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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 : 자비 (눅 6: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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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 자비 (눅 6:27~36)


어떤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주인 몰래 물건만 훔치고 달아나려고 했는데 그만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강도는 총을 겨누고는 소리쳤습니다."손들어!" 주인은 총을 보고 놀라서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런데 왼쪽 손만 들어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강도는"오른 손도 들어!"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강도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오른쪽 팔은 지금 신경통을 앓고 있어서 들 수가 없소."

그런데 이 말을 들은 강도가 갑자기 들고 있던 총을 내려놓으며 태도가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바짝 다가앉으면서"당신, 신경통이요? 실은 나도 신경통인데…." 하면서 자연스럽게 신경통으로 화제가 옮겨졌습니다. 물건을 훔치러왔던 강도가 들켰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고 신경통의 치료 방법 등에 관하여 주인과 의견을 나누었습니다."언제부터 신경통이 왔느냐? 비가 오면 쑤시지 않느냐?..."대화가 오고 가는 가운데 주인 또한 강도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고 단지 이웃집 남자처럼 친근하게 소파에 앉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신경통에 대해 이야기를 밤새도록 나누었다는 이 이야기는 코미디나 개그가 아니라[오 헨리]의<강도와 신경통>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 때 그 사람을 이해 할 수 있고 서로의 생각을 알게 되며 대화를 통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것이 매개가 되어 공동체를 이룹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나 혹은 같은 관심사를 가진 단 한사람만 만나도 삶의 희망을 가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생은 누군가를 만나야하고 더불어 사는 즐거움이 있을 때 온전한 삶을 이루고 삶의 목적을 향한 강한 추진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물질의 빈곤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불행하고 입을 옷이 없어서 불행한 것 보다 살아가는 목적을 잃어버리고 홀로 버려졌을 때 인간은 가장 불행한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땀 흘려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지금 생각해보니 왜 애써 벌었는지를 모릅니다. 가질 만큼은 가졌는데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이것이 불행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돈만 벌 때는 몰랐는데 가만히 돌이켜보니까 재물이 많아지는 만큼 내 곁에서 사람들이 떠나 버렸습니다. 지금 가진 만큼 잃어버린 것도 너무나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살아가는 목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궁극적 목적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불행하게 하고, 허무하게 하고, 피곤해지게 만들고 맙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피곤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시작부터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주려고도 했고, 나름대로 베풀려고도 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왜 끝까지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왜 중도에 마음이 변하고 결심이 흔들려서 실패하고 말았습니까?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이기주의>입니다. 

여러분 이기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십니까? 이기주의만큼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비참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을 혼자 살수 없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은 자신만이 아니라 나의 주변에 대해서도 책임질 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그것은 분명 내가 무엇인가 잘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밖에 평가하지 않을까? 나한테는 왜 친절하지 않을까?"싶을 때는 그 이유가 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살았고, 내 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살았다는 반증입니다. 주변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질 줄 알아야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고독합니다. 내 주변에 사람이 점점 없어지면 내가 이기적이구나 판단하면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때로 자기가 이기적인 것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임마누엘 칸트(Kant, Immanuel)]는 이기주의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논리적 이기주의(論理的 利己主義)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판단만 옳고 다른 사람의 판단은 자기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자기 생각만 옳고 자기 생활은 무엇이든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미학적 이기주의(美學的 利己主義)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기분에만 만족하고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항상 자기 기분, 자기만족, 자기감정에 중심을 두고 다른 사람이야 마음이 상하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세 번째로 도덕적 이기주의(道德的 利己主義)가 있습니다. 자기한테 유익한 것은 다른 누구한테도 유익한 것이고 다 선하고 자기한테 유익하지 아니하면 다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주 극단적인 이기주의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나라도, 사회도, 교회도, 이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이기주의의 형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버려야 삽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이기주의를 벗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36절입니다."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이기주의를 벗을 수 있는 방법은 자비를 베푸는 삶입니다. 즉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긍휼과 자비란 전적으로 남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이기이지만 그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 되면 자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욕심이 되지만 그것이 남을 위하는 마음이 될 때 긍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던 것에서 주체만 바꾸면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이 더해지면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요,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선하게 대해주고, 나를 저주하는 사람을 위해서 축복해주며, 나를 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마음이 됩니다. 이기적인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자비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31절에 말씀해 주십니다. 기독교의 황금율이라고 불리는 마7:12절과의 병행구절입니다."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톨스토이(Leo  Nikolaevich Tolstoi (1828-1910)]는"자기를 희생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섬김을 받는 것과 섬기는 것, 주는 것과 받는 것 어느 것이 큰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기쁨에 살고 있습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주는 기쁨>에 살아야합니다.<희생하는 기쁨>을 알고 그 기쁨에 살아가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교회들이 구제를 하고, 봉사를 하고, 선교를 합니까? 바로 이런 정신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줍니다. 사랑을 줍니다. 의미를 줍니다. 내 모든 것을 주어서 내가 죽고 내기 희생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고 의미가 돌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의 취향입니다. 그리고 주는 것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창의적이어야 합니다.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주기 싫어서 억지로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빼앗기는 기분으로 주어서도 안 됩니다. 

본문29-30절에 주님께서 무어라 하십니까?"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생각에 따라서 늘 남에게 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빼앗기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준 것은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준 사람은 행복하지만 빼앗긴 사람은 불행합니다. 항상 베푸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본래 사람은 그리해야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합니다.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했건 상관하지 말고 끝까지,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창조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공자(孔子)]의 가르침에<기소불욕(己所不欲)이면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는 교훈이 있습니다."내게 원치 않는 일이면 남에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저가 나한테 이렇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나도 저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인군자다운 가르침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주님이 오늘 가르치신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무슨 차이인지 여러분은 아시겠습니까? 

공자는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지 말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즉, 소극적이요,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떻습니까? 하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이요, 긍정적이며 창조적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다는 것이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되는 것인데 이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한 남이 나에게 먼저 친절하면 나도 친절하고, 남이 나를 칭찬하면 나도 칭찬하고, 남이 나를 사랑하면 나도 사랑해 주는 따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면<반대급부(反對給付)>의 삶이 아니라 적극적인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 받고자하면 사랑을 해서 사랑을 받아내면 됩니다. 사랑을 받을 때까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을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저 사람이 무심해서가 아니라 내 사랑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진실하게 사랑했더라면 반드시 받았을 것입니다. 내 사랑의 분량이 모자라고, 내 사랑의 방법이 잘못 된 것은 모르고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산다고 불평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창조적으로 만들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바라는 바가 있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이해 받기를 원하는 대로 내가 남을 먼저 이해하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내가 먼저 참고,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기다려주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내가 먼저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경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존경받을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자비입니다. 긍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자비의 모습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은<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자비로운 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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