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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소박한 감사의 결과 (요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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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 대한 놀라운 은혜 (요 6:1~13)

 
❚어머님의 감사

며칠 전 미국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에게서 이메일이 하나 왔습니다. 제 신학교 후배이고 제가 군목으로 있을 때 군종병으로 있던 친구인데 제 모교회인 상도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다가 얼마 전 미국으로 간 후배입니다. 저의 부모님이 계신 교구를 맡아 부모님에게 극진히 잘 해주었던 고마운 후배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친구가 저의 어머님 소천하신 소식을 뒤늦게 들은 모양입니다. 노 권사님(저의 어머님이지요)이 자기에게 너무 잘 해주신 고마운 분인데 참 안타깝다며 메일을 보내 온 것입니다. 자기가 저희 부모님 댁에 심방할 때마다 어머님이 아이들 과자 사주라며 손에 봉투를 쥐어주며 환하고 웃으시곤 했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도 얼마 안 되는 액수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젊은 부목사에게 저희 어머님의 작은 정성이 아마 오래 오래 기억에 남았던 모양입니다.

후배 목사의 메일을 받고 문득 어머님 발인예배 때 상도중앙교회 담임목사님이 설교하며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목사님은 해마다 생일을 두 번씩 치렀다는 것입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목사님이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입니다. 

어느 날 저희 어머님 노 권사님이 손에 뭘 들고 담임목사실로 찾아오셨더랍니다. 오늘이 목사님 생신인데 작은 선물 하나 사왔다며 손에 쥐어주고 가시더랍니다. 비록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정성이 담긴 작은 선물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목사님 생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저희 어머님이 날짜를 잘못 아셨나봅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저희 어머님이 귀가 많이 어두우셔서 큰 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잘 못 알아들으시는 데다가 그 상황에서 오늘이 내 생일 아니라고 하면 겸연쩍어 하실까봐 그냥 받으셨답니다. 그리고 그 해로부터 시작해서 해마다 그날만 되면 어김없이 저희 어머님이 선물을 들고 찾아오셨고 그 생일선물 아닌 생일선물은 어머님이 병상에 누워 움직일 수 없게 된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거창한 것도 아니고 비싼 것도 아니지만 정말 소박한 마음으로 목회자를 섬긴 어머님의 마음이 두 분 목회자의 가슴 속 깊이 감동과 감사로 남아있었던 것을 느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예전에 저는 저희 부모님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 적지 않은 불만이 있었습니다. 제가 목회자인데 목사인 아들을 두고 부모님이 얼마나 영적으로 도움이 되어주셨는가 하는 불만이었습니다. 남들은 부모가 목사요 장로라고 해서 아들이 목회하는데 기도로, 영적으로, 또 실제적으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는데 저희 부모님은 겨우 교회 나가셔서 안수집사, 명예권사로 계시니 그래도 교회 안 다니는 부모보다는 낫지만 아무래도 제 목회에 그리 큰 도움은 못 된다 싶어 불만을 가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인 생각입니까? 지금 생각하니 이런 철없는 생각을 한 저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결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두 분 목사님이 이야기를 통해 오늘 내가 여기 있기까지 부모님의 기도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가, 특별히 어머님이 목회자들에게 베푼 소박한 사랑의 손길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님의 그 소박한 사랑과 정성이 목회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 그 목회자들은 결국 그 감사의 마음을 누구에게 돌리겠습니까? 아들인 제가 목회 잘 하도록, 훌륭한 목사 되도록 기도해주고 기억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어머님의 작고 소박한 감사가 다른 이들에게 큰 감동으로 전해지고 그 감동과 감사는 자식인 저에게까지 미치는 놀라운 감동의 순환이, 감사의 순환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주일 설교 시간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사를 전하라고요. 그것이 감사의 작은 선물이 되었든, 감사의 말 한 마디가 되었든 간에 여러분이 주변 사람들과 지금 나를 있게 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를 가르치고 키워주고 세워준 어른과 윗분들과 고마운 사람들에게 전하는 그 작은 감사의 표현이, 그 소박한 감사가 결국은 감사의 순환을 통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의 역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들의 사랑과 헌신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면 절대 못합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 아니요 나를 사랑해주고 도와주고 아껴준 너무 고마운 일이라 여겨진다면 비록 거창하고 큰 것이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작은 감사의 표현이, 그 소박한 마음이 그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분들에게 힘을 주고 그래서 결국 그 감동과 사랑이 다시 나와 내 자손들에게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소박한 도시락

어느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 해변 가의 어느 야트막한 산 위에 오르시는데 그 뒤에는 수많은 군중이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친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많은 무리가 몰려오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걱정하십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저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 그런데 바로 그 때 제자인 안드레가 한 아이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옵니다. “선생님, 이 아이가 지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겨우 이것 가지고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 다른 사람은 젖혀두고 예수님이나 혼자 드시라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들 모두를 잔디에 앉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 것일까요? 더 이상한 것은 한 사람이나 겨우 먹을까 말까 할 정도의 식사인데 그것을 가지고 거기 앉은 사람들 모두에게,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이요 여자와 아이들까지 치면 만 오천 명은 족히 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데 그것도 조금씩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앉아있는 사람들이 달라는 만큼 충분히 주어서 배부르도록 먹었다고 하는데도 보리떡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여러분이 다 아실만한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놀라운 오병이어 사건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입니까? 본문을 따라 자세히 읽어가노라면 우리는 두 가지 원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한 아이가 가지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 두 번째는 예수님이 이 오병이어를 앞에 두고 하신 축사입니다.

먼저 한 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다섯 개의 떡이란 보리로 만든 투박한 빵입니다. 물고기 역시 갈릴리 바다에서 잡은 멸치 같이 작은 물고기를 말린 것입니다. 보리떡에 아무 것도 안 들어있기 때문에 먹다보면 입이 텁텁합니다. 그래서 짭짤한 말린 물고기를 함께 먹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당시 갈릴리의 가난한 서민들이 먹던 너무도 소박한 한 끼 식사 메뉴입니다. 아마도 이 아이가 예수님 말씀을 들으러 간다니까 어머니가 먹으라고 싸준 도시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어렸을 때 싸가지고 다니던 도시락 생각이 납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거의 다 학교에서 급식을 하기 때문에 도시락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저 어렸을 때만 해도 모두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지요. 그런데 그 투박한 양은 도시락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습니까? 우선 밥입니다. 그나마 흰 쌀밥이 아닌 정부에서 강제로 혼식을 하도록 시켜서 반드시 보리쌀이나 콩이 섞인 밥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다 열게 하고 혼식을 제대로 했는지 검사까지 했습니다. 반찬은 무엇이었습니까? 제일 많이 등장한 메뉴는 멸치 볶은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계란 부침이라도 하나 들어 있는 날은 아주 호사스러운 식사를 즐기는 날이었지요. 그러니까 이 아이가 들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말린 물고기 두 마리는 우리가 옛날 싸가지고 다니던 보리밥에 볶은 멸치쯤 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게 이 아이가 가진 전부 아닙니까? 어렸을 때 우리가 싸가지고 다니던 도시락도 우리가 가진 전부 아니었습니까? 그 도시락조차 못 싸가지고 온 가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가여운 마음에 그 도시락을 친구에게 주고 나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안 남았습니다. 나는 꼼짝 없이 굶는 겁니다. 요즘 아이들 들으면 “도시락 없으면 햄버거 사먹든지 컵라면 먹으면 되잖아?”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그야말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거들먹거리며 큰 연보를 드린 그 어떤 부자보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귀하게 여긴 주님처럼 이 아이의 그 소박하고 하찮은 도시락은 그 아이의 가진 전부였기에 가장 귀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왜 그 귀한 도시락을, 자기의 가진 것 전부를 예수님께 내놓은 것일까요? 요한복음에는 그런 말이 안 나오지만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가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이 아이가 오병이어 도시락을 내놓은 시점은 해가 저물 때쯤입니다. 모든 사람이 말씀 듣느라 하루 종일 굶주려 있던 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 듣는 사람들도 배고프고 굶주렸는데 하물며 하루 종일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어떠셨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 아이가 도시락을 내놓은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 아이가 왜 그 귀한 도시락을 기꺼이 내놓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이런 이유 아닐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아이의 마음속에 감사의 마음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드는 가운데 한편으로 주님이 얼마나 배가 고프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드린 것이란 말입니다. 물론 소박한 감사입니다. 주님의 그 수고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도시락입니다. 하지만 이 이름 모를 아이의 소박한 감사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오병이어의 위대한 기적을 일으킨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축사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아이가 드린 소박한 도시락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하신 축사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 음식을 앞에 두고 축사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축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오’ 즉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 ‘축사’하다라고 되어 있다 보니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음식을 앞에 두고 무슨 거창한 축사의 말을 하셨나보다, 또는 오병이어를 앞에 두고 축복기도를 세게 하셔서 기적이 일어났다보다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하게 음식을 앞에 두고 감사기도를 드린 것뿐입니다. 

이 감사기도는 예수님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식사 때 하던 감사기도입니다. 마치 우리가 밥만 나오면 자동적으로 고개가 숙여지고 감사기도 드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소박하고 일상적인 감사기도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까요?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우리의 감사기도와 달리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이유 아닐까요? 예수님이 한 이름 모를 아이의 도시락을 받아보니 안드레 말처럼 정말 초라한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말린 것뿐입니다. 양도 겨우 한 사람 먹을까 말까 할 정도로 적지만 메뉴도 정말 소박하다 못해 형편이 없습니다. 저 같으면 이런 형편없는 음식을 어디 나 먹으라고 가져오냐며 오히려 야단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소박한 음식에 한 아이의 정성과 감사의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 소박하기 그지없는 도시락이 그 아이의 전부였음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소박한 음식을 앞에 두고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 것입니다. 

물론 다들 배가 고팠으니 기도를 길게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만 그 간단한 기도 속에는 그 아이의 정성에 대한 감격과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가 가득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축사, 이 소박한 감사의 기도를 통해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 사건이 또한 일어난 것입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한 이름 모를 아이의 소박한 도시락이, 그 소박한 감사가 예수님의 축사, 소박한 감사기도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는 놀라운 은혜를 일으킨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 이름 모를 아이와 예수님과는 달리 똑같은 상황에서도 감사와는 거리가 먼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나타납니다.

첫째가 예수님을 따른 ‘큰 무리들’입니다. 2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구름처럼 따라다녔지만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듣고 나도 한 번 병을 고쳐보자 싶어 따라온 무리들이라는 말입니다.

또 한 부류는 예수님이 제자 가운데 빌립과 안드레입니다. 빌립은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무리들의 숫자를 척 보더니 곧바로 계산이 나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많이도 아니고)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부족할 것 같습니다.” 머릿속에 계산기가 든 것처럼 재빨리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의 계산법에 따르면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큰돈이 수중에 없기 때문에 이들을 먹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찌감치 포기하시라는 뜻이지요. 

9절에 보면 안드레는 이름 모를 아이가 가져온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드리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은 있지만 이것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토록 큰 기적을 일으킨 오병이어를 제 손으로 전달하면서도 그 역시 머릿속으로 어림짐작을 한 것입니다. “겨우 이거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겠어? 그냥 예수님이나 사람들 없는데 가서 조용히 혼자 드리라고 하지 뭐.” 나름대로 예수님을 생각한 행동이라고 자부심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토록 머리 좋고 계산 빠른 빌립이나 예수님을 생각한답시고 행동한 안드레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왜냐? 안 된다고 본 것입니다. 한 이름 모를 아이의 소박한 감사와 예수님의 소박한 감사가 그토록 엄청난 기적을 일으킨 것과는 반대로 무리들과 이 두 제자의 판단과 행동은 결코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기적을 부인하고 기적을 막아서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들처럼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자기 이익을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기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약삭빠른 손익계산과 두뇌회전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할 틈이 없습니다. 은혜가 역사하지 못하니 기적도 일어날 수 없는 법이지요. 반대로 한 아이와 예수님의 감사는 비록 너무도 순수하고 소박하고 투박하고 전혀 자기 손해나 이익을 계산하지 않지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촌스러워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고, 저렇게 살아서야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남을까 싶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기 때문에 사람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1918년, 미국 미네소타 주 보베이(Bovey)라는 작은 탄광촌에서 사진사로 일하고 있는 에릭 엔스트롬(Eric Enstrom)의 사무실에 한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세상사에 몹시 지쳐 보이는 그 노인은 보잘것없는 신발 흙털개를 팔러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이 소박한 빵과 스프를 앞에 두고 감사기도 하는 모습이 엔스트롬 씨의 가슴에 너무나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엔스트롬은 그 노인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노인은 세상적인 것들을 많이 갖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구나. 그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으니까.”

비록 그 노인은 가난하고 삶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그의 소박한 감사기도 속에서 그 노인이 세상 그 누구보다 부유한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노인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 흑백 사진을 보고 엔스트롬의 딸 로다 나이버그(Rhoda Nyberg)가 유화로 그리게 되는데 그것이 (그림을 보여주면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그림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 그림의 제목은 “The Grace”, 바로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많이 가지면 감사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는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성공하고 잘 나가면 감사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으면서 우리는 감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여러분, 감사는 결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더 큰 것을 받아야만 감사한다면, 너무도 특별하고 엄청난 것을 누릴 때만 감사한다면 우리에게는 영원히 기적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의 욕심 때문에, 우리의 약삭빠른 계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할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이름 모를 아이처럼, 예수님처럼, 그리고 이 그림에 나온 백발의 노인처럼 내 일상의 너무나 평범하고 작은 것들에 대해 감사할 줄 알 때, 그 소박한 감사를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를 나타내시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엄청난 역사도 일어나고 기적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왜 기적이 안 일어날까?” 궁금하셨던 분들, “진정 기적과 역사를 일으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궁금했던 분들은 오늘 답을 찾았습니다. 

지금 즉시 내가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작은 것들에 대해 감사부터 하십시오. 하나님께,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잊고 살았던 감사를 회복해 보십시오. 그 소박한 감사로부터 반드시 기적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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