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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 일꾼, 교회 일꾼 (골 1: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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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일꾼, 교회 일꾼 (골 1:15~29)

 
'일꾼'이란 원래는 듣기에 그리 좋은 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옛날 표현을 빌자면 '남의 집 머슴살이나 하는 종'과 비슷한 것이니 그것이 그리 명예로운 호칭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꾼'이란 단어가 기독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새로운 어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 다 좋은 의미에서만 쓰이게 되었습니다.
목사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매우 자연스럽고 또 영광스럽게 여기며 사용합니다.
  
또한 어떤 평신도를 칭찬할 때에도 우리는 "그 교인은 정말 좋은 일꾼이야."라는 말을 흔히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들을 때에는 어쩌면 상대방을 모욕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 말을, 우리 기독신자들은 오히려 아주 좋은 뜻에서 늘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일꾼이란 명칭을 자랑스럽게 썼던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1장 7절에 보면 그는 에바브라라는 동역자를 칭찬하면서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라고 했으며, 본문 말씀에서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도 "복음의 일꾼"이며 또한 "교회의 일꾼"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냥 '일꾼'이라고만 하지 않고 이처럼 '복음'과 '교회'라는 단어를 그 앞에 수식어로 붙여서 쓰고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일꾼 됨에 대하여 얼마나 정확하게 깨닫고 또한 충성스럽게 섬겼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즉 이 두 표현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일꾼이라고 할 때, 그 일꾼의 주인이 누구이며 그 일꾼의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사도 바울의 간증을 나누어 보면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복음의 참된 일꾼, 교회의 신실한 일꾼이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복음의 일꾼'이라 함은 그 '일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바로 깨닫고 순종하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복음의 일꾼이라는 말을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우선 본문 23절을 먼저 보면 "23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일꾼)이 되었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15절에서 22절까지에서 그 어떤 '복음'을 언급한 뒤에 이 23절에서 자기 자신이 그와 같은 "복음의 일꾼"이라고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복음이란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것이었습니까?
바로 앞의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도 바울이 '내가 복음의 일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나는 복음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는 본문에서 크게 둘로 나뉘어 있는데, 그 첫째가 15절로부터 18절에 기록된 말씀으로서 "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묘사되며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요약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들 중에 단연 최고요 첫째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뭐니 뭐니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 그 자신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16절과 17절에서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라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신 까닭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공히 만물보다 "먼저" 계시는 주권자이시라고 했습니다.
  
18절에서는 이 지상에 있는 것들 중에 가장 거룩한 존재인 "교회의 머리"요 "근본"이시며,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부활에 있어서도 최초의 경험자이심을 강조했습니다.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포함된 모든 존재 세계를 두고 말할 때에도 첫째이시고, 이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를 두고 볼 때도 역시 첫째이시고, 천하보다 귀중한 사람의 생명을 두고 말할 때에도 필적할 상대가 없는 첫째이시니, 그야말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첫째이시며 유일한 최고이시며 단연 "으뜸"이시라고 사도 바울은 구구절절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 어느 모로 보나 주인으로 모실 수 있는 사람 중 최고 중에 최고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일꾼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자부심이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일꾼의 신분은 그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자동적으로 결정됩니다.
똑같이 요리사라는 명칭을 달고 있어도 청와대에 들어가서 대통령에게 칼국수를 만들어 주는 사람은 그냥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국수 파는 사람보다는 더 유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사라는 직함은 다 같아도 그 대사가 어느 나라 대통령으로부터 파견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그 대접받는 것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 모실 수 있는 최고의 주인,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모시게 되는 엄청난 특권입니다.
  
또한 바로 그 때문에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모시고 있는 주인에 대하여 또한 둘째로 설명하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각 사람의 인생에 제일 좋은 것을 공급해 주시는 가장 풍성한 분이시라고 본문 19절부터 22절에 "19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부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라고 이 문단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필요한 것들을 베풀어 주시는 가장 풍성하고도 유일한 공급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충만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 그 무엇보다도 대표적으로 발휘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과 화평을 이루는" 구속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 화목은 "전에 악한 행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죄인들을 중생케 하시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남은 인생에 계속적으로 작용하여 끝내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성도로 세워 주시는 순간에까지 이르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모실 수 있는 최고의 주인이 되시는데, 거기에다 또 이처럼 그 종들에게 제일 좋은 것으로 충만히 채워 주시는 분이니 더 이상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정말 좋게 대해 준 사람에게서 어떻게 등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도 어떤 다른 사람에게 어떤 큰 신세를 지게 되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사람의 얼굴만큼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괄시하지 못한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베푸신 그 충만하신 은혜를 정말 깨닫는 자라면 그 남은 평생에 그 분의 일꾼이 되어 섬긴다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과 세상과 사람들 위에 가장 뛰어나신 최고의 존재이실 뿐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가장 좋은 것 즉 십자가 구속과 성화의 생애와 영생 구원에 이르는 이 풍성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주인이셨습니다.
즉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볼 때 가장 자랑스러운 주인이었고, 또 동시에 개인적으로 볼 때에도 도무지 그 은혜를 잊을 길 없는 가장 고마운 주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일꾼이 된다는 것은 명예로운 직분인 동시에 또한 당연한 도리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위대하시고 또한 자비로우신 주인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만 확실하면 절로 충성되고 진실한 일꾼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시간도 돈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아예 계산도 하지 않고서 일단 그 일부터 하고 봅니다.
죽마고우 같은 친구가 부탁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싫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런 친구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멀리 찾아가기까지 하면서 기꺼이 도와줍니다.
  
사모하는 연인이 생기면 어느 만화에서 나오는 유명한 대사처럼 "난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라고, 그 연인을 위한 심부름꾼이 되기를 마다하지 아니하고, 아니 오히려 노예가 되더라도 행복하게 느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런 사람보다 못한 분이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자식보다, 우리 친구보다, 우리 연인보다 못한 사람이어서, 우리가 그 분을 위해 무언가 좀 힘써야 할 일을 두고서도 그처럼 귀찮아하고 꾸물거리고 어찌하든지 자기는 빠지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까?
  
진짜 기독신자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복음의 일꾼이요 그 복음의 주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신실한 '복음의 일꾼'답게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 앞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주인으로 모시는 일꾼, 또한 그 주인께서 베풀어 주신 온갖 과분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랑과 넘치는 은혜의 빚을 늘 감사하면서 섬기는 일꾼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의 일꾼'이라 함은 그 '일꾼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충성하는 자입니다. 

일꾼은 먼저 주인을 바로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그 주인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마땅한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이번에는 "교회의 일꾼"이라고 25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일꾼'이라면 또한 절로 '교회의 일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교회의 일꾼 되는 것만이 지금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라고 본문 24절에 "24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위하여 당신이 하셔야 할 모든 사역을 이 땅에서 다 마치셨습니다.
하지만 그 주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몫도 남겨 놓고 가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즉 각자의 몫에 태인 십자가의 사명을 당신의 일꾼 된 각 성도에게 남겨 놓고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도 그처럼 교회와 성도를 섬기기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면서" 그 남겨 주신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에게 남겨 주신 사명을 수행하고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그 주님의 몸 되신 교회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제아무리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하니 어쩌니 해도, 그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한 수고를 자신의 육체에 채우지 않으면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꾼이 된다고 할 때에는 꼭 섬겨야 할 첫째 대상이며 유일의 대상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바로 이 교회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서 일꾼으로서의 점수를 채점을 받게 될 숙제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께서 재림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를 얼마나 잘했는지를 가지고가 아니라, 제가 무슨 학위를 가지고 어느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는가를 가지고가 아니라, 바로 이 교회라는 곳에서 몇 점짜리로 섬겼는지를 따지실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두렵고 떨리고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는 예수님께서 아직까지 재림하지 않으시고 제게 점수 만회할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이 제게는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저 우연히 친구 따라 한번 와 보게 된 교회라고만, 그저 같은 강서구 안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으니 편리해서 출석하고 있는 교회라고만 여기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교구 담당 교역자로부터 별 지적을 당할 일이 없고 심방장이나 구역장과의 관계만 무난하면 내가 이 교회 교인 생활하는 데에 더 이상 아무 신경 쓸 것 없다고 혹시 착각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이 교회가 여러분에게 그런 정도의 교회로 끝나서는 결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적어도 이 교회에 출석하고 계시는 교인 여러분들에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이에서 그 어떤 확고부동한 관계가 성립되고 그 어떤 구체적인 교제가 실제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곳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교회야말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기반이 되어야 함과 동시에, 이제부터는 그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는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워나가는 현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를 출석하면서 섬기고 있는 모습, 바로 그것이 여러분이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채점을 받고 있는 시험(test)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일꾼'은 절로 '교회의 일꾼'이 될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일꾼 되는 것만이 사람이 자기 생의 본분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 이하 29절에 기록하기를 "25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교회의 일꾼 된 두 번째 의미를 가리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경륜"이란 말의 헬라어 단어는 사실 '경륜'이란 뜻과 동시에 '직분, 사명'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문맥상으로 볼 때 '경륜'보다는 '직분'이나 '사명'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며 새로운 번역들은 대체로 이 후자를 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사도 바울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에 큰 차이가 없는 것은, 사도 바울이 교회의 일꾼이라는 평생의 '사명'을 받은 것은 또한 그 자체가 바울의 생애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경륜'도 되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꾼이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에 내려 주신 가장 중요한 본분이 무엇인지를 찾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25절 하반절로부터 마지막 절까지의 말씀은 지금까지 언급한 두 가지 사실,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과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인데 그 내용을 종합하면 '전도'라는 한 가지에 집약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 "하나님의 비밀의 영광을 이방 가운데 나타내는 것",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 등은 다 전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사명을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기독신자는 오직 전도를 그 주된 사명으로 하는 교회의 일꾼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생애에 주어진 십자가의 몫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 직업 한 가지에 있어서 숙달된 전문가가 되고 어떤 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다 하더라도, 교회의 일꾼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면 그 사람의 인생은 아직 미완성일 뿐입니다.
아니 자신이 교회의 일꾼으로서 어떻게 사명을 다했는가 하는 바로 여기에 그 인생의 존재 의미 자체가 완전히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세상 사회에서는 한가락하는 사람이 되더라도 그 사람의 전체 인생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작품이며 실패작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지고 쓰임 받게 되는 것을 정말 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나이 이만큼 되었는데 아직 이 모양인가?"라는 안타까움이나 "내가 그래도 이만큼은 이루었구나."라는 보람은, 여러분의 사업이 자란 결과만 놓고, 여러분이 모아둔 재산만 계산하고, 여러분이 키워 놓은 자식만 보면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교회의 일꾼'으로서 얼마만큼 자랐으며 얼마만큼 이루어 놓았는가?" - 바로 이 질문에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진짜 평가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각자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며 각자의 인생에 내려 주신 지고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교회를 통하여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과 현실적으로 밀접한 지체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이 교회 안에서 그 주인께서 내게 주신 인생 본연의 사명을 채워 나가는 충성된 '교회의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은 '일꾼'의 의미를 바로 이처럼 깊게 깨닫고 또한 그 '일꾼'의 사명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인'을 바로 모시는 일꾼, 그 주인께서 시키신 일을 바로 '교회 안에서의 사명'을 따라 행할 줄 아는 일꾼 - 이런 의미에서 '복음 일꾼'과 '교회 일꾼'이라는 말을 자기 자신에게 썼습니다.
또한 바로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일꾼이란 명칭은 그처럼 명예로운 것이 되었으며 그 일꾼의 사명 또한 아주 보람스러운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일꾼'이란 말 앞에다가 '복음'이란 말과 '교회'라는 말을 붙여서 생각할 줄만 안다면 사도 바울과 똑같은 체험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 주님을 섬기는 것이 그처럼 힘들게 여겨지는 것이겠습니까?
왜 교회 봉사한다는 것이 그처럼 부담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하여'라는 개념은 전혀 없이 그저 '일꾼'이라는 말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보람도 기쁨도 없이 그저 죽도록 일 하나만 해야 한다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그런 일꾼 되기를 좋아할 사람, 그런 일꾼의 명칭을 명예롭게 여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극히 자랑스러운 주인을 모신 일꾼은 자신의 직분에 대하여 오히려 자부심이 넘치게 될 것이며, 그 주인이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섬기는 일꾼은 일 하나하나와 그 전 과정이 다 너무나 즐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35년 동안 실로 기적적인 성장과 부흥을 계속해 온 것은 바로 이런 '복음 일꾼' '교회 일꾼'들의 믿음과 충성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강서성전을 건축한 것이 만약에 어느 한 목사를 위한 것이었다면 도대체 누가 그처럼 어려웠던 IMF 시절에 그런 '생애 최고의 헌금'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자신이 섬기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잘 아는 일꾼들인 까닭에, 그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만 생각하면서 사람 계산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했던 일을 오직 믿음으로써 시작했습니다.
신자라 하면서도 항상 예수님이 자기에게 무엇을 더 주시기만 바라는 교인이라면 지난 10여 년 동안 헌당헌금, 헌당승계헌금, 헌당추가헌금을 계속해 오는 동안 과연 누가 이 교회에 남아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교회의 장로님들, 집사님들, 권사님들, 그리고 진정한 교인인 된 성도님들은 이제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되고 자기 인생은 그 주님을 섬기는 수단이 된 것을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여길 줄 아는 까닭에, 작정한 헌금뿐 아니라 그 이자까지도 본인이 감당하는, 틀림없이 전세계 교회에서 유일무이한 이런 헌금을 자기 생명 전체의 관제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이 제단을 통하여 다 올려드리는 순교적인 자세로써 지금까지 바쳐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 3부예배 후에 우리는 원로목사님을 모시고 이 강서성전 건축과 헌당을 지금까지 기적적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특별기도회를 가지면서, 이제 이 헌당승계를 올해 안에 완전히 끝내기 위하여 '헌당 완결을 위한 헌금'을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에 앞서서, 작정한 헌당헌금을 실행하지 못하게 된 세 분의 장로님들은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서 당회원직을 사임하시고 휴무장로로 섬기게 되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만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면서 그 주인을 기쁘시게 할 일만 생각하는 목사가 아니어서는 결코 시킬 수도 없는 일이며, 사사로운 인간적 체면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교회와 성도들 앞에서 본이 되어야만 할 직분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장로가 아니고서는 결코 순종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 특별기도회 시간에 마지막 기도를 인도하러 강단에 올라가셨던 헌당위원장 장로님께서는 "이 헌당을 헌당위원들만으로써 끝내지 못하고 이렇게 모든 교우님들께 도움을 청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헌당을 위하여 다른 사람으로서는 알 길이 없는 엄청난 짐을 한 몸에 지고 오셨으면서도 오히려 교회 앞에서 그렇게 부끄러워하시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했든지 간에 주인 되신 예수님 앞에서는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만 말할 줄 아는 겸손한 종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보여 줄 수 없는 자세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교회의 모든 제직들과 성도들도 이 헌당을 위한 짐을 마지막까지도 다 서로 나누어지기로 마음을 모으고 이 헌당 완결을 위한 헌금 작정에 기꺼이 동참하셨습니다.
  
IMF 때에 성전건축을 시작했고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건축헌금과 헌당헌금을 바쳤는데 이제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인 불경기가 연이어지고 있는 이 어려운 때에 와서 또 다시, 그것도 연말까지 현금으로 내는 헌금을 바친다는 것이 정말이지 도대체 사람으로서 실행은커녕 어디 말부터라도 꺼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일꾼이 된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주님의 몸 되신 이 교회를 내 몸 같이 아니 내 몸보다 더 아끼면서 섬기는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것까지도 오직 기쁨과 감사로써 넉넉히 감당하며 빠짐없이 참여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꾼'이 된 것,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까?
우리가 '썩어져 가는 것들의 종노릇'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고난을 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워 나가는 사명'을 따라 섬기게 되었다는 것,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과분하고도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교회를 통하여 이처럼 자기 주인을 잘 알고 순종하는 '복음 일꾼',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고 충성하는 '교회 일꾼'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스러운 기둥'으로 영원히 세워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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