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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식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의 말 (딤후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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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의 말 (딤후 1:1~14)
      
 
‘병사의 아버지’라는 러시아 영화가 있습니다. 흑백으로 제작된 고전영화입니다. 이차세계대전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시골의 어느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냈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아들을 찾기 위하여 전쟁터로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이 아버지는 수염이 나고 누가 봐도 노인으로밖에 볼 수 없는 그런 사람이지만 자기 자식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군대에 입대할 각오도 돼 있습니다. 집을 떠나는 남편을 보면서 아내가 별의 별 잔소리를 합니다. 비를 맞지 말아라, 감기 걸리면 안된다, 돈은 한 곳에 보관하지 말아라 위험하다, 주머니 단추를 잠가라, 아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하겠느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떠나면서 할 말은 없느냐 그랬더니 남편이 버럭 대답합니다. 
"내가 가는 걸로 됐잖아" 다시 말하면 내가 직접 아들을 찾으러 가는 것으로 됐지 무슨 더 할 말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말보다는 액션이 앞서는 남자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천신만고 끝에 독일 베를린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들어간 최선봉 부대원 중에 자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베를린을 함락시키는 이 부대원들을 따라서 베를린 의회의 건물에 꼭대기에 러시아 깃발을 세우기 직전에 적탄에 맞아 쓰러지는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 아들아, 많이 컸구나. 네 어머니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한다는 말이냐" 이러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아마도 이차세계대전 후에 러시아 프로파간다(propaganda)용으로 만든 영화였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뭉클하게 해 준 영화입니다. 

우리는 가족끼리 또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을 나눌 기회가 많은 것처럼 생각이 되지요. 말은 늘 많이 합니다. 사랑한다, 건강하게 다녀와라, 이런…….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말은 의례 하는 말이라고 생각되고 별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도 돌아가신 아버님과 생전에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정말 기억에 남는 대화는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아버님과 단둘이 점심 식사를 하면서 나누었던 그 대화가 가장 마음에 기억됩니다. 그래서 아버님 생각을 할 때면 그때의 기억, 그때의 대화를 떠올립니다. 

우리의 말이 너무 많아서 희소가치가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언어의 한계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왜 우리는 서로 보내는 시간은 많은 것 같은데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가 별로 없는 것입니까. 이것은 교회생활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가 일평생 교회를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말씀이 다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많은 말씀을 우리가 다 마음에 간직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와 닿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거라도 없다면 교회생활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끔 와 닿는 말씀이 있지만 가끔 뿐이고 그리고 그것을 처음 들었기 때문도 아니고 모르는 말씀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미 여러 번 듣고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것이 새로운 의미로 우리의 마음에 꽂히기 때문에 그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대화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늘 서로 말합니다. 말이 많지요. 말이 홍수를 이룹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말은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고 그 의미가 전달되지도 않고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사람의 말 속에 그 사람의 진실을 느끼게 되고 마음과 마음이 와 닿는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미 여러 번 들었던 말이라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마음에 와 닿고 그저 소리가 아니고 상대방의 진실이라고 느껴지는 그런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늘 서로에게 I love you, I love you라고 말하고 또 Thank you, Excuse me,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을 알려져 있지요. 거기에 비교하면 한국사함들은 너무 무뚝뚝합니다. 사과도 안하고 고맙다는 말도 별로 안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서양 사람들이 더 사랑이 많다는 얘기입니까. 그건 아니지요. 사랑한다고 자주 말한다고 해서 더 사랑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이라는 이 말을 남용함으로써 희소가치를 떨어뜨리는 것뿐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입니다.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이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했는데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말을 많이 하여야 사람이 들을 줄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도 아니라면 사람에 대해서도 말을 많이 한다고 사람이 듣는 것이 아니에요.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염려하시는 분들도 그 사실을 염두에 두시면 좋겠습니다. 자식이 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듣는다면 모든 자식은 성인군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모들이 잔소리가 많습니까. 공부해라, 씻어라,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리지 말아라, 일찍 자라, 이를 닦아라, 비누칠을 해라, 컴퓨터 게임 좀 그만해라, 얼마나 많은 잔소리를 들으면서 삽니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은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가출하지 않는 자식들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제발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는 자식은 위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잔소리가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제가 어렸을 때 저를 볼 때마다 다리 떨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셨습니다. ‘다리 떨지 말아라! 복이 나간다.’ 왜 다리를 떨면 복이 나가는지, 그럼 팔을 떨면 복이 들어옵니까. 그렇다고 제가 다리를 떨지 않았느냐? 계속 떨었습니다. 지금은 안 떱니다. 왜냐하면 다리를 떨기에는 너무 늙었기 때문에. 그럼 그때는 왜 다리를 떨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모님과 같이 있는 시간이 하도 지루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해보면 지루하기 때문에 다리를 떨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되면 사람이 어른이 되고 철이 들고 그리고 결국은 자기의 인생이 뭔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그러므로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도 아니라면 말을 많이 해야 사람이 듣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이 전달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청개구리도 어머니의 말씀을 듣는 순간이 있는 것처럼 마음의 진실이 전달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순간입니다. 신비하고 마술과도 같은 순간이에요. 그 대상이 사람이든 하나님이든 우리의 말이 전달되는 순간은 아주 신비한 순간입니다. 그때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진실이 전달되고 마음이 열리고 또 축복이 전달되고 그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삭이 자기 아들 야곱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원래는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는데 속아서 야곱이 에서인줄 알고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 아들 중에 한 사람을 적어도 축복했다는 사실입니다. 평소에 자기 자식을 축복하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것도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때가 와야 그것도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가 오기를 이삭도 기다려야 했고 야곱도 기다려야 했고 그 때에 자식을 축복했더니 정말로 축복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부모가 자식을 축복하는 것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가능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부모가 자기 자식을 축복하는 것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축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축복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그것이 그저 형식이나 의례적인 것이 아니고 정말로 그 의도한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순간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말씀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의 서두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친아들이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그는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친아들도 없고 딸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르고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축복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친자식이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에게 친자식이 있어야만 사랑과 축복을 베풀고 뭔가 세상에 유산을 남길 수 있다면 바울이든 예수 그리스도든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식이 없었고 바울도 자식이 없었지만 그들처럼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고 사랑하고 섬긴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 혈육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내가 자식처럼 아끼고 또 사랑하고 또 축복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 말씀을 보면 한 문장에 사랑, 은혜, 긍휼, 평강 이러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한 문장에 이런 단어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감동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자식에게 하는 말들이 얼마나 야박한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야단치고 흠을 잡고 부모의 불만과 또 남과 비교하는 것과 부모가 부끄러운 것과 뭐 이런 것들에 대한 야박한 말은 할지언정 한 문장 속에 사랑, 은혜, 긍휼, 평강을 함께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감동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그때에 정말로 누군가를 축복할 수 있고 그것이 그저 형식이 아니고 하는 말이 아니고 그 말의 능력이 나타나서 우리가 누구를 축복할 때 정말로 하나님의 축복이 그 사람에게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이 한구절만 가지고 생각을 하더라도 왜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은혜와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자기 자식에게도 이와 같은 축복의 말을 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비판과 야단은 누구든지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긍휼, 평강까지 빌어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은 맨 정신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디모데가 이 편지의 2절 말씀을 읽는 순간에 바울이 뜻했던 것처럼 정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임했을 것입니다. 주석가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에게서 출발할 때는 은혜와 긍휼로 출발했다가 사람에게 도착할 때는 평강의 형식으로 도착한다.’ 이렇게 말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입니다.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깔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은혜를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만약 하나님의 은혜를 통과시킬 수 있는 프리즘이 있다면 거기에 다양한 은사와 축복과 좋은 것들이 들어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은혜, 사랑 이런 식으로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어떤 지혜, 깨달음이라는 프리즘을 통과시켰을 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포함돼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전달도 하나님이 가능하게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가능하게 하셔야 사랑이 사랑으로 전달되고 축복이 축복으로 전달되고 진실이 진실로 축복이 되고 전달이 되는 것뿐만이 아니고 거기에서 진정으로 효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을 하면 그 사람이 축복을 받고 평안을 빌면 그 사람이 평강을 경험하고 거기에서 그 사람의 건강을 축원하면 병이 낫고 또 그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축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 가정에 임하는 놀라운 역사지요. 

사람이 사람을 축복할 수 있고 때로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이들에게 주신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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