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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던 사람 (마 27: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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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던 사람 (마 27:38~44)

      
오바마 후보가 미국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에 대하여 몇 십 년 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말한 꿈이 실현됐다고들 말합니다. 그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아마 20세기의 연설 중에 가장 뛰어난 연설을 꼽으라면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연설이고 위대한 꿈이었지만 그의 꿈은 미국인들을 위한 꿈입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꿈입니다. 우리에게 해당하는 꿈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꿈은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현실 속에서 잉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우리대로 꿈을 꾸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비전을 갖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들을 위한 잔치이지 우리의 잔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 대부분의 지도자들 또 위대한 인물의 한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위한 위대한 지도자이지 우리를 위한 지도자는 아닙니다. 마트마 간디는 인도를 위한 위대한 지도자이지 우리에게까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을 본받고 벤치마킹을 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우리를 위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능력, 인간의 약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멀리가지 못하고 오래가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모든 사람을 위한 지도자,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시고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시고 이스라엘 사람을 대상으로 가르치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만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또 유대인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한 지도자가 되고 모든 사람을 위한 스승이 되고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는 서양 종교가 아니고 또 외래종교가 아닙니다. 물론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고 우리의 고유 종교가 아닌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물리학이든 화학이든 천문학을 말할 때 그것을 서양학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외래학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또 외국의 제약회사가 사람을 고칠 수 있는 약을 개발할 때 그것을 외국의 약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학문은 누가 연구하든 어느 나라 사람이 연구하든 거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보편타당적인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을 독일 사람이 연구하든 일본 사람이 연구하든 한국 사람이 연구하든 결국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신약을 미국회사가 만들든 스위스 회사가 만들든 한국 회사가 만들든 그것은 결국 인간의 병을 똑같이 치유하게 되고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학이든 학문이든 여기에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보편타당적인 진리가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복음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이천년 전에 시작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천년 전뿐만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고 앞으로 이천년 후에도 여전히 효험이 있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유대인들을 위해서 가르치셨지만 그러나 그것은 국경과 나라와 언어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고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고 모든 사람이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접할 때 우리는 그것을 남자가 한 말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이건 유대인의 의견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이 천 년 전의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남자와 여자를 초월합니다. 남자에게도 주시는 말씀이고 여자에게도 주시는 말씀이에요. 국경과 민족을 초월합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도 해당되고 유대인에게도 해당되고 옛날 사람이든 오늘날 사람이든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성경말씀,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거기에서 어떤 시대의 특징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초월하는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이 시대보다도 앞서가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아직 인간이 다 소화하지 못하고 다 적용하지 못하고 앞으로 적용될 것을 기다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풀지 못한 편견, 또 차별, 또 무지 이런 것이 여전히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천 년 전 예수님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든가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든가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믿고 옳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삶 속에 우리 사회의 정치 현실 속에 우리가 다 적용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고 정치가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발달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부분들, 우리의 과제로 남아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천년 전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는 우리보다 앞서가신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아직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하지 못하고 100% 소화하지 못한 부분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문화나 시대나 또 국가나 이런 것을 초월하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진실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뮤지컬 ‘Jesus Christ Superstar’를 보면 Jesus Christ Superstar라는 주제곡이 있습니다. 가사를 보면 ‘나는 당신을 볼 때마다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이 계획을 세워서 일을 좀 더 잘 manage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당신은 그 먼 과거에 왔느냐? 당신은 왜 그 먼 변두리 땅에 왔느냐? 오늘날 왔더라면 당장 히트를 했을 텐데. 옛날 이스라엘에는 메스커뮤니케이션이 없지 않았느냐?’ 이것은 그 뮤지컬에서 가룟 유다가 부르는 곡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삐딱하게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부르는 곡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볼 때마다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이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고 조금만 더 계획을 잘 했더라면 더 성공하고 더 히트했을 텐데 왜 그 먼 과거에 왔는지, 그리고 왜 그 변두리 이스라엘 땅에 왔는지, 오늘날 왔더라면 당신은 당장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스 마케팅 전략을 갖지 않았고, 큰 야망도 품지 않았고, 삼년 반 동안 사역하시고 죄인으로 몰려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퍼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는 않았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예수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야심을 갖지 않았고 사람에 대해서 욕심을 갖지 않았고 인기를 사모하지 않았고 인기를 얻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이 세상의 영광에 대해서도 욕심을 갖지 않고 섬기는 삶을 살고 낮아지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매스커뮤니케이션이든 마케팅 전략보다 더 예수님이 높아졌고 알려졌고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낮아지는 자는 높아지고, 주면 얻고, 죽으면 살고, 또 버리면 얻는다는 원리가 진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기독교 복음 속에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리가 있다는 것은 아마 동의할 것입니다. 예컨대 황금률이라는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이 원리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옳은 말씀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고 또 섬기고 용서하라는 이러한 원리도 굳이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보편적인 진리라고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면이 기독교 신앙에는 있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세상의 빛, 세상의 구원자라고 전할 때는 기독교의 그런 보편적인 정신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바로 모든 사람의 구원자가 된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정신, 교훈을 전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을 전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닮고자 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는 것을 믿는 사람,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오시고 이스라엘 사람으로 오셨지만 그럼에도 어제나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고 또 모든 사람의 친구요 대언자요 제사장이요 죄인의 친구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42절을 보면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동안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이 한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장본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오늘날로 치면 인터넷 악플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악플은 사람들이 자기기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하여 던지는 식으로 지나가는 말로 하는 말입니다. 책임지지 않고 친절함이나 애정이 담기지 않는 냉정한 비판의 말을 악플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지는 순간에 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악플처럼 던지는 말이 ‘저는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런데 왜 그 말씀이 성경에 기록이 돼 있느냐? 거기에 진실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그 말은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켜보면서 내뱉은 말 속에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은 남은 구원하셨지만 자기는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이냐?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그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지불하신 대가가 바로 십자가에요. 공짜 점심이 없다는 말처럼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공짜가 없습니다. 누군가는 값을 지불해야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게 되면 다 지옥에 가야합니다. 다 영원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말이 맞는 것입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래서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고생은 예수님이 하시고 혜택은 우리가 입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생은 예수님이 하시고 혜택은 우리가 입는 것, 그게 바로 은혜라는 말입니다. 은혜-grace라는 말은 원래 gratia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그 말은 공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팁을 더 어려운 말로 gratuity 라고 하는데 그 말과 grace라는 말은 같은 어원에서 출발한 것이고 공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공짜이지 예수님에게는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으로 그 전액을 갚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말이 옳은 것입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여기에서 남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인데 잠재적으로 이것은 모든 사람을 포함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남이라는 말 속에 제한이 없이 차별이 없이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이 거기에 포함될 수 있어요. 모든 사람, 모든 사람에게는 구원받을만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나사로를 일으키실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사로야 일어나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했더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왔지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왜 ‘나사로야’라고 이름을 불렀겠느냐 그러지 않고 그냥 그 무덤가에서 나오너라 그러면 이 사람, 저 사람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모든 사람들이 저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도 나가겠습니다. 저도 나가야쓰겠거든요. 이런 식으로 할 테니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한 사람에게만 그것을 제안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때에는 제한하지 않고 무덤 앞에서 이 죄로 죽은 인류의 무덤과 같은 현실 앞에서 특정인을 지정하지 않고 그냥 ‘나오너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에요.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나오너라!’ 그 음성을 듣지 못하면 여전히 무덤에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영적으로 죽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성이 들리는 사람, 믿어지는 사람, 예수님이 믿어지는 사람, 예수님에게 마음이 끌리는 사람, 마음이 열리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주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했더니 죽었던 자가 일어나 걸어 나왔던 것처럼 우리는 몸은 살아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어있었어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죄의 종이었고 죄를 좋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상관이 없는 존재였는데 어느 때부터 우리를 부르는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옛날에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는데 목사가 되니까 얼굴에 철판 깔고 잘 부르든 못 부르든, 찬송가를 부르는데 잘 부르는 게 어디 있고 못 부르는 게 어디 있습니까. 할렐루야! 

가요를 부를 때는 잘 불러야 들어줄만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잘 부르고 못 부르고 가 중요하지 않아요. 부르는 게 중요하지요. 안 부르는 사람이 문제이지요. 부를 수만 있다면 잘 부르고 못 부르고는 이차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노래 잘 부르는 사람 다 들어보셨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얼마나 잘 부르는지 들어보자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주님의 찬양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십니다. 할렐루야!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도 그렇고 믿음도 그렇고 다 마찬가지에요. 섬김, 봉사, 전도, 하는 게 중요한 것이지 얼마나 잘하느냐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기도, 잘해야 되겠지만 못하면서도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전도, 못하면서도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믿음도 잘 못 믿더라도 믿도록 애쓰는 것이 안 믿는 것보다 낫습니다.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는 영생과 죽음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진리가 모든 문화와 모든 시대에 다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처럼 구원의 능력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효험이 있고 동일한 결과를 낳고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옵니다. 

어떻게 믿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처럼 극적으로 믿었을 수도 있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믿었을 수도 있고 아내에게 끌려서 억지로 교회로 나와서 믿었을 수도 있고 어떻게 믿었느냐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믿으면 그 효과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효험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주님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시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의가 되고 축복이 되고 예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족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족합니다. enough-모든 사람에게 충족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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