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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중에서 가장 큰 복 (엡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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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중에서 가장 큰 복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 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 처음 나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교회에 처음 오시면 모든 것이 생소합니다. 그렇지만 곧 안정될 것이고 잘 왔다는 생각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중심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내가 복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복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복을 받고 살아갈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 복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은 눈에 보이는 복을 말씀합니다. 자손의 복과 물질의 복과 형통의 복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많은 자손과 넓은 땅과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은 대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복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말씀합니다. 성결함의 복, 죄 사함의 복, 구원받음의 복,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복을 말씀합니다. 이 두 복은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더 소중한 복을 말씀합니다. 그 복은 “선택받음의 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언제 택하셨는가 하면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 우리를 예정하사 ..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중의 복입니다. 이 복을 성경은 신령한 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을 받아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복”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소중하다고 여기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겨 버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깊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를 몰랐을 때는 무지하기 때문에 편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판단과 오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도 했고 증오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깊이 알고 보니 비로소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의 일생을 그 예수를 전파하는데 오로지 투신했습니다. 모르면 편견과 오해와 그릇된 판단이 만들어 집니다. 

역사를 보면 편견의 역사가 많습니다. 그래서 핍박과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원군 시대 때에 1만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수히 참수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순전히 예수에 대한 오해와 편견 때문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6,25때, 일제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무수히 피를 흘렸습니다. 그것도 무지함 때문입니다. 예수를 몰랐기 때문에 잘못된 편견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무지함 때문에 일어난 사건 중에 가장 큰 실수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것도 몰랐기 때문에 저지른 우매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때로 무지가 가장 큰 죄일 수 있습니다. 좀 더 깊이 알게 되면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도 그 도를 지키고 수난을 감수하면서도 그 진리를 수호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제 인생 가운데 가장 큰 은혜를 말하라고 하면 저는 주저 없이 내가 예수를 만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알게 된 사건은 내 인생에서 최대의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어떤 분이 전도를 받고 천국과 영생과 심판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아찔했습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그래서 친구인 목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천국이 정말 있는가, 있고 말고, 지옥도 분명 있고, 그렇지, 심판은 아주 무서운 영원한 심판이겠구먼, 그렇지.” 그때 이 친구가 목사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야 이 나쁜 사람아, 그렇다면 나를 전도해야 할 것 아닌가, 자네만 천국가고 나는 지옥에 가란 말인가”하고 따져 물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알게 되면 눈을 뜨게 됩니다. 그 뜨인 눈으로 보게 됩니다. 느끼게 됩니다.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나는 저 십자가만 쳐다보면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나의 값이 얼마나 중요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까지 나를 구원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고백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생 예수를 증거하는 글을 썼습니다. 어느 날 노년의 아퀴나스는 성전의 십자가 상 아래에 엎드려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형상화된 모습으로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에 대해서 잘도 글을 썼구나,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그 말에 아퀴나스는 “나에게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나에게는 오직 당신뿐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를 길이 알고 보니까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깊이 고 살아가는 삶이 복된 삶인 것입니다. 


“택함 받음의 복” 

 예수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음에는 그 예수로부터 택하심을 받는 복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복입니다. “택함 받음”은 “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선택됨”을 뜻합니다. 이 택함 받음의 반대개념은 “버림받음”입니다. “탈락함”입니다. 이것이 또 가장 슬픈 일입니다.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은 분명 불행입니다. 직장에서 버림받는 일도 불행입니다. 친구들로부터 왕따 당하고 이웃으로부터 버림받는 일도 불행이고 비극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창세전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래서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령한 복”입니다. 저는 제 인생 전체 중에 무엇인가 당첨되고 심지를 뽑아 뽑힌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 중요한 행운을 한번 뽑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뽑힌 일입니다. 이 일만 생각하면 참으로 감동입니다. 영광입니다. 대박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만의 일이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모두 그렇게 뽑힌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 복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얼마나 이 세상에서 복된 사람들인가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톨레돗”이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톨레돗“이라는 용어는 ”계보“ 또는 ”족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주인공이 죽으면 그 뒤에 계보 즉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족보의 특징은 먼저 택함 받지 못한 비택자가 나타나고 다음에 택함 받은 택자가 나타납니다. 이 형식을 톨레돗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죽습니다. 그러면 곧 바로 그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족보를 보면 먼저 비택자인 이스마엘의 족보가 나오고 그 뒤에 택자인 이삭의 족보가 나옵니다. 또 이삭이 죽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족보가 나타나는데 먼저 비택자인 에서의 족보가 나오고 그 뒤에 택자인 야곱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 같은 형식을 “톨레돗”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비택자도 복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선인의 밭에도 악인의 밭에도 비를 골고루 내려 주십니다. 이 복은 일반적인 복입니다. 이 일반적인 복은 누구에게나 다 주어집니다. 그래서 비택자인 이스마엘도 에서도 복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택자들 보다 눈에 보이는 복을 더 받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양식을 주십니다. 이것이 창조의 일반적인 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물질적인 복이 다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기독교에서 물질과 영광과 성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기복종교화 된다고 우려들을 하는 것입니다. 본질을 자꾸만 저해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복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복을 너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으로만 지나치게 강조되면 안 됩니다. 물질의 복은 불교인도, 무속인도, 사기꾼도 다 받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더 많은 물질의 풍성한 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내용들과 경우들만을 진정한 복이라고 강조하여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복은 “선택받음의 복”입니다. 우리는 이 복에 대해서 이해를 잘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은 “부름 받아 택함을 받은 자됨의 복”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것도 깊은 의미를 알고 보면 누군가의 손을 통해서 인도를 받아 이곳에 나와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우연 같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의 손을 통해서 나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모두 부르셨습니다. 영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은혜는 참으로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택함 받음의 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성경에 보면 많은 위인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다윗, 요셉은 모두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혈통에서 마침내 예수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관심과 섭리가 흐릅니다. 그 복이 물질의 복이나 이생의 복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먼저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복은 당대에 나타나는 복이 아닙니다. 아주 먼 후대에 까지 주어지는 “언약의 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학자 에드워드 요나단목사는 근근이 그리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슐츠라는 사람은 대대로 술집을 경영하여 물질이 넉넉하고 풍부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우리는 오늘 현실만 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5대손을 조사했더니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요나단 목사의 5대손은 모두 896명이었습니다. 그 자손 중에 선교사가 116명, 교수가 86명, 총장이 3명, 문필가가 75명, 상하의원이 4명, 사업가가 73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대로 술집을 경영하여 풍부하게 살았던 슐츠의 5대손은 모두 1,062명이었는데 그 중에 전과자가 96명, 알코올 중독자가 58명, 창녀가 65명, 극빈자가 286명, 무학자가 460명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돈을 많이 벌어 당장 많은 물질적인 복을 받은 것이 복입니까. 오늘 물질이 많은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어령 씨는 신앙생활 시작한 것이 얼마 안 되는 분인데도 사탄도 물질적인 복을 줄 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업을 돌보시지 않고 물질적인 복을 안준다고 의기소침해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의 삶은 먼 내일을 내다보고 훗날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복을 알게 되고 오늘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알면 미래를 위해서 투자하게 되고 자손을 위해서 심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주일을 지키고 시간이 있어서 봉사 좀 한다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 한다고 생각한다면 안 됩니다. 신앙의 삶 이면에는 이 같은 신령한 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로 진정한 신앙인은 고난이나 죽음의 환경이 주어진다 해도 그 신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제 때에, 6,25때에 순교자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순교하는 자리에서도 이 은혜를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오늘 처음 신앙생활 하는 분들은 이 같은 복을 알기를 원합니다. 복은 보이는 복이 있고 보이지 않는 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오늘 보이는 현상 위주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오늘과 당장의 삶과 땅만 생각하고 현실만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저 위를 보지 못합니다. 저 위로부터 주어지는 숨겨져 있는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관심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저 위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의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위대한 복은 모두 저 위로부터 주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택함 받음의 복입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의 할 일“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4절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여 ..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 사람은 먹고 살아가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하느냐”,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복이 나의 가치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들은 부름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아주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피 흘리고 순교하는 것만 영광 돌리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크고 위대한 일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중심 있는 삶을 살아가고 소신 있는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고백적인 삶을 살면 됩니다. 

이를테면 식당에 가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식사를 앞에 놓고 머리 숙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것도 잘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주일날 성경책을 들고 교회를 향하여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그 자세는 만인 앞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자세이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직장에서 소신 있게 자신의 신앙의 삶을 고백하고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오늘 직장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고 숨어서 무소신 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살아가다가 어려운 갈림길을 만났을 때 신앙적 소신을 따르면 상당한 손해를 볼 경우 그 때에 과감하게 손해 볼지라도 신앙의 길을 선택하는 삶도 고백적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그 삶이 중심 있는 신앙인의 신앙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 영광을 찬양할 의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의 기쁨이고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예수를 믿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복을 받으려는 이유입니다. 내가 주안에서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이웃이 복을 받고 더 나아가 내 민족이 복을 받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만을 위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나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복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복입니다. 그리고 내가 주께로부터 부름을 받아 택함을 받은 자가 된 것이 복입니다. 내가 하늘로부터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창세전에 이미 나를 아시고 택함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감격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내용으로, 언어로, 직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고 삶의 이유이고 삶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 삶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삶이고 존귀함을 얻는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치는 삶이 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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