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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서 수고한 자들 (롬 1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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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마차였습니다. 영화를 통해서 본 것처럼, 마차가 그 당시에는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는데.. 그런데 이 마차는 기차처럼 객실이 크지도 않으면서, 그 안에서도 자리의 구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몇 명 앉지도 못할 것 같은데, 그 안에서도 1등석, 2등석, 3등석으로 자리가 구분되어져 있었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1등석은 뒤로 누울 수 있는 아주 편안한 의자로 되어 있고, 3등석은 딱딱한 나무 의자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리는 똑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구분을 지었겠습니까? 그 구분은 좌석이 아니라, 승차요금을 기준으로 해서 구분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도로가 잘 닦여져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제대로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달리게 되면, 마차가 덜컹거리면서 자주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마차가 고장이 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자리의 구분이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차가 고장이 났을 때, 1등석 표를 산 사람은, 마차가 고장이 나도, 그냥 마차에 앉아서 기다리면 됩니다. 그리고, 2등석 표를 산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면, 마차가 고장이 나면 일단 마차에서 내려야 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비가 많이 와서 바퀴가 수렁에 빠진 경우라고 한다면, 비를 쫄쫄 맞더라도 일단 내려서 기다려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3등석 표를 산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눈에 선하죠? 마차에서 내려서, 마부와 함께 마차를 열심히 고쳐야만 했습니다. 비가 와서 수렁에 빠졌으면, 비만 맞는 것이 아니라, 흙탕물을 뒤집어 쓰면서 마차를 밀면서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까, 마부들은, 처음에 승객들이 승차할 때에 누구를 가장 먼저 보겠습니까? ‘3등석 요금을 내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것을 유심히 살펴봅니다. 만일, 강호동, 이혁재씨가 1등석 요금을 내고 탔는데, 3등석에는 유재석씨랑 아무개 목사님이 탔다! 그렇게 되면 마부로서는 대략난감하게 되겠죠. 3등석 손님이 덩치가 있고, 힘 깨나 쓰면서 일꾼의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그 마차가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요.

  교회 안에서도 보면, 세 부류의 사람들로 구분을 할 수가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정받고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1등석 성도가 있는가 하면, 또한 2등석 성도처럼, 구경꾼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마도 이 2등석에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는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팔을 걷어 부치고,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는, 일꾼으로서의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몇 등석 손님인 것 같습니까? 

  평생을 목회하시다가 은퇴하신 목사님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그 한 부류는 주님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수고한 사람들이고, 또 다른 한 부류는 교회를 어지럽히고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기억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평생을 복음을 위해 일했던 사도요, 일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랜 사역 기간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알고 지냈습니다. 그런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들이 이 로마서 16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11절 까지, 뵈뵈 집사,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와 같은 바울의 후원자들과 동역자들을 살펴보았었고, 오늘은 12절 이하 16절까지 나오는 주 안에서 수고한 자들을 살펴보고, 17절 이하 20절 말씀에서 이단에 관한 부분을 함께 살펴 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12절 이하에서 다시 칭찬 받을만한 여러 일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칭찬하는 수식어가 좀 길게 붙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그냥 이름만 언급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 언급된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주안에서 수고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일했다거나 엉뚱한 것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모두 주 안에서 수고를 많이 한 3등석 일꾼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소개되고 있는 열 일곱 명 이상의 사람들에 대해서 소개를 할 때에 다른 것을 기준으로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뽀샤시한 드루배나와, 공부 잘 하는 아순그리도와,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빌롤로고와, 고위 관직에 있는 올름바라고 그렇게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일꾼들에 대한 다른 정보들은 다 생략하고, 오직 그들이 주 안에서 수고한 사람들이라는 것만 강조하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것들은 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식하거나 부유하거나,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가졌거나, 얼짱이거나 S라인을 가졌거나, 그런 모든 것들이 주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의 방향과 우리의 자랑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고 봉사했고, 얼마나 희생하고 수고했느냐 하는,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하나같은 공통점 한 가지는 모두가 많은 수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경쟁사회에다 스피드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다 보니까, 수고롭지 않은 일들이 없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심부름을 시키면 ‘바빠서 안 돼요.’ 이렇게 얘기할 정도로,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모두 바쁘고 수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럴 때에 꼭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쁘고 힘들고 지치다 보니까,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너무 바쁘다 보니까,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생각할 틈도 없이, 그냥 무시해 버리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우리가 쉽게 놓치기 쉬운 중요한 문제는 ‘내가 과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쁘고 수고를 하고 있는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로 수고하고 있습니까? 직장생활로 인해서, 학교생활로 인해서, 집안 일로 인해서, 공부하느라고, 돈 버느라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느라고...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수고하면서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서 내가 정말 주님 안에서는 어떤 수고를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대머리가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그 청년은 고민 끝에, 머리카락을 심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과감히 집을 뛰쳐나와서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쪽방에서 자면서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주유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밤을 새워가며 일했습니다. 그렇게 그 청년은 2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돈을 많이 벌어서 마침내 머리카락을 심었습니다. 이제는 누가봐도 정상인의 머리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그 변화된 모습을 제일 먼저 어머니에게 보여 드리고 싶어서 집으로 달려 들어가면서 소리 쳤습니다. “어머니, 저 좀 보세요. 이 아들이 이렇게 달라져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 너 영장 나왔다.” 

  우리가 바로 그 청년 같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수고한다고 하지만, 주님 밖에서 수고하는 모든 것들은 다 헛수고일 뿐입니다. 주님 밖에서는 아무리 수고해봐도 그 수고는 기억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여러 일꾼들처럼,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주님 안에서 하는 수고들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혹시, 헛된 일에 수고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고 있고, 이것이 과연 주안에서의 수고인지를 돌아보면서, 헛된 수고에서 돌이켜서 주님 안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우리 가운데서 교회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수고하고, 찬양팀으로 섬기면서 수고하고, 임원으로 섬기느라고 수고하면서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있다면, 나같은 사람도 주님을 위해서 수고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주님 안에서 수고하는 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 안에서의 수고만이 헛되지 않은 값진 수고입니다.

  그리고, 13절 말씀을 보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 말씀을 보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을 그냥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가는 그냥 구레네 사람 시몬이 아니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가도 마태와 누가처럼 그냥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기록했다면, 구레네 시몬과 루포와의 관계에 대해서 잘 몰랐겠지만, 마가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시몬이라고 기록을 해서, 두 사람이 부자지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구레네 시몬은 아프리카 시골에 살면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왔었는데, 예수님이 자꾸 쓰러지니까 로마 병정이 강제로 그에게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시몬은 돈을 받고 십자가를 진 것도 아니었고, 로마 군인들이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졌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속으로는 오늘 정말 재수 억세게 없는 날이라고 욕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졌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지켜본 시몬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들의 가정이 복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끄는 놀라운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라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내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누가 시키게 되면, 괜히 짜증만 나고, 능률도 오르지 않고, 스트레스만 쌓이면서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억지로 하게 되는 일은 차라리 안 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되기도 합니다. 억지로 할 바에는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씩 집에서 좀 쉬고 싶은데, 집사람이 애기 기저귀 갈아주라고 하면, 정말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차라리 못하겠다고 얘기하고 안 하는 게 나은데 억지로 기저귀 갈다보면, 괜히 이불에 똥 묻혀 가지고 심하게 혼날 때가 있습니다. 억지로 하게 되면,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와 함께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하는 편이 우리에게 더 유익합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졌더니, 그 아들 루포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일꾼이라는 칭찬을 받는 좋은 일꾼이 되었고, 구레네 시몬의 아내는 사도 바울이 내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바울에게 귀한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절로 헌신하고, 봉사하고, 언제까지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까? ‘나는 지금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겨서 못하겠고, 나중에 나이 들고 하고 싶어지면 그때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언제 일을 하고 싶어져서, 도대체 언제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죠? 자원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평생 아무 것도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린 학생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공부하고 싶어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정신 차렸을 때는 노인대학밖에 들어갈 학교가 없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는 좋아서 하는 것도 있지만,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도 있는데,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은 비록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하기 싫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 할 때 하는 습관을 미리부터 길러줄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무리가 되는 것 같아도 지도자가, 또는 다른 사람이 권할 때에 억지로라도 순종해서 시작하면 구레네 시몬처럼 평생 기뻐하고 감사할 일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좋은 마음, 기쁜 마음으로 나올 수는 없습니다. 어떤 때는 하는 수 없이 나오기도 하고, 고집이나 오기로 나오기도 하고, 체면을 보고 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나와서 졸고 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나오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큰 유익이 됩니다. 선한 일은 절대로 후회가 없고,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17절 이하에서는 이제 일꾼들에 대한 문안 인사가 끝나고, 부정적인 모습에 대해서 경계하는 내용의 말씀이 17절과 18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거스르고 분쟁을 일으키고 남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고 그런 사람들에게 떠나고 그들을 멀리 하라고 권고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육신적인 일만 도모하고 영적이고 신앙적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꼬드기고 잘못된 길로 인도해서 그들도 넘어지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이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 정의 내린다면, 주안에서 수고한 모든 수고를 헛되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지금까지 잘 해왔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단과 같은 사람들에게 휩쓸리게 되면 주안에서 수고한 모든 수고들이 헛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경계하고 있는 겁니다.

  검둥개 100마리가 떼를 지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요술램프를 발견하게 됐고, 램프를 문질렀더니 동화에서처럼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검둥개들은 저마다 소원을 빌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얗게 되고 싶어요.” “저는 백견이 되고 싶어요.” “저도 하얀 개가 되고 싶어요.” 그렇게 아흔 아홉 마리의 개들이 모두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검둥개 차례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뭘 원하십니까?” 지니가 그렇게 물어봤는데, 이 검둥개는 성격이 좀 지저분한 개였습니다. 그래서, 이 검둥개는 인상을 쓰면서 하는 말이 “쟤네들 모두 검둥개로 되돌려 주세요!”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검둥개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비화가 있습니다. 

  바울이 경계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100번째 검둥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안에서 수고한 모든 것들을 하루 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게 할 위험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친구들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이 경계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서로 문안하고, 교제하면서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 곁에 신실한 신앙의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19절에서는 드디어 로만 식스틴 나인틴 세즈가 나옵니다.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그 반대입니다. 나쁜 일에는 아주 머리가 잘 돌아가는데 선한 일에는 둔하고 미련해서 어떻게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몰라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남을 돕고 위로하고 감싸주는 일에는 지혜가 없어서 잘 못하는데, 남을 비방하고 헐뜯고 괴롭히는 일에는 머리가 어찌나 고속으로 회전을 하는지, 배우지 않아도 아주 능수능란하게, 프로페셔널 하게 잘 합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이라는 영화, 모두 보셨죠? 그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프랭크 아비그네일 주니어라는 사람인데 그는 16살부터 5년 동안 26개 나라를 돌면서 2백 5십만 달러 어치의 위조 수표를 남발했습니다. 그래서, 체포된 후에 12년형을 선고 받은 후에, 5년을 복역하다가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연방정부를 위해 사용한다는 전제 하에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위조 수표를 만들던 그 기술을 가지고, 위조 수표를 감별해 내는 그 기술을 법률 공무원과 FBI 요원들에게 전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금융사기나 위조 방지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지금도 살아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말해줍니까? 선한 동기를 갖고, 최고의 훈련을 받은 FBI 요원도 일개의 사기꾼을 못 따라간다는 겁니다. 악한 일에는 얼마나 지혜로운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고도로 훈련된 사람보다 훨씬 지혜롭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우리의 본성을 따라서, 선한 일에는 미련하고, 악한 일에 지혜로운 자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주 안에서 수고하고 쓰임 받는 일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 수고하고 쓰임 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선한 일에 지혜롭고 악한 일에는 미련한 자가 되어라!” “주 안에서 수고하는 일에는 지혜롭게 잘 하고, 주 밖에서 헛된 수고에는 미련해서 주밖에서 헛된 수고를 하지 말아라!” 바울 사도는 그것을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우리의 대적 사탄은 우리가 선한 일에 지혜롭고 악한 일에는 미련한 자가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떻게든지 우리를 선한 일에 미련하고, 악한 일에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해서, 우리가 주 안에서 수고하는 일꾼이 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과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20절 말씀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마다 사탄이 방해를 하고, 유혹해 오지만, 그러나,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대항하고 믿음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곧 무너뜨려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흔들리지 말고, 선한 일에 지혜롭게 되어서 선한 일을 행하고, 더욱 주 안에서 수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주 안에서 수고한 여러 일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1등석에서 대접 받기 원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2등석의 구경꾼들입니까, 아니면 3등석의 일꾼들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수고를 해도 주님 밖에서 수고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수고한 그 수고만이 값진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만을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수고를 다하되, 힘들고 지쳐서 비록 억지로 하게 되더라도, 주 안에서 하는 수고는 억지로 하는 그 일마저도 우리들에게 귀하고 값진 결과들을 안겨 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한 일에 지혜롭고 악한 일에 미련한 자가 되어야 더욱 하나님의 사랑 받는 일꾼들이 될 수가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을 멸하셔서, 3등석에서 일하는 우리 일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주님은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이 약속의 말씀을 믿으면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우리의 수고를 다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주님 안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것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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