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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홍해에서 역사하신 하나님 (출 1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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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에서 역사하신 하나님 (출 14:10~21)


지난주는 한국사회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국민배우로 인기를 끌던 톱 탤런트가 목매어 자살한 것입니다.  모든 방송과 매스컴은 연일 이 사건을 사회적인 큰 이슈로 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자살해도 충격적인데, 인기연예인이, 그것도 톱 자리를 지키던 여배우의 죽음으로 적잖은 파장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모방 자살이 이어지고, 자살의 충동을 막기 위해 온 사회가 긴장하며 사태이후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지난 10년간 경제성장과 함께 자살률이 꾸준히 증가해  OECD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자살로 죽은 사람이 14307명이라고 밝혔습니다.  교통사고의 두 배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하루에 36명꼴로 죽었고, 한 시간에 1명이상 지금도 어디에선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사회가 늘어나는 자살과, 모방 자살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보통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심한 정신적 공항상태에서 오는 현대인의 무서운 질병중의 하나입니다.  우울증의 가장 큰 현상은 삶의 의욕이 없어지고, 목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아니 목적이 있어야 희망과 용기를 갖고 삽니다.  

그런데 우울증은 그런 의욕을 완전히 없게 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존재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생명의 존엄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자살을 가장 큰 죄라고 강조합니다.  자살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고, 나아가서 목적과 목표를 갖게 하는 진리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우리는 목표로 나아갑니다.  크고, 멀게는 천국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그 길로 지금도 나아갑니다.  작고 가깝게는 한해, 한 달, 아니 오늘 하루의 삶에 할 일이 있고, 목표가 있고, 방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릭 워렌 목사님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른 책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결국 목적이 삶을 이끌어간다고 역설했던 것입니다.  

내적성숙과 외적성장의 목표로 출발한 우리 교회가 이제 10월을 맞이하면서 입당의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은 마치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주님이 주시는 땅, 가나안땅, 약속의 땅을 목표로 나아간 길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곧 약속의 땅에 다다를 우리에게 그 길로 가는 길목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요?  저는 그것을 앞으로 한 달 동안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서 있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함께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홍해입니다.   당시 백성에게 홍해는 어떤 곳일까요?  약속의 땅으로 가는 우리에게 홍해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첫째는 문제에 직면한 곳입니다.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종살이하면서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다가 드디어 애급을 탈출합니다.  장정만 60만, 여자와 어린이와 노약자까지 합하면 200만이 넘는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이제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급을 탈출한 기쁨이 잠시 지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 홍해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홍해는 분명 이들에게 어려움이고, 난관이며, 문제였습니다.  당시 배가 있던 것도 아니고, 수영해서 건널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라 더욱 난감했습니다.  앞은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옆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가지도 못합니다.  지금 뒤에는 애급의 바로 왕이 온 군대를 이끌고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옆으로 빠질 수도 없고, 뒤로도 갈 수 없는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이것이 홍해 앞에서 백성들이 경험한 처음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홍해는 먼저 난관, 문제, 장벽, 어려움이 생각나는 곳입니다.  

이런 때 우리가 즐겨 쓰는 고사성어가 생각납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 입니다.  앞으로 가기도 어렵고 뒤로 가기도 어렵다는 뜻으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또 이럴 때 쓰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사면초과(四面楚歌)입니다.  사방에서 적군인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는 뜻으로서 사면이 모두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풍전등화(風前燈火)요, 거의 여유가 없는 위기일발(危機一髮)이요, 이제 뭔가 폭발할 것 같은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만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우리의 길에도 이 같은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 삶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지만, 문제가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한평생을 살면서 홍해와 같은 난관을 만나기도 하고, 여리고와 같은 장벽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험난한 산을 넘어야 하고, 깊은 계곡을 지나야 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거친 파도가 나를 덮칠 때가 있고, 칠흑 같은 어두움을 종종 만나기도 합니다.  앞이 캄캄하여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은 인생을 형통할 때와 곤고할 때가 병행하는 것으로 소개합니다.  인생은 햇빛만 나지 않습니다.  때론 비도 내리고, 바람도 붑니다.  반대로 매번 슬프거나 어려움만 있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것 또한 지나갑니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병행합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불신자나 신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주인이나 종이나, 어른이나 젊은이나 심지어는 아이들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생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여기에 적응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살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계속되는 전도서에서 이렇게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형통할 때는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 마음껏 그것을 누리고 행복하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곤고할 때는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먼저 그 현실을 믿음으로 수용하고, 받아드리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그 곤고함 속에서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이요, 이것이 지혜롭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형통과 곤고함이 언제나 병행하는 인생이라면, 기왕이면 여러분의 삶에는 형통한 일은 아주 풍성하기를 바라고, 곤고한 일은 겨자씨만큼만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혹이라도 문제를 만날 때 그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고 받아드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슬기롭고 지혜롭게 내가 가진 굳건한 믿음과 신앙으로 잘 극복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우리교회에도 홍해와 같은 문제와 난관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려울 때 더욱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밝을 때에 노래며 어둘 때에 기도와 위태할 때 도움을 주께 간구합니다’  이 믿음과 신앙으로 홍해와 같은 문제와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사람들의 반응이 있던 곳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그것을 보는 시각이 중요하고, 반응이 중요합니다.  반응에서부터 모든 일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강조합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목인 홍해에서 우선적으로 보여준 백성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집중적으로 강조합니다.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것이 그들이 홍해에서 보여준 태도요, 말이고, 행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합니다.  신세를 탓하고, 환경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애굽에서 고통 당할 때 기도할 때는 언제이고, 이젠 다시 돌아가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이럴 땐 이렇게 말하고, 저럴 때 저렇게 말하는 이들의 일관성 없는 모습에서 얄팍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두렵고, 떨리고, 어려우니까 하소연하듯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들의 불평과 원망은 여기에서 한번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광야 40년을 지나는 동안 매 순간 마다 자기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는 불평을 계속 쏟아냈다는 것입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고, 옷이 없다고 불평하고, 매일 같은 음식만 먹는다고 불평하고, 가나안은 언제 가느냐고 불평하면서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들의 부정적인 마음이 바뀌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아예 고정관념으로 박혀서 깨지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불평의 결과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평의 결과입니다.  어쩌다 한두 번은 할 수도 있겠지만, 평생 마음에 부정적인 것으로 꽉 차서 나온 불평이기에 좀처럼 바뀌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홍해 앞에서 그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부정적인 사람입니까, 아니면 긍정적인 사람입니까?   나는 불평이 많습니까, 아니면 감사가 많습니까?   지난 한 주간 동안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교회를 섬기는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불평이 많습니까, 감사가 많습니까?  불평만 하지 않으면 무조건 감사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감사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불평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감사하고 살고 있습니까?  

조엘 오스틴 목사가 쓴 ‘긍정의 힘’이란 책이 있습니다.  신자는 물론이고, 불신자에게까지도 큰 영향을 주는 책입니다.  그는 우리 삶에 ‘긍정’이란 단어가 얼마나 큰 ‘힘’이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힘은 사람의 일생을 바꾸는 능력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생각부터, 태도와 자세부터 바꾸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중요하고 시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보느냐는 시각에서 많이 달라집니다.  한 잔의 물 중 에 반을 마신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반밖에 남지 않았네’라고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직도 반이나 남았네’라고 말합니다.  같은 상황인데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생각도 달라집니다.  한 사람은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다른 사람은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앞으로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떤 구두회사에서 2명의 직원을 아프리카에 현장견학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보고서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한사람은 아프리카에는 구두를 신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투자하면 실패한다는 보고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들은 한 사람도 구두를 신지 않고 있기에 이제부터 투자하면 대박을 터트린다고 보고했습니다.  같은 사건을 보는데 이처럼 시각의 차이가 납니다.  어떻게 보느냐,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불평은 불평을 낫습니다.  부정은 부정으로 끝납니다.  감사는 행복을 만들고, 긍정은 성공을 이끌어냅니다.  불평이 습관이나 고정관념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긍정으로 보는 습관과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나의 태도가 그래야 합니다.  좋은 것부터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남을 보는 것도 좋은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든 원망과 불평을 버리고, 늘 감사와 긍정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홍해는 분명 문제와 난관을 만난 곳이고,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보은 곳이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신 곳입니다.  그의 능력과 힘과 권능이 크게 임한 곳입니다.  우리는 홍해를 보면서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3절부터 마지막까지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모세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을 향하여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21절입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입니다.  진퇴양난의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갈라진 땅으로 사람들은 홍해를 지나갔고,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 앞에 입이 벌어지고, 환호와 탄성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인간의 개입하는 곳에는 불평과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하는 일에는 늘 실패와 실망을 줍니다.  인간이 무심코 뱉는 말에는 상처와 아픔을 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개입하는 그 어떤 곳에도 잘되고, 지속되고, 성공하고, 평안한 곳이 있나 보십시오.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곳에는 다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 세우기도 하시고, 세운 것을 허물기도 하시는 하나님, 주기도 하시고 빼앗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8-9)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5)

성도여러분, 낙망하고 실망한 현장에, 실패하고 두려운 현장에, 막막하고 답답한 현장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느끼는 현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은 우리 삶에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안심시키고, 때론 깜짝 놀라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기대감과 소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도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걱정하고 염려하고,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해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한순간에 역전시키고 모든 것을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이 믿음과 신앙으로 이제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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