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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행복 (히 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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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행복 (히 6:13~20)


이런 크리스쳔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과거에 자기와 교제하던 자매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전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진심으로 결혼을 축복합니다. 요일4:18” 

요일4:18은 이런 내용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진심으로 이제는 아무런 과거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버리고 새롭게 만난 남편과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가정을 만들라는 뜻이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성경구절을 첨부하여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우체국의 실수로 요일4:18이 ‘일’자를 뺀 요4:18이 되어 결혼 전날 신부에게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신부가 전문을 받아보니까 “진심으로 결혼을 축복합니다. 요4:18”이라고 되어 있어서 얼른 성경을 열어 보았습니다.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잘 아시는 대로 이 말씀은 사마리아 땅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문자 그 대로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면서 행복을 찾았지만 거기에 행복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행복을 찾아 오늘은 이 남자, 내일은 저 남자에게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참 행복을 이 여인에게 선물할 수는 없었습니다.

옛 시의 한 대목처럼 이 여인은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이 산 넘어 에서 저 산 넘어로 방황했지만 아무 곳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렇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가련한 여인에게 순간적 쾌락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과연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그 영원한 행복의 정체는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두 주간 이웃 사랑 축제를 통해 우리는 여러 이웃들에게 복음을 나누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정말 그분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히브리서의 말씀을 통해서 성경이 증거하는 영원한 행복의 본질과 확실성, 그리고 그 소망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영원한 행복의 본질에 대한 묵상입니다.

자, 히브리서의 본문이 열리면서 본문 13-14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행복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아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본래 이 말씀은 창22:16-18에서 인용된 말씀이었습니다. 17-18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본래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씨가 될 한 분에 대한 것이 그 초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언약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요8:56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결국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행복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류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구세주이신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 없이 행복은 없습니다. 죄책은 마음의 행복을 앗아가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죄 사함을 선물로 얻습니다. 롬4:7-8에서 바울 사도도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이 행복의 본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불법의 사함을 얻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할 사람은 복이 있도다”고. 

그러나 믿는 자의 행복은 단순히 죄를 용서 받음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단순히 그가 용서 받는 행복만을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창12:2을 기억해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기 마지막 부분에 “복이 될지라”는 말씀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경적 행복관은 자기 혼자 복을 누림이 아닌 이웃들을 복되게 함으로 자신이 행복해 지는 복인 것입니다. 이번 이웃 사랑 축제에서 우리가 전도하고 이웃들을 위해 중보하면서 우리가 누린 행복이 바로 그런 행복이 아니었나요? 우리의 이웃들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는 것을 보고 그들 보다 더 행복한 것은 그들을 인도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잊지 마십시다. 영원한 행복의 본질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이웃들을 축복하는 통로로 쓰임 받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로, 영원한 행복의 확실성에 대한 묵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르쳐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믿을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한 까닭입니다. 우리는 오늘 아무도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확실한 우리의 미래를 보장 받기 위해 은행에 저축을 하고 보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은행을 그리고 그 보험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마 어마한 액수의 복권에 당첨되었는데 그 분은 오래 동안 병을 앓아온 심신이 허약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냥 통고하면 그 분이 과연 믿느냐도 문제이고 또 그 사실을 믿는다면 그 충격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보험 회사에서는 회의를 거쳐 그 당첨자가 교회에 나가는 분인 것을 알고 교회 목사님에게 충격이 안 되도록 상담을 하면서 통고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교인을 만나 조심스럽게 복권을 사신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예‘라고 대답하자, 제가 기도해 드리고 싶은 맘이 생겼다고 말을 꺼낸 다음 그런데 “만일, 만일에 그 복권이 당첨되면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 교인은 서슴치 않고 “예, 그런 일이 생긴 다면 절반을 목사님께 드리지요”하더랍니다. 목사님이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우리 세태를 풍자한 유머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어느 시대에나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합니다. 구약 전체를 한마다로 요약한다면 “여호와(창조자 하나님)를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신약 전체를 한마다로 요약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구속자 하나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언약하신 것을 믿을수 있는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18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 할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이 무엇입니까? 선행하는 17절에서 그 대답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맹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 그리고 하나님의 맹세의 보증성을 걸고 내가 내 백성들에게 언약한 영원한 행복은 믿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무엇을 맹세할 때 내 권위로는 충분치 않기에 하늘을 걸고 맹세한다는 말을 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걸고 맹세하실까요? 본문이 시작되는 13절 말씀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하실 자가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르켜 맹세하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약속의 최종적 권위이십니다. 그가 자신의 명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우리의 행복을 보증하십니다. 그러면 된 것이 아닙니까? 그만하면 안심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행복의 확실성-영원하신 하나님이 보증하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영원한 행복의 소망에 대한 묵상입니다.

인생은 일종의 항해라고 할수 있습니다. 곧 네비게이션인 것입니다. 항해의 성공여부는 과연 파도를 헤치고 포구까지 무사히 승객들을 인도할수 있느냐일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그 항구에 정박한 배가 파도에 떠밀리지 않고 그 승객들을 지킬 것이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이 소망은 흔들릴 필요가 없는 견고한 소망이라고 가르칩니다. 

19-20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 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 그분은 우리가 갈 길을 앞서 가신 분이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의 대 제사장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들의 역할을 감당하고 그 역할을 다른 제사장에게 승계할 수밖에 없었지만 딱 한 사람 구약 창세기에 시작도 끝도 모를 신비한 제사장 멜기세댁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유형의 제사장으로 그의 역할은 영원하신 대 제사장이신 것입니다. 그분이 인도하시기에 우리는 모두 마침내 구원을 이루고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마침내 이룰 것이며 그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우리의 환경에 의해 우리의 믿음이 크게 잠시 흔들릴 수 도 있고, 우리의 육체가 병들 수도 있고, 육체가 망가지듯 정신이 망가질 수 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의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 보장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한번 구원하신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신실하심과 그의 불변하신 언약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런 성도의 구원의 안전성을 가르쳐 ‘영원한 안전(eternal security)의 교리’ 혹은 ‘견인(perseverance)의 교리’라고 불러 왔습니다. 

찬송가 작가 가운데 릴리아 모리스(Lelia N. Morris)여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50세부터 시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52세가 되자 완전히 실명을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작사하고 작곡하며 믿음의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힘들지 않느냐고 피곤치 않느냐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녀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고 합니다. 

“영원하신 팔이 저를 붙들고 계시는데요” 찬송가 464장을 기억하시나요?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하신 팔 의지해/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어느 곳에 가도 요동하지 않음은/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이 찬송은 바로 모리스 여사의 간증이었던 것입니다.

저 포구에 정박한 배가 폭풍이 일어도 흔들리지 않고 정박할 수 있는 것은 저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우리 주님에 대한 신뢰와 소망-그것이 바로 성도들의 영혼의 닻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행복도 영원합니다. 우리의 소망도 영원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인도하고자 한 우리의 vip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믿음과 소망의 닻을 내리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이 부분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나머지는 주께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성장의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을 사실상 키우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의 양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간 축제를 통해 결심하신 분들이 믿음의 출발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를 참으로 의지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그들은 주님의 네비게이션을 따라 위대한 믿음의 항해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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