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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하는 사람들 (딤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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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사람들 (딤후 3:1~5)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

여러분 가운데 운전을 하는 분들은 저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줄 압니다만 운전을 하다 보면 하루에도 얼마나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깜짝 깜짝 놀라고, 때로는 극도로 분노하고, 때로는 흐뭇해지기도 합니다. 하루에도 십년감수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 때가 여러 번이다 보니 너무 화가 나고 분해서 목사고 뭐고 없이 소리라도 꽥 한 번 지르고 욕이라고 해주고 싶을 때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때로는 “왜 운전을 저 모양으로 하나” 남들을 한심하게 여기다가도, 때로는 나도 눈 딱 감고 위반 한 번 하자는 시험에 들 때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운전은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로부터 시작해서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까지 참으로 기도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운전을 잘하려면 상당히 성화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얼마 전 운전을 하면서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교회를 나와서 이동에 있는 집에 가려면 철도를 두 개 지나 성모병원 쪽으로 좌회전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좌회전을 하려는 차들이 꽤 길게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차가 어물쩍 옆 차선으로 오더니 제 앞에서 끼어들겠다고 차를 비스듬하게 세우고 좌회전 깜빡이를 넣습니다. 슬쩍 보니 어떤 아주머니가 운전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 제 마음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합니다. 남들은 다 서서 기다리는데 얌체 같이 끼어드나 싶어 절대 양보하지 말아야지 싶다가도 뭔가 급한 일이 있나보다 싶어 양보를 해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참을(사실은 아주 잠깐의 짧은 시간이지만) 고민하다가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 양보해 주자. 혹시 다른 교회 성도일 수도 있지 않나.” 

저 나름대로는 아주 큰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뒷 차들이 빵빵거리는 그 환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양보해 준 순간 저는 정말 깊이 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왜요? 손을 들어 고맙다는 표시 한 번 안 하고 얌체처럼 쏙 끼어들어 당연하다는 듯이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가슴 깊이 후회하면서 “내가 다시는 양보하나 봐라” 하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저만 이런 경험을 했나요? 여러분도 많이 경험하시지요?

저는 지금 운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모습이 오늘의 세태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손 한 번 들어 고맙다고 표현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나요? 도대체 그 여자 분은 왜 안 했을까요? 끼어주는 것이 당연하다 싶었을까요? 아니면 운전이 너무 미숙하다보니 당황해서 잊었을까요? 아니면 귀찮아서 안 들었을까요? 너무도 작은 일이지만 오늘 이 세상이 정말 감사를 잃어버린 세상임을 다시 한 번 보여줍니다.

다음 주일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추수감사주일이지만 저는 이번 추수감사주일을 즈음하여 감사에 대해 묵상하다가 오늘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정말 감사를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이 사회가 전반적으로 감사에 무감각하고 모두가 감사를 잊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크게 세 가지 대상에 대한 감사를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에 대한 감사를 잃었습니다.

첫 번째로 오늘날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감사를 잃고 살아갑니다.

앞서 제가 운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요즈음 세상은 점점 다른 사람에 대한 감사를 잊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감사가 뭐 그리 어려운가요? 말도 필요 없습니다. 손만 한 번 잠깐 들고 “그렇게도 양보하기 어려우신데 참 고맙습니다” 하고 표현하면 양보한 사람도 절로 흐뭇해져서 “내가 참 양보하길 잘 했다. 다음에 또 해야지.” 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다음에 또 양보하게 되고, 또 양보 받은 사람도 나중에 그런 상황이 되면 자신도 양보하고, 바로 양보가 양보를 낳는 양보의 순환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쉬운 것 하나 못 해서 나로 하여금 “내가 다시는 양보하나 봐라” 하는 마음이 들게 하고 이 세상에 양보하는 사람은 바보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악순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다른 사람에 대한 작은 감사의 마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자리를 양보해 준 젊은이에게 어르신이 “고맙네” 한 마디 하고, 이웃의 작은 친절에 대해 “감사합니다”라고 표현하고, 직장에서 헤어지면서 동료들에게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표현하고, 이렇게 크고 작은 일에 대해 감사하며 산다면 이 작은 자세로부터 세상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막 나간다, 사람들이 막 돼먹었다며 한탄하기 전에 과연 그런 문제가 이런 작은 자세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나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를 도와준 분들이 있습니다. 나 혼자 주먹 불끈 쥐고 순전히 내 힘으로 자수성가 한 것처럼 생각되십니까? 아니요. 알게 모르게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분들의 크고 작은 도움으로 살아왔고 지금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그분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 분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게 안 보이게 도움을 준 분들에게 얼마나 감사를 표현하고 살아왔습니까?

특히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현할 줄 모릅니다. 남편과 아내, 자녀 등 가까운 사람일수록 감사표현이 더 인색합니다. 요즈음 월급봉투가 사라지고 월급이 다 계좌로 들어간 바람에 남편들이 영 위신이 안 선다는 소리를 합니다. 실제로 남편이 한 달에 딱 한 번이라도 아내 앞에 월급봉투를 내놓고, 아무리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도 내놓고 나면 그래도 “여보,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소리라도 한 번 듣고 살았는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내 여러분, 그것 못합니까? 남편이니 가장이니 돈 벌어오는 것 당연한 것 아니냐? 뭐 많이나 벌어오냐? 그까짓 것 가지고 무슨 유세냐? 하지 말고 정말 먹고 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 직정에서 더럽고 치사한 꼴 다 보면서까지 가장노릇 해보려고 한 달 동안 몸부림 친 남편에게 한 달에 한 번도 감사하다고, 수고했다고 소리 못 한다면 그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또 남편 여러분, 물론 저도 잘 못하지만 아내가 가사일로 힘들어 할 때면 한 번이라도 감사하다고 해 본적이 있으신가요? 그렇게 빌빌해서 되겠냐고, 나는 밖에 나가서 뼈 빠지게 일하는데 당신은 집안에서 뭐 하는 일이 있어서 엄살이냐고 한 적은 없나요? 여자니까, 부인이니까 당연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정말 수고했습니다.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표현이 없으니 가정 안에 진정한 신뢰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둘째, 윗사람에 대한 감사를 잃고 살아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윗사람에 대한 감사를 잃고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말세, 즉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 때 일어날 현상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총 열여덟 개의 현상이 나옵니다. 이 모든 현상들이 오늘날 그대로 우리 사회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져 갑니다. 그래서 요즈음을 말세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열 여덟 가지 가운데 2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나온 부모를 거역한다는 말은 곧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말세에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푼 부모에게도 감사치 아니하며 그래서 부모를 거역하게 됩니다.

얼마 전 저희 아이가 와서 MP3를 사달랍니다. 자기가 쓰던 MP3를 잃어버렸다나요? 그래서 새것을 사달라는 겁니다. 자기 돈을 좀 보탤 테니 아빠 돈을 보태 제법 비싼 것을 사달랍니다. 저는 아이에게 한바탕 잔소리와 훈계를 늘어놓았습니다만. 

“네가 아빠에게 보태 달라고 하는 액수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아빠가 돈 많이 쌓아놓고 네가 사달란다고 수십 만 원씩 척척 내놓을 만한 그런 부자도 아니다. 너 그렇게 돈을 우습게 알면 안 돼,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야... 기타 등등” 

여러분이나 저나 비슷하지요? 그런데 그 때 저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무엇을 사달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저도 어릴 때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감사함이 없습니다. 그동안 부모가 해준 것에 대한 감사도 없고, 부모가 결코 쉽지 않은 살림에도 베풀어준 모든 것에 대한 감사도 없습니다. 물론 마음속으로야 감사한 마음도 있겠지요. 

그런데 표현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니까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부모니까 사주어야 마땅한 일 아니냐 하는 그 자세가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 얘기 들어보면 요즈음 자녀들이 대부분 비슷한 모양입니다. 부모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 하는 것을 못 본다고,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고 답답해하는 부모가 참 많습니다. 저희가 자랄 때는 그래도 먹고 살기가 좀 힘들어서 그랬는지 돈 귀한 줄도 알고, 물건 귀한 줄도 알고, 형제는 많고, 그래서 뭐 사달라는 말도 쉽게 못하고, 갖고는 싶고 그래서 속으로만 끙끙대던 시절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요즈음 아이들은 너무 풍족해져서 그런지, 부모가 뭐든지 쉽게 사줘서 그런지 너무 쉽게 생각하고 감사도 없다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이지요.

부모뿐 아닙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윗분들에 대한 감사를 잊고 살았습니다. 나를 키워주고 세워주고 자라게 한 분들에게 대한 감사의 표현이 너무 없었습니다. 어떤 분들이 계실까요? 앞서 말씀드린 부모뿐 아니라 나를 가르쳐주고 세워주신 스승들도 있습니다. 학교의 선생님들과 교회에서 나를 가르쳐준 영적 스승들입니다. 결코 그 분들은 감사하가는 말 듣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감사가 너무 없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목회자라서 왜 감사표현이 없냐고 여러분을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영적인 스승이요 아비입니다. 아니, 저도 목회를 해보니 정말 아비의 마음 바로 그것입니다. 양을 키우는 목자의 심정에다가 자식을 키우며 안절부절 하는 아비의 심정입니다. 그것을 알아주고 감사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꼭 맛있는 것 사주고 좋은 선물 사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고마운 마음을 품고 말로도 표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더 큰 사랑과 은혜가 일어나게 됩니다.

감사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당연시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부모니까, 선생이니까, 목회자니까 그렇게 베푸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 부모는 자녀에게 투자하는 것이 당연하고, 선생은 학생 잘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고, 목회자는 열심히 목회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냐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일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일도 당연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부모도 스승도 목회자도 사랑 아니면 그 일 안 합니다. 사랑에 대한 마땅한 표현은 감사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부모를 사랑한들, 제자가 스승을 아무리 공경한들, 성도가 목회자나 교회의 지도자들을 아무리 인정한들 어찌 그분들의 마음을 다 헤아리고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갚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감사 하나면 그들은 족합니다. 

아무리 나를 위험하게 한 운전자도 미안하다고 손만 한 번 들어주면 내 마음 다 풀리는 것처럼, 아무리 부모가 자식 위해 뼈가 빠지게 일하고 가르치고 키워도 “엄마 아빠 고맙습니다” 한 마디에 부모들은 다 녹습니다. 내가 언제 고생하고 수고했냐는 듯 말입니다. 스승도 목회자도 마찬가지요 우리를 위해 그토록 수고하고 희생하고 사랑을 베푼 윗사람들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왜 그것을 못합니까?


셋째,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세 번째로 가장 심각한 현상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하나님이 내게 이미 베풀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나를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단 일분일초도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과 감사입니다. 그런데 그런 감사가 너무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를 항복시키고 홍해를 갈라 구원해주셨음에도 감사는커녕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만 늘어놓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광야에 나가니 먹을 것이 없다고 투정입니다. 그래서 만나를 주었습니다. 왜 만날 만나만 먹냐? 고기 생각난다고 투덜대서 메추라기를 주었습니다. 목말라 죽겠다고 해서 반석을 쳐서 물을 주었습니다. 어두워 죽겠다고, 밤에 추워 죽겠다고, 낮엔 더워 죽겠다고 불평해서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으로 지켜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불평입니다. 입만 열면 모세 원망, 하나님 원망만 늘어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고 우리에게 더 좋은 것 줄 수 있는 신을 찾다가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절합니다. 그러다가 참다 참다 못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십니다. 싹 멸망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것이 남들 이야기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로마서 1장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참으로 영적으로 배은망덕의 세상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온 요술램프 속의 요정 지니처럼, 또는 우리나라 전설 속의 산신령처럼 나를 위해 나타나시고,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내 필요만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고 필요한 신으로, 우상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기도도 감사 없이 무조건 간구만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버지이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성도들이 마치 요즈음 버릇없다고 한탄하는 우리의 자녀들 모습과 같지 않겠습니까? 우리 아이들만 문제 아니라, 남만 문제라고 할 것이 아니라 정작 우리 자신이 문제 아닙니까?


감사의 능력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을 쓴 사도 바울은 1절부터 4절까지 말세에 일어날 열여덟 가지 현상을 언급한 후 5절에서 결론을 맺으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말세에 일어날 이 열여덟 가지 현상이 불신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일까요? 아닙니다. 이 열여덟 가지 현상이 이단이나 사이비 같은 문제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일까요?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멀쩡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매우 경건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겉으로 볼 때는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5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라고요. 멀쩡하게 교회 잘 다니고 겉으로 볼 때는 예수 잘 믿는 신실한 성도로 보일지 모르나 실은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이 열여덟 가지 현상 중에 감사하지 않는 자세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감사할 줄 모르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경건의 겉모양은 그럴듯해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감사의 능력이 엄청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가지면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상급이 그만큼 큽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감사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감사하면 어떤 능력이 일어납니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감사할 줄 아는 자녀에게 부모는 뭐라도 더 주려고 합니다. 똑같이 베풀어 줘도 평생 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보다 감사를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자녀에게는 하나라도 더 가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똑같이 은혜 베풀어 주어도 평생 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보다 감사를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자녀, 그런 성도를 기뻐하셔서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게 마련입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능력을 일으키는 자세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더 감사할 일을 얻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의 신앙을 소유하기 바랍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내 감사지수를 점검해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주 능력 있고 뭐든지 잘해내는 잘난 자녀보다 좀 못나고 부족하더라도 감사할 줄 아는 자녀를 더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더 좋은 것들을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도 이 감사신앙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 앞에 더욱 더 감사할 제목들을 받아 누리며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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