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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사람 (삼상 2: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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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사람 (삼상 2:27~36)
 
  
우리나라에서는 부부가 서로를 부를 때 대부분 ‘여보’ 또는 ‘당신’이라는 말을 씁니다. 갓 결혼한 사람들은 어색해서 부르기 힘들어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부부들은 그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그 뜻을 새겨보면 너무도 좋은 말입니다. ‘여보’라는 말은 같을 ‘如’(여)와 보배 ‘寶’(보)를 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보배 같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여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내게 ‘보배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라는 말은 당할 ‘當’(당)과 몸 ‘身’(신)을 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당신은 내 몸’이라는 뜻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당신’이라고 부를 때 ‘내 몸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부부가 행복한 관계를 이루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여보!‘ 즉 ’내게 보배 같은 사람‘이라고 존중하여 부릅니다. 아내는 ’당신‘ 즉 ’내 몸과 같은 사람‘이라고 존중하여 답합니다. 이렇게 피차가 존중하여 대할 때 행복한 부부관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해 드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정말 가까운 사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0절에서 하나님께서 이 점을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존중히 여기시고, 반대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기 않는 사람 더 나아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 그들을 존중히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경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은 이 말씀을 그대로 확인해 줍니다. 전반부에 두 인물이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사무엘과 엘리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존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경멸을 당했습니다. 

후반부에 또 두 인물이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다윗과 사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존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경멸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사무엘 상]을 읽으면서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무엘처럼 그리고 다윗처럼 하나님께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사무엘처럼 그리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삶을 살 것인가? 이 점을 깊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중심으로 엘리와 사무엘을 비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존중히 여기시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

엘리와 사무엘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비해 사무엘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무엘이 등장하기 전에 엘리와 그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상 전반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 제사장과 그 두 아들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2: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제사장으로서 제사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제사 직무를 수행하다보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단절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들이 목회하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봉사자들이 교회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배자들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저 직무 상 또는 몸에 밴 습관을 따라 교회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달랐습니다. 삼상 1-4장을 보면 원어로 네차례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섬겼다.” 삼상 1:28, 2:11, 2:18, 그리고 3:1입니다. 당시 엘리를 비롯하여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동안에 사무엘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렇게 기본 태도가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늘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넬슨 제독과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저마다 두 나라를 대표하는 전쟁의 영웅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대조적인 지휘관이었습니다. 한 번은 나폴레옹이 전쟁에 나가려는데 부하가 “각하, 목사님을 모셔다가 기도를 하고 나가시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야. 전쟁과 하나님은 아무 상관이 없어.” 안타깝게도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영국의 해군 제독 넬슨은 달랐습니다. 전쟁에 나갈 때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허사로다”(시 127:1)라는 성경 말씀을 늘 암송했습니다. 그리고 전투에 나가기 전에 군목과 함께 갑판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겪는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야 말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첫 걸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기셔서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형통케 인도하십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성실한 사람

엘리와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습니다. 엘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성실했습니다.

본문에 엘리는 무려 나이가 98세였습니다.(삼상 4:15) 이에 비해 사무엘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엘리는 제사장이요 사사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이끈 지 40년이나 되었습니다.(삼상 4:18) 이에 비해 사무엘은 제사장 훈련을 받고 있던 인턴과 같은 초보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임하는 자세가 노 제사장 엘리가 훌륭하고 사무엘은 그저 실수하면서 배워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삼상 3:2-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저녁이 되어 엘리 제사장은 자기 집에 편히 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상 1:9를 보면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낮에도 엘리 제사장은 그저 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삼상 4:1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지금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전황이 좋지 않아서 언약궤를 전쟁터로 내 보낸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영적 지도자라는 사람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소중한 직무를 부여 받은 사람들일 지라도 성실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그 직무를 대할 수 있습니다. 게을러서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예 다른 일에 바빠서 거들떠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성실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실하지 못한 것은 곧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성실하지 못합니다. 교인으로서의 기본 의무를 제대로 담당하지 못합니다.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십일조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맡은 바 봉사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성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달랐습니다. 삼상 3:15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사무엘이 아침 일찍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해 놓고 여호와의 전의 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실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무엘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것입니다.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 패코 철강의 백영중 회장의 자서전입니다. 부제가 재미있습니다. “No Money No English"입니다. 돈 없이 영어도 못한 채 미국에 와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백 회장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한인 사업가입니다. 현재 연 매출이 2억 달러가 넘고, 미국 내 경량철골분야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패코 철강회사를 설립해서 키웠습니다. 1999년에는 미국의 올해의 기업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해서 기자와 인터뷰 중 성공 비결을 털어놓았습니다. “어려운 이국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돌봐주신 것이고, 다음으로는 매사에 성실하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 붙였습니다. “나는 물건을 팔겠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저 고객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그 필요에 응하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이런 성실함을 고객들이 알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실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도 성실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실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 사람

엘리와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도 달랐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삼상 2:27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에... ”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선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29절을 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안타깝게도 엘리는 그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꾸짖음이 있었는데 그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3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일이 이를지라...” 안타깝게도 엘리는 하나님 앞에 이 저주를 거두어 달라고 간구하지 않습니다. 이 무서운 저주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삼상 3: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져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을 닫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달랐습니다. 삼상 3:10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이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경청하려고 귀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삼상 3:19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경청하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 하나까지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경청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니까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국행동과학연구소에서 전국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답니다. “문제가 생기면 누구와 상담을 하는가?”는 물음에 44.7%가 ‘친구’, 27.2%가 ‘부모’ 그리고 15.4%가 ‘형제’의 순으로 답했답니다. 그리고 “왜 부모나 선생님께 상담하지 않고 친구와 상담을 하느냐고?”는 물음에 ‘친구’는 내 말을 들어주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하실 때 귀담아 듣는 사람들 그들과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저 듣기 보다는 자기 말만 많이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말하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인간 관계론의 대가 데일 카네기는 [카네기 인간관계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무기는 입이 아니라 귀다. 대화의 질은 서로 상대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들어주는가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같은 요구라 해도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의 요구에 더 잘 따른다.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는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판단하셨고, 사무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귀를 종긋 세워서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설교 시간에 귀를 세워야 합니다. 내게 뭐라 말씀하시는가를 경청해야 합니다. 기도 시간에 귀를 세워야 합니다. 기도 중에 뭐라 말씀하시는가를 경청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존중히 여긴다고 판단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을 존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존중히 여김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존중해 여겨야 합니다. 우선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성실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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