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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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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7)

 
오늘은 팔복 가운데 다섯 번째인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을 복”에 관해서 살펴봅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각박한 세상에서 아름답고 따뜻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비결을 일러줍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걸음마를 배울 적부터 세상을 하직하기까지 생존경쟁이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으면서 삽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니 그야말로 정글의 법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힘세고 능력 있는 자들이 약하고 무능한 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이 모든 권리와 재화를 독점하면서도 양심에 가책은커녕 오히려 당연시합니다. 그러나 이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모든 양식과 재화의 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양식을 주시는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니 사람 뿐 아니라 공중의 새들과 숲의 짐승들과 물속의 물고기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십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들만이 욕심을 부리고 생존경쟁이라는 이름 아래서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의 몫을 빼앗습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찾아온 이주노동자들의 수가 백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인구 50명 당 한 사람이 이주노동자인 셈입니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필요해서 데려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비인간적인 대우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상해를 입어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가 하면, 몇 개월씩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사람들의 마음에 긍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톱 여자 탤런트가 자살을 해서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성공도 했고 돈도 많이 벌었으나, 가정 문제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고독했습니다. 그리하여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악성 댓글이 발단이 되어 자살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왜 사람들은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댓글을 올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음에 긍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경제적으로 일류 국가가 되는 것보다 더 시급히 해야 할 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되어서 따뜻한 인정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긍휼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우리말 성경에 ‘긍휼’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엘레몬’은 ‘자비’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실재로 영어 성경에는 ‘자비로운’ 이라는 의미를 가진 ‘merciful’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이 자비는 단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동정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서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와 비슷합니다. 

오늘날 인간관계에서 생겨나는 각종 오해와 반목은 한번만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가하면, 긍휼히 여기는 것은 어려움을 만난 사람을 마음으로만 동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연민을 느끼는 것 뿐 아니라 우리가 의지를 발동해서 실제로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마더 테레사에 관한 책에서 이런 일화를 읽어보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여덟 자녀를 둔 한 힌두교인 가정에서 며칠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다는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들에겐 먹을 게 전혀 없었습니다. 

나는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쌀을 가지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몹시 허기져 보였고 아이들의 눈은 툭 불거져 나와 있더군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쌀을 건네자 아이들의 어머니는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후에 그녀가 돌아오자 나는 어디에 갔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들 역시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이란 식구 수가 같은 옆집의 이슬람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쌀을 나눌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얼마 되지 않지만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의 행복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날 저녁에는 쌀을 더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음날 조금 더 가지고 갔습니다.》 

이 일화에 나오는 여인은 같은 처지에 있는 이웃을 동정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자기 몫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긍휼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아봅시다.

먼저, 알아둘 점은 긍휼은 하나님의 계명의 기초와 같다는 것입니다. 율법서인 모세 오경을 보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것을 여러 곳에서 명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1절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여기 나오는 이방 나그네에 해당합니다. 탈북자들은 고국을 찾아왔지만 아직 이방 나그네 취급을 당하는 실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방 나그네들을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희도 애굽에서 힘들게 나그네 생활을 했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내가 고생을 해 보았으니까 고생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알고 긍휼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 고생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면 안 됩니다. 

그리고 22절로 24절에 보면, 과부와 고아에 대한 배려를 명하셨습니다. “22)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24)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과부와 고아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여자가 혼자 힘으로 자녀들을 먹이고 가르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은 가정불화나 이혼 등으로 부모가 없이 할머니나 할아버지 손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또는 가장 노릇을 하는 아이들이 1600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부와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고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68편 5절에 보니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2장 25절 이하에 보면, 가난한 이웃을 긍휼히 여길 것을 명하셨습니다.

“25)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26)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27)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성경은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아내는 고리대금업을 금합니다. 특히,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셨고, 이방인들에게는 이자를 받되 적당한 이율로 받도록 명하셨습니다. 고대에는 겉옷을 잘 때 이불처럼 덮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의 겉옷을 전당잡거든 해 지기 전에 그 옷을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더라도 밤에는 옷을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이웃을 긍휼히 여기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같은 하나님의 계명을 알면서도 행치 않는다면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기 때문에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긍휼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어떤 임금이 있었는데 하루는 자기 종들을 불러 결산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때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끌려 왔습니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임금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겠습니다.” 하고 애걸했습니다. 임금이 보니 너무 가엾어서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 많은 빚을 탕감 받았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아마도 임금 앞에 엎드려 백배사례하고 날아갈 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이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그가 탕감 받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푼돈과 같은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종은 그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동료가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하였으니 듣지 않고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습니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분개하여 임금에게 가서 낱낱이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그 종을 불러들였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그 종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끝에 예수님께서는 이르시기를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종은 다름 아닌 저와 성도님들을 말하고, 백 데나리온 빚진 종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져서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원 받는데 우리의 공로는 전혀 소용이 없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 4절 이하에 보니 “4)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을 주신 것은 자기의 공로로 구원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은바 자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는 임금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종에게 한 말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마땅치 아니하냐?“ 성도들이 긍휼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한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14)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을 예사롭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 받고 싶거든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용서해 주어야 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싶거든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도입니다. 

이 설교의 서론 부분에서 말씀한 대로, 오늘날 우리사회의 곳곳에서 일어나는 불화와 반목의 원인은 대부분 서로에 대한 배려가 없거나 부족한 데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긍휼이 없고 역지사지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형제 사이에 불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부족한 것이 원인입니다. 

내 속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혹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실수를 하고 무례하게 대할 때라도 급하게 화를 내거나 이쪽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대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저 사람에게 그럴만한 무슨 사정이 있을거야’ 라고 너그럽게 이해할 것입니다. 혹 상대방이 나에게 무슨 오해를 하고 있더라도 잠잠히 참으면서 오해가 풀리기를 기다려 줍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같이 처신하기만 한다면 사람들 간에 갈등을 상당히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웬만한 실수와 잘못은 너그럽게 넘길 수 있게 됩니다.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 원하시거든 서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잘잘못을 탓하기 전에, ‘저 사람이 나를 만나서 마음고생을 하는 것이 불쌍하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어서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해 주려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에베소서 4장 31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31)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알면 다툼과 분쟁이 생기지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사람들을 대한다면 갈등이 저절로 해결되고 화목한 관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긍휼을 늘 잊지 말고 되새겨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노라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외식하는 자들인 데도 원인이 있지만, 거기에 못지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는 자비와 긍휼이 없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 못한 사람들, 세리나 하층민들을 보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많은 새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으셔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바리새인들이 이를 보고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긍휼의 마음을 갖고 계셨지만, 바리세인들에게서는 긍휼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긍휼을 행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더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 받은 성도답게 긍휼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그 자신도 긍휼이 여김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자연계 뿐 아니라 사람들 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내가 상대방의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넘기면 언젠가 내가 실수할 때 상대방도 나의 실수를 눈감아 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긍휼을 베푸는 것은 나를 위해 긍휼을 저축해 두는 것과 같습니다. 화를 낼만한 입장이 되었을 때 화를 내는 대신 온화한 태도를 나타내면 상대방도 나에게 그런 식으로 갚아 줄 것입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이 있는데 맞는 말입니다. 먼저 이편에서 선하게 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속담을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식으로 바꾸어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를 모나게 하고 불화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고 맙니다.

일제시대 때 목포에 윤치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기독교의 전도사로서 공생원을 설립해서 부랑아, 거지,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거지대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6.25 사변이 일어나서 인민군들이 목포에 들이닥쳐서 인민재판을 시행했습니다. 윤치호 선생도 이 때 반동으로 낙인찍혀 인민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윤치호 선생의 선행을 알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변호한 덕에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평소에 긍휼을 베풀었더니 그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그 자신도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서 2장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때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의 기쁨과 행복은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만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형제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우리 심령 속에서 사죄의 기쁨과 행복이 사라지고 맙니다.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으나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회복하기까지는 구원의 기쁨과 행복이 유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긍휼을 실천하면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는 경제 위주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경제를 최우선시 하는 사회는 살벌한 경쟁이 필연적입니다. 사람들은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강박관념으로 인해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자기만 생각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공자는 경쟁에서 이기는 자가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경제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경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성공만 추구하느라 영혼을 황폐하게 방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인 성공도 성경적인 방법으로 달성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생존경쟁의 방법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자비의 마음으로 경제활동을 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으로 진정한 동료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들도 긍휼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할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서로서로 긍휼히 여기십시오. 그리할 때 가족 간에 의견차를 초월해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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