으면 운명을 거둔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운명'이라는 말만 '성령의 열매'라고 바꾸어 놓고 보면 바로 우리 기독신자의 성화에도 적용해 볼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화라는 것은 그저 점잖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눈을 감고 도를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 육체의 본성이 욕망하는 것을 억제하고 오직 성령께서 감동시켜 주시는 바를 따라서 열심히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함으로써 '범사에 유익'한 열매를 거두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된 축복까지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교회 중심으로 선행'하는 신자가 결국에 가서는 '필연적인 축복'을 거두게 됩니다. 

본문 9절과 10절에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말이 좋아서 선행이지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든 일입니다.
신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충성스럽게 이행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피곤"과 고생과 어려움을 동반하는 일인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런 까닭에 '선을 행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낙심하기 쉬운 약점'도 동반하게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데에 비하여 그 결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을 때라든지 자신은 죽도록 충성하는데 바로 곁에 있는 교인은 전혀 힘을 합해 주지 않고 혼자 쏙 빠져 버리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선을 행하고 있던 신자도 절로 기운이 빠지고 자기도 그만 두고 싶어질 때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런 경우를 겪어 보아서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런 까닭에 그는 본문에서뿐 아니라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에게도 똑같이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 3:13)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자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까?
왜냐하면 이 선행 역시 뿌리고 거두는 원리가 정확하게 작동되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즉 '피곤하다고 중단하지만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려 놓은 농부가 힘들다고 해서 그 논밭을 계속해서 돌보지 아니하면 아무 결실도 보지 못할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며, 사실상 그 어떤 농부도 그런 바보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 7절과 8절에서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우리를 강하게 격려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씨를 뿌린 날 당장 거둘 것이 생기지 않는다고 불평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자기의 선행이 당장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 않는다고 일찍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때가 이르매 거두게" 될 그날까지 길이 참으면서 부지런히 선행의 씨들을 뿌리고 키워야 할 따름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독신자들의 선행의 최우선이 어디에 집중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지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착한 일을 한다 해도 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다 할 수는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며 또한 신자들의 선행이 사회사업이나 적선 수준에서 끝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불신자들도 하는 선행이며, 적어도 기독신자들로서의 선행은 어디까지나 '믿음의 가정'들의 모여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라고 하시면서, 가룟 유다가 '가난한 자'에게 구제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던 그 '옥합의 향유'를 전적으로 당신을 위하여 사용하신 행위를 두고 칭찬하셨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처럼 교회를 중심으로 행한 선한 일들이야말로 기독신자가 '피곤치 아니하고 낙심치 아니하고' 계속 뿌리고 심기만 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두게 되는' 축복으로 나타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교회야말로 신자가 선한 일을 할 것이 가장 많은 장소이며 또한 많이 행해야만 할 사명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농부가 자기 밭이 아닌 다른 사람의 밭에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돌본다면 그 열매가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밭이 아닌 다른 곳에 제 아무리 많은 기부를 하고 교회가 아닌 세상 사회사업 단체를 통하여 아무리 열심히 선행을 한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선한 결과를 가져 오겠습니까?

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베푼 선한 일들은 바로 그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을 위하여 심은 것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냥 '물 위에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는 우리 예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여러 날 후에' 바로 이 교회를 중심으로 반드시 거두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습니다.
나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다 해결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거저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급은 '각자의 행한 것'을 따라 얻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35년 역사에 이렇게 큰 부흥을 이루게 된 것은 바로 원로목사님과 1대 당회원 장로님들과 개척시절의 성도들이 정말 '많이 심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이분들이 심어 놓았던 씨들이 이제 자라서 큰 축복의 열매들로 나타난 것들을 이처럼 풍성하게 받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농부라면 한번 추수했다고 그 밭을 놀려 두거나 농사일을 그만 두지 않습니다.
결실이 풍성한 좋은 밭에는 내년의 새로운 수확을 위하여 당연히 또 심을 것이고 농사짓는 요령을 터득했으면 종자를 더 많이 뿌려서 더 큰 부자가 되려고 할 것이 당연합니다.
  
이 교회는 정말 여러분의 씨앗을 뿌릴만한 '좋은 밭'인 것이 이미 명백하게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원로목사님과 초대 장로님들은 신앙생활의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그 요령과 비법에 대하여 그 완벽한 본과 구체적인 증거를 이미 우리에게 뚜렷하게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까?

지난 한 해 동안에 만약 '거둔 것'이 없다면 내가 '심은 것'이 없기 때문인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반면에 베풀어 주신 풍성한 것들이 많으면 우리에게 '말씀'의 좋은 종자를 주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끌어 주시고 이 교회라는 밭에서 지난 한 해 동안 힘써 일할 수 있게 해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또한 저와 여러분에게는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으며 새로운 경작의 시절이 주어졌습니다.
  
오늘까지는 아직 예수님께서 재림하지 않으셨으니, '심은 것'이 없는 자는 이제부터라도 심고 '거둔 것'이 많은 자는 더 많이 거두기 위하여 또 다시 심을 시간이 분명히 주어진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피곤치 아니하면서, 결코 만홀히 여김을 당하지 아니 하실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말씀대로 뿌리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심고 교회를 중심으로 키움으로써 반드시 거두게 해 주실 모든 영육 간의 축복을 새해에는 더 풍성하게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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