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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자의 자세 (왕하 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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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우즈라는 미국의 프로 골프 선수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골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중의 하나로 평가를 받고 있고 골프 천재, 또는 골프 황제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경기 모습을 녹화한 비디오 테잎을 뚫어지게 보더니 자신의 코치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코치님, 제 자세에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완전히 뜯어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1996년에 프로로 입문해서 입문한 지 1년 만에 대회 우승을 거머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 한 살이었고, 2위와는 무려 12타 차이가 나는 압도적인 우승이었기 때문에, 매스컴에서는 새로운 골프 황제에 대해서 연일 시끄러울 때였습니다. 

  그는 이미 이른 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스윙 자세로도 이미 몇 번이나 우승을 했었기 때문에, 그의 스윙 자세가 그렇게 완전히 뜯어고쳐야 할만큼 좋지 못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코치에게 스윙 자세를 교정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코치는 지금 자세를 바꾸게 되면, 새로운 자세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우승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우즈 선수에게 한동안 우승을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승이라는 것이 언제나 발전의 잣대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면서 망설임 없이 자세 교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교정하는 일년 반 동안에는 고작 한 대회에서 우승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즈 선수를 향해서 비웃었습니다. 골프의 황제가 슬럼프에 빠져서 이제 황제의 자리를 내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떠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99년부터 교정된 자세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4개 대회에서 10개의 우승 트로피를 휩쓸었습니다. 2001년에는 4대 메이저 대회를 석권한 최초의 골퍼가 됐고, 지금까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신화적인 선수로 계속해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그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다시 반복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트로피나 금메달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운동선수들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면서 경주하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자세의 문제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운동선수의 자세는 금메달을 따느냐 놓치느냐 정도에 달려 있지만, 우리 신앙인들의 자세는 우리의 인생뿐만 아니라, 영원까지도 좌우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에 대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 특별히, 예수생명큰잔치 두 번째 날을 앞두고 있는 이 때에 복음 전도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세는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네 명의 나병환자들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처한 상황은 앞에 있는 6장 24절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와서 수도 사마리아성을 포위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시간이 지나자 양식이 바닥나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 굶주림이 얼마나 심했는지 자기 자식까지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처했습니다. 

  저희 집에도 토실토실하게 살이 쪄서 깨물어 먹고 싶은 아기가 하나 있지만, 부모의 마음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자신의 살점이라도 떼서 자식에게 먹이려고 하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지, 아무리 아기가 토실토실하고 굶주렸다고 해도 자기 자녀를 잡아먹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상황에까지 처해졌다는 것은 극한의 상황, 소위 말하는, 갈 때까지 간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성 안에서도 그런 극한의 상황에까지 처해 있었는데, 성 밖에 있던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두 말 할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아니면 내일 굶어 죽는 그런 상황에 있었고, 성 안에 들어갔다가 돌에 맞아 죽으나, 성 밖에서 굶어 죽으나, 아람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죽는 것은 매 한 가지였습니다. 올림픽에서는 결승전에만 진출하면 이미 은메달은 따놓은 거라고 하면서 기뻐하는데, 이 나병환자들은 죽음은 이미 확보해 놓은, 이미 따놓은 양상이고, 그래도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아람 진영에 가서 먹을 것 좀 달라고 해보자는 쪽으로 입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걸어갈 힘도 없었지만, 마지막 에너지를 다해서 아람 군대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좀 있어줘야! 먹을 것 좀 달라고 얘기해 볼텐데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아람 군대는 말과 병거 소리, 큰 군대의 소리를 듣고서 이미 도주한 상태였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얼마나 황급하게 도망을 갔는지, 감사하게도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 두고 가버렸습니다. 가장 감사한 것은 먹을 것을 남겨두고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컷 먹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아동부에서 설교할 때에, 이렇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람 진영에 보니까, 피자도 있고, 치킨도 있고, 족발도 있고, 온갖 맛있는 음식들이 있었는데, 한 나병환자가 족발을 하나 집어 들고는 “아니 이게 웬 족발이야?” 이렇게 말을 하니까, 또 다른 나병환자 한 사람이 말하기를 “몰라. 왼쪽 발인지 오른쪽 발인지... 그냥 먹기나 해.” 그렇게 말하면서 실컷 배부르게 먹었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그 때도 이게 무슨 뜻인지 잘 못 알아듣고 괜히 분위기만 썰렁했던 것 같습니다. 아람 진영에 족발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 족발이 왼쪽발이었는지 오른쪽발이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정말 오랜만에 먹고 싶은 만큼 잘 먹었습니다. 

  배가 채워지고 나니까, 은금과 의복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한 몫 두둑히 챙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제서야 성 안의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9절 말씀과 같이 서로 이야기합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날이다. 이것을 전하지 않고, 내일 아침 해 뜰 때까지 기다린다면, 벌이 오히려 우리에게 내릴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왕궁으로 가서, 이것을 알리도록 하자. "
  그래서, 그들은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 밤에 곧바로 일어나서 성 안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굶주린 사마리아성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것만큼 기쁜 소식은 없었고, 그 기쁜 소식을 듣고서 그들 또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 7장 20절까지의 말씀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이 네 사람의 나병환자를 통해서 우리는 전도자의 자세를 배울 수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바로 복음 전도자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면, 그들은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들은 절대절망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저앉지 않고, 용기를 내서 의지를 갖고 일어났습니다. 포기하고 죽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한 번 해보자! 죽든지 살든지 아람 진영에 한 번 가보자!” 그렇게 도전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시대를 보면,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연예인들의 자살로부터,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신발 하나 사줄 돈이 없어서 자녀에게 미안하다는 편지 한 장 남기고 자살을 한 안타까운 젊은 어머니의 소식도 있었습니다. 한국 자살예방협회에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자살율이 급증해서 현재 OECD 가입국가 중에 1위를 달리고 있고, 세계적으로는 2위이지만, 급증하는 추세로 보면 1위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로 자살을 많이 하느냐면 48분에 한 사람씩 죽고 있다고 합니다. 뉴스에는 몇 일 만에 한 사람이 자살하는 것 같지만, 채 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한 사람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시간에 한 사람씩 자살해도 1년이면 9천 명이 넘는데, 하루에 27명이 넘게 자살을 해서 1년 통계로 자살자가 만 39명입니다. 게다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1분 30초 마다 한 사람씩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1시간에 40명이나 자살을 시도하는데, 자살에 실패해서 살아있는 것이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서 1년에 자살 시도자만 35만 명이라고 합니다. 오늘 뉴스에도 보니까, 요즘에 불어닥친 금융위기로 인해서 자살율이 더 높아질 거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희망과 용기를 잃고 자신의 인생까지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포기되어지고,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자리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신실함으로 일하셔서 상황을 역전시켜 주시는! 우리의 피할 바위와 요새와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피곤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낙심한 자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바랄 수 있었습니까? 포기하지 않을만한 무슨 건덕지가 있었습니까? 나병환자가 돼서 성 밖에서 사는 것만 해도 이미 생을 포기할만한 이유가 될 수도 있었지만, 죽음만을 확보해 놓은 상황에서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전도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우리가 왜 포기할 수 없습니까? 한 생명이 너무나도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생명만큼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전도자인 우리들은 삶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고, 전도가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이 있겠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던 네 사람의 나병환자들을 생각하면서, 어떤 일에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복음 전도자가 가져야 할 자세는 침묵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9절에서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에 우리가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서로 얘기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와 같이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때마침, 한 사람이 지나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수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를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물에 빠졌던 사람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유가족이 알고서는 그 구경만 하고 있던 사람을 고소했습니다.

  그래서, 구경만 하던 그 사람은 법정까지 가서 서게 됐는데, 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자신은 수영을 할 줄도 모르고,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들어가 봐야 같이 죽게만 되기 때문이었다고 항변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사람은 유죄로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수영은 못하더라도 밧줄은 던져줄 수가 있었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칠 수도 있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로 선고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파수꾼이 성을 지키고 있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북을 쳐서 성 안에 그 일을 알려야 되는데, 침묵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군법에 회부돼서 중형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들인 우리들은 외치는 파수꾼들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모습을 보면, 침묵해야 될 때는 말을 하고, 말을 해야 될 때는 침묵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지난 번 행복소나타에 김문훈 목사님 오셨을 때 딱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데, 하나는 조용기 목사님 흉내를 똑같이 내셨던 것이 생각이 나고,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성도들이 세 사람만 모였다 하면 목사님이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씹어 돌린다! 이 말이 이상하게도 왜 그렇게 은혜가 되는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나가서는 벙어리로 지내고, 교회에서는 왜 그리 말들이 많은지, 누구 집에 누가 어떻게 했다느니 남의 흠 잡는 얘기나 하고... 그런 모습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 얘기가 아니라, 다른 교회 얘기기는 하지만,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네 명의 문둥병자들이 어차피 사마리아성에서도 버림 받은 몸들인데 자기들이나 배부르게 잘 먹고, 성 안 백성들이야 굶어 죽든지 말든지 그들에게 비밀로 하고, 아람 군대가 진쳤던 곳에서 자기들의 왕국을 만들고 잘 살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들이 침묵하고 있다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거라고 하면서 가서 전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그들은 잠잠히 있지 않고 기쁨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침묵해야 될 때에는 말을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때에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서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을 열어서 복음의 소식을 널리 전할 수 있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복음 전도자의 자세는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나병환자들은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해질 무렵에 아람 군대 진영으로 들어갔다고 했으니까, 거기서 상황을 파악을 하고, 음식들을 먹고, 은금과 의복을 챙기고 했다면, 시간은 한 밤 중이 되었을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봤을 때도 그 밤 중에 성에 간다는 것도 좀 무리였고, 체력적으로 봤을 때도, 죽을 힘을 다해서 와서 이제 겨우 음식 맛 좀 봤으니까, 아직 몸에 힘도 덜 들어갔고, 몸도 노곤하고 지쳐 있는 중이었고, 인간적으로 생각해 봐도, 성 안 사람들이 뭐 그렇게 잘 해준 것도 없었을텐데, 밤에 가나 아침에 가나 별 상관이 없다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가서 그 소식을 전했어도, 다들 고맙다고 할 일이지, 왜 이제서야 알려줬느냐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몇 시간만 지나도 굶어 죽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워낙 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아침이 되면 굶어 죽어있을 사람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한 것인데,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그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사태의 심각성과 위기의식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울 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우리가 내일도 살아있고, 항상 죽지 않고 살아서 복음 전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전도해야 할 대상들, 내 가족과 친척, 이웃들이 내일도 변함없이 살아있어서, 언젠가는 전도할 것이고, 죽기 전에 전도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이 우리 생각대로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살율 1위 뿐만 아니라, 자동차 1만대 당 교통사고 발생건수 1위에, 10만 명 당 교통사고 사망자수 1위, 음주운전 사고 세계 1위, OECD 국가 중 결핵 사망률 1위, 당뇨병 사망률 1위, 간암 사망률 1위, 흡연률까지 1위를 달리는 나라입니다. 내가 내일 어떻게 될 지 모르고, 내 태신자가 내일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릅니다.
   
  정근모 장로님의 동기 동창 중에 전두환 대통령 때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재익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학교 출신이니까 친한 친구 사이로 친하게 지냈는데, 그런데 장로님의 마음에는 늘 찔림이 있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 장로가 되었지만 저 친구는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데 내가 그냥 있으면 안 되지...’ 그래서 몇 번 만나서 전도를 하려다가 기회를 놓치곤 했었는데, 하루는 ‘오늘은 꼭 전도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정식으로 만나서 교회에 나가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사실은 나도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 다음 주간에 대통령을 모시고 미얀마에 가야 돼서 좀 바쁘니까 갔다 와서 자네와 함께 교회에 나가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강요하지는 못하고 헤어졌는데, 이후에 장로님이 TV 뉴스를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웅산 폭발사고로 인해서 김재익 경제수석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그날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아끼던 친구에게 좀 더 일찍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가슴을 치면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결론은 전혀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한 남자가 한 세상 쾌락의 빠져 있는 여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신 그렇게 하다가는 지옥에 간다고 얘기하면서 가장 효과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보이는 말로 전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 여인의 마음이 움직여지고 그 사람과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후에 함께 성경공부도 하면서 주님을 온전하게 영접하고 성령을 체험하면서 완전히 새사람이 됐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사실을 간증하면서 열심히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아내는 교통사고로 인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남편이 아내의 죽음이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죽기 전에 그를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해 너무나도 감사하면서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간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함에 있어서 지체할 수 없는 이유는 기회는 이렇게 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미루고 내일로 미루고 바쁘다고 핑계할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나병환자들과 같이 긴박감을 갖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네 사람의 나병환자를 통해 전도자의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침묵하고 있거나 지체하지 않고, 가서 아름답고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처럼 우리들도 전도함에 있어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나아가고,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순종해서, 죽어가는 우리 이웃들을 향해 침묵하고 있던 우리의 입술을 열어 담대히 복음을 전함으로 귀한 복음의 열매들이 많이 맺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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